KRR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𝟏
제301화

타천이 왼손을 들어 올렸다. 껌껌한 밤하늘이 그의 손으로 끌려와 거대한 어둠을 만들어 냈다.

끼이이익!

기괴한 어둠은 길쭉하면서도 탄력 있는 수십 개의 다리를 펼쳐 글렌이 움직일 수 있는 모든 방위를 포위했다.

우우우웅!

백혈교주의 입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언어가 초고속으로 흘러나왔다. 그녀의 주변에서 흐르는 혈기가 꼬이고, 꼬여 새하얀 창을 만들어냈다.

고오오오!

백혈기가 응집된 창날은 신이라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하면서도, 날카로웠다.

“흑괴.”

타천이 왼손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글렌을 포위하던 어둠이 응집되며 그를 가둬버렸다.

찌지지직!

흑괴가 글렌을 조이기 시작하자, 백혈교주가 만들어낸 혈창이 빛살이 되어 쏘아졌다.

뻐어어억!

혈창은 조금의 오차도 없이 흑괴의 중심에 내리꽂혔다.

쿠구구구!

흑괴 안에서 강대한 충격파가 번진다. 어둠이 갈라지며 혈창이 붉은 스파크와 함께 밀려 나왔다.

쿠구구구구!

글렌은 얇디얇은 검 한 자루로 어둠의 벽과 혈기의 창을 동시에 밀어내는 경악스러운 무위를 보여 주었다.

화아아아아!

글렌이 가볍게 손목을 털었다. 칼날에서 타오른 뇌기가 한순간에 증폭하여 적색 서기를 일으켰다.

쩌어어억!

거대한 혈창이 반으로 갈라져 떨어지고, 어둠의 감옥도 반으로 쪼개져 흩날렸다.

“망할 놈의 뇌기….”

“이거 쉽지 않겠군요.”

백혈교주가 혀를 차고, 타천이 입매를 비틀었다. 둘 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너희 모두 이전보다 못한 듯싶군.”

글렌은 백혈교주와 타천을 굽어보며 턱을 모로 틀었다.

“시간을 끌 필요는 없겠지.”

그가 태화보를 밟았다. 허공을 접으며 나아가 타천의 앞에 이르렀다.

후우우웅!

글렌이 눈을 부릅뜬 타천을 향해 진천검을 내리쳤다. 벼락이 떨어진 듯 찰나의 순간에 타천의 몸이 갈라졌다.

“생각보다 더 빠르시군요.”

타천은 몸이 반으로 나뉘었음에도 죽지 않았다. 찢어진 종이처럼 나풀거리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며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마법인가?”

“조금 섞었습니다. 물론 저만이 아니라….”

타천의 눈동자가 좌측으로 굴러간 순간 글렌의 등 뒤로 혈기의 안개가 치솟았다.

후우우웅!

글렌의 등줄기에서 핏물이 치솟았다. 그가 바로 진천검으로 쳐냈지만, 혈무는 사라지지 않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떠 있었다.

“천천히 가지고 놀다가 죽여줄게.”

안개 속에서 백혈교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뱀파이어의 능력인 안개화와 비슷하지만, 의념이 담긴 검으로도 베이지 않은 것을 보면 훨씬 고차원의 주술이었다.

“네가 구하러 온 손자가 네 시체를 감상할 수 있도록.”

“죽음이라.”

글렌이 차게 웃으며 진천검을 위로 들어 올렸다.

“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진천검에 깃든 뇌기가 부채꼴로 퍼지며 하늘 전체에 장대한 뇌전을 일으켰다.

빠지지직!

천공을 뒤덮은 뇌기가 그물처럼 맞물려 떨어진다.

하늘의 그물은 넓으면서도 촘촘하여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다는 말처럼 글렌이 일으킨 뇌망은 안개로 변한 백혈교주도, 어둠 속에 스며든 타천도 놓치지 않았다.

“천망?”

백혈교주가 인상을 찌푸리며 두 손을 모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상급 술법이 완성되며 혈기로 이루어진 벽이 치솟았다.

“이런!”

타천이 혀를 차고서 오른손을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손아귀에 차오른 백광이 태양을 닮은 거대한 구체가 되어 그의 몸을 휘감았다.

쩌어어어어엉!

그물로 화한 벼락 줄기가 혈벽과 백광을 깨부수며 무시무시한 폭발을 일으켰다.

“크윽!”

“으음….”

백혈교주와 타천은 뇌기에 직접 닿지 않았음에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속으로 상당한 충격을 받은 듯 인상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아무래도 힘을 아낄 여유는 없는 것 같군요.”

타천의 양손에 깃든 빛과 어둠이 동시에 떠오른다. 낮과 밤 그 자체를 담아낸 듯한 거대한 기운이 들끓었다.

“그래. 시간을 끌어봐야 의미 없어.”

백혈교주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그녀의 어깨 위로 타오르는 백색의 혈기가 연해지더니, 물처럼 투명하게 변했다.

쿠구구구구!

백혈교주와 타천이 일으킨 절대적인 기파에 공간이 비틀리며 허공에 기형적인 금이 돋아났다.

콰르르릉!

글렌이 진천검을 들어 올리며 발을 굴렀다. 찍혀 나간 대지에서 붉은 벼락이 솟구치며 사위를 휘감았다.

쿠구구구구!

세 사람의 기운이 경합하며 어마어마한 마나의 폭풍을 일으켰다. 대지에서 솟구친 폭풍이 하늘에 닿은 순간 세 사람의 신형이 동시에 움직였다.

쩌어어어억!

*     *      *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당장 내려달라고 비명을 지르는 오른팔을 끝까지 들어 올린 채 전방을 바라보았다.

“살 가치가 없는 악귀들이다! 모조리 베어라!”

“백련대 돌격!”

“백련대에 뒤지면 내일 훈련 2배다! 공검대 밀어붙여!”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눈동자에 짙은 불꽃을 일으키며 에덴의 귀신들과 백혈교도에게 돌진했다.

“제기랄!”

10사도가 로엔을 쳐낸 뒤 손을 뻗었다. 그는 짜증이 가득 차오른 눈동자로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을 가리켰다.

“모조리 죽여버려!”

그의 지시에 백혈교도들이 뒤로 물러난 뒤 전열을 갖췄다. 음습한 혈기를 일으키며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었다.

쩌어어엉!

절혼검과 셰릴은 중앙에서 정면 대결을 벌였다. 투기와 사기, 백검과 흑검이 격돌하며 대지가 뒤흔들렸다.

“크윽….”

금면사가 라온에게 당한 복부를 움켜쥔 채 일어섰다. 절혼검이 천검대주에게 막혀 있었기에 다음 명령권은 그에게 있었다.

“물러나는 순간 죽음이다! 끝까지 싸워!”

그의 외침에 에덴의 귀신들이 투기를 일으켰다. 시뻘건 투기가 하늘로 솟구치며 악마의 형상을 그렸다.

쿠와아아앙!

지그하르트, 에덴, 백혈교의 무인들이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오러와 혈기, 투기의 파동이 경합하며 검붉은 스파크와 충격파가 끝없이 터져 나왔다.

“크어어억!”

“이, 이 자식들 뭐야!”

“버텨라! 물러나면 더 위험해!”

“무슨 멧돼지도 아니고!”

각자가 가진 기운 자체는 호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지만, 검광이 번쩍일 때마다 백혈교도와 혈귀들의 목이 땅으로 떨어졌다.

“음?”

라온이 전장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뭐지?’

왜 저들까지….

친분 있던 무력 단체만이 아니라, 자신을 벌레처럼 여기던 직계 검사들도 강한 분노를 일으키며 적들에게 검을 내리쳤다.

직계 소속 검사들은 가문 내부에서 마주칠 때마다 무시하는 눈빛을 보냈기에 지금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았다.

“왜 저렇게 싸우냐고? 이유는 간단해.”

리메르가 뒤를 힐끔 보며 미소를 지었다.

“가문이니까.”

“가문이요?”

가문이라는 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직계 단체 소속 무인들은 가문에서 자신을 없는 존재처럼 생각했으니까.

“내부에서는 시기하고, 싸우더라도 외부의 적 앞에서는 하나 되어 검을 들지. 그게 가문이고, 그게 지그하르트다.”

리메르가 백혈교도들을 몰아붙이는 공검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더군다나 백혈교와 에덴은 지그하르트를 무시했어. 검사들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건 명예. 본인도 아니고, 가문의 명예가 짓밟혔으니, 모두 분노하는 게 당연하잖아.”

그 역시 화가 난다는 듯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가문….”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전장을 바라보았다. 전생에서는 너무도 공허하게 들렸던 그 단어가 지금은 따스하게 가슴을 적셨다.

“너….”

버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가 흔들리는 눈동자로 입을 뗐다.

“괘, 괜찮은 거냐?”

“그래. 괜찮아.”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괘, 괜찮다고? 그럴 리가 없잖아!”

그는 말이 안 된다며 입을 떡 벌렸다.

“네 꼴을 보고 말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가 안 나는 곳이 없다고! 이 멍청아!”

마르타가 라온의 전신을 훑어내리며 인상을 찡그렸다.

“음?”

라온이 본인의 몸을 살폈다. 라스의 기운을 운용한 대가 때문인지 혈관과 피부가 터져서 전신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라온….”

루난이 입술을 꾹 깨물며 다가왔다. 맹한 눈은 어디로 가고, 슬픔과 분노로 차오른 보랏빛 눈동자가 일렁였다.

“구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

그녀는 손수건으로 피를 닦아주며, 계속 미안하다고 말했다.

“늦게 와서 미안해.”

“괜찮….”

“으흐흐흑!”

괜찮다고 말하려 할 때 도리안이 앞으로 기어 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진짜, 진짜, 지이이인짜 죽는 줄 알았어요!”

그는 갈라진 땅을 주먹으로 내리치며 고개를 마구 흔들었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대륙추종향도 남겨두고 갔는데!”

“여기가 탐색 자체가 안 되는 곳이라서 수색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리메르가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네 덕분에 라온도, 너도 살 수 있었다.”

그가 도리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고생했다.”

“우어어어억!”

도리안이 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울부짖기 시작했다.

라온이 그런 도리안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래야지.’

도리안이 겁쟁이와 울보의 모습을 보여 주니 이제 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저 녀석이라면 저게 어울리지.

라스도 그럴 줄 알았다며 피식 웃었다.

“부단주!”

“다시 봐서 다행입니다!”

“정말 보고 싶었어요!”

“고생하셨습니다!”

광풍단도 진형을 유지한 채 뒤를 돌아보면서 반가운 웃음을 흘렸다.

“나도.”

광풍단의 목소리를 듣자, 심장이 크게 약동했다. 구름이라도 탄 듯 기분 좋은 울렁임이었다.

“나도 그렇다.”

광풍단 모두와 시선을 마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어.’

누군가에게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오늘로 자신의 삶이 크게 변한 기분이었다.

“자자,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어.”

리메르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방비를 갖춰. 라온과 도리안. 인질들을 끝까지 지킨다!”

“예!”

다시 검사들이 광풍진에 집중하는 순간 세 방향에서 강대한 기파가 일어났다.

투우웅!

우측에서 검은 오크 투구, 중앙에서 가마의 노인, 좌측에서 들소의 투구가 움직였다.

‘나를 잡으러 오는 거야.’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들은 부하들을 잃는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을 인질로 잡으려 하고 있었다.

“방진!”

“방진!”

버렌의 외침에 광풍단 검사들이 가운데로 밀집하며 굳건한 검기를 일으켰다.

“귀찮게 구네.”

리메르가 가볍게 땅을 박차고 나아가 가마의 노인과 들소의 투구가 일으킨 혈기와 투기를 쳐냈다.

쩌어어엉!

광풍단은 진의 중심을 방어로 맞추며 검은 오크 투구가 내지른 도격을 막아 냈다.

쿠구구구!

검사들은 강렬한 충격에 비틀거렸지만, 누구 하나 쓰러지지 않았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달라졌어.’

이전이라면 분명 진법이 깨질 위력이었건만 검사들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무력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력이 바위처럼 단단해진 게 느껴졌다.

후우우욱!

라온이 감탄할 때 뒤편에서 음습한 기세가 돋아났다. 황급히 뒤를 돌자, 그림자에서 회색 눈의 어린아이가 튀어나왔다. 백혈교주의 가마를 들고 있던 아이 모습의 혈귀였다.

치이이익.

백혈교도와 에덴의 귀신들이 죽어 갈 때 그림자 속에 숨어 기회를 엿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놈 위험해.’

손아귀에서 타오르는 혈기가 막강하다. 마스터 최상급에 이른 무력. 몸이 정상이었어도 막기 힘든 공세였다.

“음!”

“이런!”

“크윽!”

리메르와 셰릴, 로엔 모두 아이를 돌아보고서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해서든.’

라온이 살을 째는 듯한 고통을 참으며 검을 들어 올리려 할 때 눈앞으로 시퍼런 벽이 돋아났다.

캬아아앙!

아이가 뻗어낸 손은 그 벽에 막힌 채 튕겨 나갔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그가 우측을 돌아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멀린!”

“…….”

죽은 듯 주저앉아 있던 멀린이 천천히 일어난다. 눈동자에 깃든 광기가 이전보다 더 짙게 번들거렸다.

“록타가 아니라 라온.”

그녀가 이쪽을 바라보며 찢어질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라온이 아니라 록타.”

“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록타가 네게 깃든 이상 넌 록타야.”

멀린은 그게 옳다고 중얼거리며 마나를 개방했다. 허공에 떠오른 수십 개의 마법진에서 막강한 마법들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저 미친년이!”

혈귀가 양손으로 강기의 막을 만들었지만, 멀린의 끝없는 마법 공세에 뒤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어….”

“라, 라온 도련님?”

“이게 무, 무슨 일이야? 왜 저 미친년이….”

리메르, 로엔, 셰릴이 멀린과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나도 몰라요….”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저건 진짜 미친년이로구나.

‘…….’

라스의 말대로 멀린은 보통 미친 게 아니었다. 복수를 할 줄 알았건만 오히려 보호를 해주고 있었다.

“멀린!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상황을 반전….”

에덴을 이끌던 금면사가 멀린에게 지시를 내리려고 할 때였다. 거칠게 출렁이던 하늘에서 장대한 벼락이 떨어졌다.

콰아아아아앙!

천지를 관통하는 우레와 함께 글렌과 백혈교주 그리고 타천이 동시에 땅으로 내려섰다.

쿠구구구구!

세 사람은 각자 지그하르트, 백혈교, 에덴의 군세 앞에 선 채로 초월적인 기세를 내뿜었다.

라온은 글렌을 보며 턱을 떨었다.

‘좋지 않아.’

글렌의 제복은 여기저기 뜯겨나갔고, 어깨와 허리, 등에 생겨난 상처에서 검은 피가 흘러내렸다.

아무리 북멸왕이라고 해도 백혈교주와 타천 둘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무리였던 것 같다.

“어…?”

마르타가 갑자기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떨어뜨리고, 주저앉았다.

“마르타?”

“이제 끝을 내도록 하지.”

마르타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백혈교주가 양손을 앞으로 모았다. 붉은 입술을 통해 번진 주술이 웅대한 백광을 일으켰다.

고오오오오오!

그녀의 뒤편으로 여신의 형상이 세워진다. 44개의 팔과 세 개의 눈, 새하얀 피부를 가진 신이 천천히 눈을 뜬다. 각기 다른 색의 눈동자에서 뻘건 핏물이 흘러내렸다.

마라혈식관음. 혈신이라 불리는 괴이의 등장이었다.

콰아아아아!

타천이 손아귀에 쥐고 있던 백색 구슬과 흑색 구슬을 동시에 터트렸다. 그의 등 뒤로 여덟 장의 날개가 돋아난다. 오른쪽의 날개는 천사처럼 하얀 깃털로 이루어졌고, 왼쪽의 날개는 악마처럼 시꺼멓고, 날카롭게 갈려 있었다.

우우우웅!

날개 뒤편으로 장대한 후광이 돋아난다. 태양과 달. 음과 양이 그와 함께하고 있었다.

쿠구구구구구!

두 절대자가 퍼뜨리는 기세에 인간들이 피를 토하고 쓰러진다. 전율적인 기파. 마스터들조차 제대로 서 있지 못 했다.

“끄으으윽!”

라온이 무릎을 꿇은 채 턱을 파르르 떨었다. 눈을 들어 올릴 수도, 숨을 쉴 수도 없었다. 전신이 거대한 망치 아래에 깔린 듯한 느낌이었다.

“끄억!”

“아흑….”

“이, 이런!”

다른 이들 역시 두 발로 버티지 못했다. 호흡이 막혀 꺽꺽대며 무릎을 꿇고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저, 저걸 어떻게 막아….’

하늘조차 무너뜨릴 것 같은 두 절대자의 공세를 어떻게 막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글렌도 저 둘의 합공은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고개를 들어라.”

글렌이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그의 발밑에서 피어난 따스한 기운이 심혼을 짓누르던 백혈교주와 타천의 기파를 몰아냈다.

“검사가 보아야 할 것은 땅이 아니라 하늘이다.”

그 말을 들은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자부심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넓으면서도 믿음직스러운 등은 따라오라고 말하는 듯했다.

“좋구나.”

글렌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진천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에서 타오른 뇌기가 천지로 뻗어나가며 적색 서광을 일으켰다.

“검계현신.”

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하늘과 땅을 잇는 한줄기 선이 되었다.

“천의무봉.”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𝟐
제302화

글렌의 검계현신은 리메르처럼 진공 지대를 만들지도, 도괴처럼 어둠의 방으로 끌어들이지도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변한 건 오직 하나. 진천검이 뇌기로 타오르는 광검으로 변했다는 것뿐이었다.

라온이 글렌의 등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뭐지?’

별 기운은 느껴지지 않는데?

분명 검계현신을 운용했음에도, 그의 무엇이 변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내 경지가 너무 낮기 때문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백혈교주와 타천을 바라보았다. 천하를 압도하던 두 괴물은 글렌을 내려보며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확실해. 무언가가 변하신 거야.’

-그래. 변했느니라. 아주 지랄맞게….

라스가 턱을 살짝 떨었다.

-저놈 본왕의 생각보다 더한 괴물이었구나.

녀석은 놀랍다며 글렌의 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역시.’

글렌이 실수를 했을 리가 없다. 그는 검계를 통해 분명 어떤 변화를 이뤄냈을 것이다.

고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몸 상태가 최악이었기에 고리를 공명시키는 것만으로도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혀를 씹으며 참았다.

고리가 회전하며 마나의 흐름이 눈에 비치기 시작했다.

‘검…?’

글렌의 뒤에서 비치는 건 한 자루의 검이다. 그는 검으로 화해 있었다.

‘저 검은 뭐야….’

검사와 검이 하나가 된다는 신검합일 따위가 아니다. 그는 그 스스로 검이 되어 있었다.

빠르고, 가볍고, 강하고, 유연하고, 다채롭고, 현묘하고, 느리고, 무겁고, 곧바르며, 날카롭고, 굳건했다.

지금까지 배우고 익혔던 검술의 묘리만이 아니라, 전혀 모르는 검술들이 글렌을 이루고 있었다.

‘이게 가주님의 검계현신인가.’

천의무봉의 뜻은 하늘의 옷은 바느질 자국이 보이지 않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하다는 의미다. 글렌은 그 말대로 완벽에 이른 검이 되어 있었다.

찌이이이이잉!

타천이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등 뒤에 어린 태양이 번쩍이며 창대한 빛을 뻗어냈다.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섬광이 찰나의 순간에 글렌의 심장 앞에 이르렀다.

극한에 이른 속도와 무엇도 꿰뚫을 위력의 빛살이 다가왔을 때 글렌이 광검을 그었다.

후우욱!

담백하게 내려서는 검 앞에서 빛의 화살이 사라진다. 부딪치지도, 갈라지지도 않고 말 그대로 녹아내렸다.

“큭!”

백혈교주가 입술을 비틀며 두 손을 모았다. 그녀의 입에서 고속의 주술이 읊어진 순간 혈신의 손아귀에서 혈기로 이루어진 무기들이 솟구쳤다.

쿠구구구구!

검, 도, 창, 극, 활, 도끼, 망치, 비창, 채찍, 방패, 곤 등 이름조차 다 알 수 없는 갖가지 무기들이 손에 잡히며 강대한 혈기를 일으켰다.

백혈교주의 입에서 두 번째 주술이 뻗어 나가자, 혈신의 세 눈동자가 각기 다른 색으로 번쩍이며 손에 든 무기를 쏟아냈다.

쿠구구구구!

44개의 팔이 동시에 내려선다. 그 움직임은 각기 한 가지 무기로 극한에 닿은 무인의 진의를 그대로 담아내고 있었다.

대지를 통째로 가라앉혀버릴 무시무시한 혈신의 공세 앞에서 글렌이 뇌검을 쳐올렸다.

후우우우웅!

바닥에서부터 올라서는 뇌기의 칼날이 혈신이 일으킨 파천의 공세를 말끔하게 지워냈다. 그저 한 번의 휘두름으로 혈기도, 물리적인 공격도 모조리 사라졌다.

라온은 글렌의 검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게 검사의 완성형….’

백혈교주와 타천의 공격 둘 중 하나만 이곳에 떨어졌어도 모든 인간이 죽었을 거다.

글렌은 이 지역 자체를 지워버릴 기운을 검 한 자루로 사그라뜨렸다. 적이 만들어낸 현상 자체를 지워버리는 듯한 검술. 말 그대로 검신이었다.

지금의 그에게 불가능한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그게 다인가?”

글렌이 턱을 모로 틀며 차가운 미소를 그렸다.

“말했을 텐데, 전력으로 와도 된다고.”

“크윽!”

“음….”

그의 비웃음에 타천과 백혈교주의 인상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늙은이가 못 본 사이에 주둥이 수련도 했나 보네.”

백혈교주가 이를 갈며 지금까지와는 결이 다른 주술을 고속으로 외웠다. 그녀가 전력을 끌어올리자, 붉은 드레스 안쪽에서 낡은 물방울 목걸이가 튀어나와 흔들렸다.

쿠구구구!

혈신의 손에 들고 있던 무기를 지워버리고, 백혈교주처럼 손을 모았다. 44개의 손이 합장하며 온 세상을 혈광으로 물들였다.

“오늘은 제가 아니라, 그가 왔어야 했군요. 손해가 막심하겠어요.”

타천이 짧게 혀를 차고서 양팔을 펼쳤다. 태양의 후광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달의 후광이 짙은 어둠으로 가라앉았다.

찌지지지직!

빛과 어둠이 소용돌이친다. 백과 흑이 끝없이 뒤섞이며 보랏빛 혼돈을 일으켰다.

소리도, 파동도 없다. 타천이 일으킨 혼돈은 이미 이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아.”

라온이 눈을 부릅떴다.

‘이건 전생의….’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이 베이기 전에 느꼈던 죽음의 향기가 피어난다. 1초. 아니, 반의반 초 안에 이곳에 있는 모든 인간의 숨이 끊어지게 될 것이다.

파지지지직!

반항할 새조차 없이 죽음에 떨어지려는 순간 글렌의 뇌검이 번쩍였다.

“인해.”

글렌의 담담한 음성과 함께 검격이 사선으로 번진다. 비상하는 매의 날개처럼 퍼져나간 검혼이 타천이 쏟아낸 혼돈을 모조리 지워버렸다.

“사라져라!”

백혈교주가 합장한 손을 내리자, 혈신이 운용하던 어마어마한 혈기가 땅으로 내려오며 증폭한다.

쿠구구구구구!

이 지역을 지워버릴 생각인지 혈기가 하늘과 땅을 집어삼키며 끝없이 부풀었다.

“지결.”

글렌이 뻗어낸 뇌검이 지평선을 따라 질주하자, 대지를 먹어 치우려던 혈기의 기둥이 반으로 갈라졌다.

쩌어어어억!

교역도시 카멜룬조차 녹여버릴 수 있었던 혈기의 기둥은 단숨에 먼지가 되어 녹아내렸다.

“음….”

검을 내리는 글렌의 입술에서 붉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놈도 지쳤어! 끝장내!”

“알고 있습니다!”

백혈교주와 타천이 가지고 있는 모든 기운을 끌어 올렸다. 두 괴물의 손아귀에서 치솟은 혈기와 혼돈의 광채가 글렌을 향해 쏟아졌다.

쿠와아아아아아!

단순한 힘의 응집이었기에 위력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혈기와 혼돈이 사선으로 꼬이며 괴이한 빛을 일으켰다.

고오오오!

글렌은 입술에서 흘러내린 피를 손등으로 쓸어내리고 두 손으로 검을 잡아 상단으로 들어 올렸다.

“천검.”

하늘이 검으로 화하여 내려온다. 대륙이 갈라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세계가 다시 한번 붉은빛으로 물들었다.

쿠구구구구구!

온 세상을 비춘 붉은빛이 가라앉았을 때 눈앞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백혈교주도, 타천도, 에덴과 백혈교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

보이는 건 천신이 검을 내리친 듯한 웅대한 검격의 흔적뿐이었다.

글렌이 천천히 고개를 돌린다. 이채를 발하는 붉은 눈이 따라올 수 있냐고 묻는 듯했다.

“…….”

라온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감았다. 너무 피곤하여 더 이상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어둑해지는 시야 속에서 글렌이 펼쳤던 세 번의 검격이 뇌리에 그려졌다.

‘이건 죽어서도 잊지 못할 거야.’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수마에 빠져들었다.

*     *      *

글렌이 어느새 다가와 쓰러지는 라온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는 울대를 치며 역류하는 피를 도로 삼키고서 라온의 상태를 살폈다.

“좋지 않군.”

“예. 아까 확인해봤을 때 혈관이 찢어지고, 마나회로가 파열된 난 상태였습니다.”

리메르가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의 전투에 너무 집중해서 손을 댈 수가 없더군요.”

“음….”

글렌은 품에서 단약 하나를 꺼내 라온에게 먹인 뒤 오러로 내부를 풀어주었다. 창백했던 안색에 천천히 색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주님은 괜찮으십니까?”

로엔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다가왔다. 그의 싸움도 격했는지 의복 이곳저곳이 찢어져 있었다.

“괜찮다.”

글렌은 평소처럼 냉정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렇습니까.”

리메르가 글렌과 라온을 보며 옅게 웃었다.

‘똑같네.’

혈관과 근육이 찢어지고, 마나회로가 파열되어 놓고 괜찮다고 하는 라온이나,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상대하여 심한 내상을 입고 괜찮다고 하는 글렌이나 비슷하여 웃음이 나왔다.

남들이 보기엔 전혀 다르다고 하겠지만 외모나 성격이나 꼭 닮은 할아버지와 손자였다.

‘이 기회로 둘이 좀 친해졌으면 좋겠는데.’

사람이 많아서 이 이상의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글렌과 라온이 이번 일을 계기로 마음을 터놓길 바랐다.

“쯧.”

글렌은 본인이 만들어낸 장관을 내려보며 짧게 혀를 찼다. 무언가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이었다.

“놓친 겁니까?”

셰릴이 쌍검을 검집에 넣으며 다가왔다.

“모르겠군. 확실히 베었지만 워낙에 기이한 힘을 지닌 것들이니.”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일대일이었다면 무조건 숨통을 끊었겠지만 이대일이었다 보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는 잠시 하늘을 올려보다가 등을 돌렸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의 열기 띤 시선을 마주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 수고했다.”

“우와아아아아!”

“우리가 이겼다!”

“지그하르트 만세!”

지그하르트 검사들의 목소리는 하늘에 닿을 정도로 우렁찼다.

눈앞에서 글렌이 에덴과 백혈교의 수장을 지워버리는 모습을 보았으니, 자부심이 넘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으아아아아아!”

“지그하르트 만세!”

검사들은 요동치는 심장 박동을 즐기며 검으로 하늘을 찔렀다.

“음?”

리메르가 라온을 업다가 멈춰 섰다. 마르타가 무릎을 꿇은 채 일어나질 않았다.

‘감동이라도 받은 건가?’

그녀는 무력에 대해 누구보다 관심이 많으니 글렌의 검을 보고 감격한 것 같았다.

“언젠가는 너도 저런 경지를… 음?”

마르타에게 용기를 주려다가 입을 닫았다. 그녀의 표정은 감동과 거리가 멀었다. 경악. 그것도 절규하는 듯한 얼굴이었다.

“마르타. 너 대체….”

*     *      *

지그하르트가 떠난 뒤 카멜룬 북쪽 언덕 위에 두 사람이 나타났다.

한 명은 바포메트의 투구를 쓰고 있는 악양귀였고, 다른 사람은 라온이 착용했던 용의 투구와 비슷한 드래곤의 투구를 착용하고 있었다.

“이야. 뒷방 늙은이가 됐다더니, 개소리였네요.”

악양귀는 글렌의 검에 의해 삭제된 공간을 보며 휘파람을 불었다.

“북멸왕은 북멸왕이네요. 소문보다 더 강해진 거 아닌가요?”

“그 말대로다.”

드래곤의 투구 속에서 목을 긁는 듯한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정말이요?”

악양귀가 눈을 부릅뜬 채 뒤를 돌았다.

드래곤의 투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륙전쟁 이후 누구와도 부딪치지 않았는데, 홀로 저런 경지를 이루다니, 어처구니가 없군.”

그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그럼 당신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요?”

악양귀가 바닥에 걸터앉은 뒤 드래곤의 투구를 향해 능글맞은 눈빛을 보냈다.

“…….”

드래곤의 투구는 대답하지 않고, 글렌의 검에 의해 잘려나간 공간을 바라보았다.

“최소한 지지 않는다는 뜻이네요.”

악양귀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세상에는 괴물이 많다니까.”

그가 팔짱을 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인간들도 죽지 않았을 테고, 위가 높아서 이 후배는 정말 힘듭니다.”

“위만 바라보았다간 아래에서 잡힐 거다.”

“네?”

“이번 일의 시위가 된 지그하르트의 그 아이.”

드래곤의 투구를 쓴 남자가 등을 돌렸다. 파충류처럼 갈라진 눈동자에서 모든 것을 내려보는 오만한 이채가 돋아났다.

“앞으로 더 강해질 테니까. 아니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게 맞겠지.”

*     *      *

라온이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병동인가.’

하도 낯선 천장을 보다 보니, 이젠 어떤 천장이든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으음….’

온몸이 아프다. 피부, 근육, 뼈까지 통증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어디 하나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젠장.’

손가락을 움직이려고 하는데도 심한 고통이 일었다. 통증에 익숙해서 다행이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다시 기절했을지도 모른다.

-흥.

얼음꽃 팔찌에서 쏙 튀어나온 라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조금 커진 솜사탕이 된 걸 보니 약간이나마 힘을 회복한 것 같았다.

-네놈은 주제넘게도 본왕의 힘을 운용했느니라. 실패로 끝났을지언정 본인의 한계를 넘어선 기운을 사용했으니, 그 여파가 돌아오는 건 당연한 일이니라.

‘그렇겠지.’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가 넘겨준 분노와 냉기를 운용할 때 몸이 터지는 줄 알았다. 녀석의 기운은 아직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심하느니라. 대체 언제 성장할 것인지.

라스가 팔짱을 낀 채로 쯧쯧 혀를 찼다.

‘언젠가는 강해지겠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웃는데도 아팠지만, 기분은 좋았다.

-웃음이 나오느냐?

‘나와. 나올 수밖에.’

지금도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결계를 깨부수고 내려온 글렌과 차원을 열고 등장하는 지그하르트 검사들의 웅장한 모습이.

‘가문이 날 구하러 와줬는데 어떻게 웃음이 안 나오겠어. 그건 평생 잊지 못할 거야.’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달려와 준 그들에 대한 고마움 때문에 지금 죽어도 웃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본래 인간들에겐 그런 정이 있잖느냐. 너희는 혈연이니 더 할 테고.

‘난 잘 몰랐어.’

전생에서 난 버리는 말이었으니까.

그림자의 수장이니 뭐니 했지만, 실제로는 조금 크고 일 잘하는 사냥개에 불과했다.

전생의 그 기억 때문에 라온 지그하르트가 되었어도 이룰 것만 이루고, 얻을 것만 얻어서 떠나려 했다.

하지만 어제의 일로 생각이 바뀌었다.

지그하르트는 내 집이었고, 지그하르트의 검사들은 내 동료였다.

그걸 제대로 깨닫게 되자 세상이 시야가 열리고 세상이 밝아졌다.

-이상한 놈이로다.

‘그리고 너도.’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라스를 바라보았다.

-음? 본왕이 무언가를 했던가?

라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와 도리안을 구해주려고 네 힘을 넘겨줬잖아.’

평소의 라스라면 힘과 분노를 동시에 넘겼겠지만, 이번에는 아무런 대가 없이 힘만 보내주었다.

‘너도 다시 봤어.’

라스가 부하를 생각하는 마음은 진짜였다. 탐식의 마왕이자, 바보이며, 아낌없이 주는 호구라고 생각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녀석을 다시 보게 되었다.

-흥! 이, 인간 따위에게 칭찬을 들어봐야 조금도 기쁘지 않느니라!

라스는 입술 끝을 떨면서 고개를 홱 돌렸다.

‘고맙다. 라스.’

-본왕은 그저 부하를 구하고 싶었을 뿐이니라. 네놈 따위에겐 관심 없었느니라!

‘몸이 회복되는 대로 네가 먹고 싶다는 건 다 사줄게.’

-…저, 정말이냐?

진심을 담아서 말하자, 라스의 눈동자가 도르륵 굴러갔다.

‘그래.’

-커흠! 뭐, 사실 본왕도 이번에는 꽤 괜찮았느니라.

라스가 헛기침을 하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기분이 한껏 올라간 표정이었다.

-네놈도 인간치고는 괜찮은 놈이다보니, 보고 있으면 나름 재미가….

녀석이 들뜬 목소리로 주절거리고 있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초월에 닿은 검을 목격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

[정신세계….]

[검술 속성….]

[칭호….]

극한의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유지하여 글렌의 검술을 보았기 때문인지 올라가는 메시지가 많았다.

‘와아….’

메시지의 내용에 정신이 고조되어 육체의 통증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재미가 더럽게 없느니라!

잔잔하게 말하던 라스가 갑자기 빼액 소리를 질렀다. 녀석은 메시지를 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힘은 본왕이 썼는데 왜 보상은 네놈이 챙기는 것이냐!

‘음….’

-이 망할 도둑놈의 자식아!

어쩔 수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아낌없이 주는 호구 칭호는 남겨두어야 할 것 같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𝟑
제303화

-자비로운 본왕이라고 해도 이건 그냥 못 넘어가느니라!

‘자비는 개뿔.’

라온이 한숨을 내쉬었다. 반쯤 돌아간 라스의 눈빛을 보니, 또 발작이 시작될 것 같았다. 무시하고, 쭉 떠오른 메시지를 살폈다.

[초월에 닿은 검을 목격하셨습니다.]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합니다.]

[정신세계에 세 줄기의 검흔이 새겨집니다.]

[검술 속성의 성취가 상승합니다.]

[칭호<살아남은 자>가 생성됩니다.]

메시지를 보자, 탄성이 절로 터졌다.

‘이 정도 보상을 주다니….’

아니, 당연한 건가.

격한 전투를 벌이고, 라스의 힘을 운용했으며, 초월자들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해온 일을 생각해보면 이 수준의 보상을 받아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아! 빌어먹을!

물론 아낌없이 주는 호구 한 분은 받아들이지 못하고 괴성을 질렀지만.

화아아아!

모든 능력치가 10포인트 상승하면서 상처가 모두 회복된 것처럼 통증이 가라앉았다.

‘이건 언제 받아도 좋군.’

실제로 상처가 회복되는 건 아니지만, 능력치가 오를 때 동반되는 희열이 통증의 열기를 감소시켰다. 이제 좀 정신이 드는 느낌이었다.

‘정신세계에 새겨진다는 세 줄기 검흔은 뭐지?’

록타와 싸우고, 라스에게 버텨냈던 그 공간에 세 줄의 검흔이 새겨진다는 건데, 어떤 의미인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었다.

-그 말 그대로다.

라스가 눈을 부라렸다. 짜증 내는 것 같았지만, 솜사탕의 모습이라 전혀 와닿지 않았다.

-정신세계만이 아니라, 네놈의 뇌리에 직접 본 검흔이 새겨진다는 뜻이니라.

‘검흔? 설마….’

-그렇느니라. 너희 가주가 검계를 열고 사용했던 그 세 가지 검술이 네놈의 머리에 박힌 것이다.

‘미…친.’

라온이 자신도 모르게 턱을 떨었다.

‘그분의 검술이 머리에 새겨진다고? 그 세 번의 검이?’

글렌이 어떤 검술을 펼쳤는지는 모르지만, 그 무학이 대륙에 몇 없는 초월적인 검술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런 위대한 검술이 머리에 새겨졌다고 하니, 심장이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 쳤다.

‘그럼 나도 그 검을….’

-못 쓰느니라.

라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네놈의 경지는 요정도 수준이니라.

녀석이 침대에 놓인 베개만큼 손을 들어 올렸다.

-사실 이것도 네놈의 성장을 보아서 많이 쳐준 것이니라.

‘그럼 가주님은?’

-그 영감탱이는….

라스가 눈매를 찡그리고서 허공으로 떠올라 천장을 가리켰다.

‘천장인가?’

-이 천장을 넘어 하늘에 닿아있느니라. 네놈 따위는 그 영감의 손가락 하나조차 안 되느니라.

녀석은 글렌에게 닿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말라며 이를 갈았다.

‘그럴 거라 생각했어.’

라온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글렌은 라스가 수만 합을 싸워야 꺾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이고, 지금은 그 이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 초월자들을 바라보기에 지금 자신의 경지는 너무도 낮았다.

‘그럼 내 경지가 높아지면 그 검술이 어떤 건지 알 수 있다는 건가?’

-그렇느니라. 그게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라스는 놀리듯 그날이 평생 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럼 됐어.’

그 정도면 만족이다. 언젠가 글렌의 검술이 어떤 건지만 알 수 있다면 충분하다.

‘똑같이 쓸 생각은 없으니까.’

글렌의 검을 따라 할 게 아니라, 그의 검술을 참고하여 자신만의 검계를 열어야 한다. 남의 것을 따라하기만 해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

‘네 능력치를 빨아먹다 보면 언젠가는 닿겠지.’

-이이익….

피식 웃으며 손을 젓자, 라스의 눈동자가 찌그러졌다. 어차피 말로 못 이기는데 왜 매번 덤비는지 모르겠다.

라온은 라스를 가볍게 물리치고, 다음 메시지를 보았다.

‘모든 검술 속성의 상승.’

불의 고리를 통해서 검으로 화한 글렌의 검술을 보게 되면서 익히고 있는 검술 묘리들의 성취가 모두 상승했다는 뜻이다.

하나도 아니고, 익힌 모든 검술의 경지가 오르다니,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둘 다 참….’

불의 고리를 칭찬해야 할지 아니면 글렌에게 감사해야 할지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라온이 제일 밑에 뜬 메시지를 보고 바로 칭호의 내용을 확인했다.

<살아남은 자>

위기의 순간에서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살아남을 방법을 찾는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

능력 : 모든 능력치 + 5, 위기에 처할 때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는다.

내용을 읽어보니, 에덴에 납치되었음에도 놈들의 보물을 챙기면서 훗날을 도모한 덕분에 받은 칭호 같았다.

‘괜찮은데.’

암살자로 살아왔다고 해도 위기의 순간에는 몸이나 머리가 굳어질 때가 있다. 그런 좋지 않은 상황일 때 도움이 될 만한 칭호였다.

‘후우….’

라온은 메시지의 내용들을 모두 확인한 뒤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보상은 최고네.’

그중에서도 검술 경지가 올라간 것과 글렌의 검술이 정신세계에 새겨진 게 마음에 들었다.

‘검계현신에 더 가까워졌겠는데.’

정신세계가 성장했으니, 한층 더 검계현신에 다가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빨리 몸을 움직이고 싶군.’

팔다리가 근질거린다. 당장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어이!

‘아직도 불만이 있는 거야? 이제 그만….’

-그게 아니니라!

라온이 한숨을 내쉴 때 라스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네게 물어볼 게 있느니라.

‘음?’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예상과 달리 라스의 안색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네놈. 그 반쪽짜리 보고 투구 집단의 대가리 둘 중 하나라고 했었지?

‘반쪽이라면 타천?’

-그렇느니라. 그놈보고 피 귀신을 상대할 수 있는 두 놈 중 하나라고 했잖느냐.

‘그랬지.’

-나머지 하나는 무엇이고, 어디에 있느냐.

라스의 표정은 드물게도 심각하게 굳어져 있었다.

‘나도 잘 몰라.’

-모른다고?

‘에덴에서 백혈교주를 상대할 수 있는 건 둘이지만, 활동하는 건 하나라고 했잖아.’

-활동을 안 한다면 다친 것이냐?

‘그것도 몰라.’

라온이 고개를 저었다.

-대체 무슨….

‘몇십 년 전에 루멘 가문이라고 창술로 이름 높은 명가가 하나 있었어.’

-루멘?

‘그래. 육황오마 급은 아니지만, 그 바로 아래 단계 정도는 되는 가문으로 기세가 엄청났었지. 근데 그 가문이… 하룻밤 만에 멸망했어.’

루멘 가문의 창술은 대륙 일절로 평가를 받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대로 몇십 년만 힘을 쌓았다면 칠황이 되었을 그 거대한 가문은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렸다.

‘그 일을 저지른 게 에덴의 두 번째 수장이야. 다만 에덴의 입에서만 나오고, 생존자도, 목격자도 없으니 실제로 그가 있는지 아니면 허구의 인물인지는 아무도 몰라.’

루멘 가문이 하룻밤 만에 멸망한 충격이 엄청났기에 에덴의 두 번째 수장에 대한 소문은 무수히 퍼졌지만, 그 이후에는 아무런 등장도, 활동도 없었다.

지금에 와서는 없는 존재라고 여겨질 정도였다.

‘근데 그걸 왜 묻는… 설마 그놈도 마왕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렇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은 타천이 교만의 군주의 힘을 지닌 것을 느끼고, 다른 한쪽도 교만의 마왕과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놈의 이름은 무엇이냐.

‘천마.’

무슨 투구를 썼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지 모르지만, 에덴의 귀신들은 그를 천마라 불렀다.

-타락한 하늘과 마의 하늘이라….

라스는 무언가를 느낀 듯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혹시….

녀석이 다시 말을 걸어오려 할 때 병실의 문이 열렸다.

“어? 라온?”

물수건과 붕대를 가지고 온 루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놀란 음성이 울리자마자 주변에서 비명 같은 소리가 이어졌다.

“허억!”

“부단주님!”

“라온님!”

“일어나신 거예요?”

광풍단이 루난의 좌우로 몰려들어 방문 앞을 가득 채웠다.

“라온!”

“너 이 자식!”

“드디어 깨어나셨어!”

“와아아아!”

“부단주님!”

루난과 버렌, 도리안을 시작으로 광풍단이 방으로 달려 들어왔다.

“으어억!”

라온이 손으로 막으려 들었지만, 광풍단은 주인을 본 강아지처럼 달려와 그대로 침대를 덮쳤다.

“이제야 일어났어….”

“큰 문제는 없는 모양이네.”

“으흑! 정말 다행이에요!

루난이 손을 잡은 채 입을 삐죽 내밀었고, 버렌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으며, 도리안은 눈물을 글썽였다.

“너무 늦게 일어나셨잖아요!”

“상처는 좀 어때요?”

“라온님!”

“부단주!”

광풍단은 전부 침대에 모여든 채 자신을 짓눌렀다. 아픈 걸 떠나서 숨을 쉬기 힘들 정도였다.

“보기 좋네.”

“으윽….”

어느새 나타난 리메르는 호흡이 달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청춘이라며 히죽 웃었다. 저 인간은 역시 도움이 안 된다.

“이 자식들아. 나 환자야….”

라온이 풀린 눈으로 간신히 손가락을 까딱였다.

“다, 다 물러나!”

그제야 정신을 차린 버렌이 모두를 뒤로 물렸다. 도리안과 루난은 끝까지 떨어지지 않았다.

“후우….”

거친 숨을 뱉으며 식은땀을 쓸어내렸다.

‘죽을 뻔했네.’

조금만 늦었으면 에덴과 백혈교에게 살아남고 동료들에게 질식당해서 대륙 역사에 이름을 남길 뻔했다.

‘다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들 모두가 자신을 진심으로 걱정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이번 사건을 겪으며 지그하르트만이 아니라, 광풍단도 더 깊게 가슴에 들어온 느낌이었다.

“음?”

라온이 옅게 웃으며 광풍단 검사들을 한 명씩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르타는 어디 있어? 부상이라도 당한 거야?”

“그건 아니다.”

문 앞에 서 있던 리메르가 고개를 저었다.

“부상은 아니고, 뭔가 충격을 받은 느낌이던데.”

“충격이요?”

“말을 하질 않아서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이틀째 방에서 나오지 않고 있어.”

버렌이 마르타답지 않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마르타가 백혈교주와 타천을 보고 검을 떨어뜨렸던 게 생각났다. 아무리 적이 강하다고 해도 평소 그녀의 성격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다.

-확실히 그놈들을 본 이후에 소고기 소녀가 조용해졌지.

라스도 드문 일이라며 고개를 주억였다.

‘타천과 백혈교주.’

라온이 둘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한번 가봐야겠는데.’

*     *      *

라온은 광풍단이 진정하고 돌아간 뒤에 몸을 일으켰다. 아직 이곳저곳이 아프지만 못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재활 삼아 마르타에게 가보려고 했는데, 루난이 옆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납치당했을 때의 충격이 커서 호위를 서주려는 것 같았다.

“여긴 괜찮은데?”

“혹시 몰라.”

루난은 고개를 저으며 맹한 눈으로 이곳저곳을 살폈다.

‘그래도 눈빛이 돌아와서 다행이네.’

날카롭다 못해 섬뜩한 붉은빛을 띠고 있던 루난의 눈동자는 맹한 보랏빛으로 돌아왔다. 살짝 풀린 그녀의 눈빛을 보니 조금 안심이 되었다.

“그럼 마르타 방으로 안내 좀 해줘.”

“응.”

루난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숙소 가장 안쪽에 있는 마르타의 방으로 향했다.

-네놈이 웬일이냐? 평소라면 수련할 생각에 그냥 놔뒀을 것 같은데.

라스가 허공에 둥둥 뜬 채로 다가왔다.

-또 무슨 계략을 꾸미는 것이냐.

‘계략이라니….’

라온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제 라스에겐 자신이 무얼 해도 계획이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그냥 어떤 상태인지 보고 싶을 뿐이야.’

-얻을 게 없으면 관심도 두지 않는 네놈이?

‘그랬지만, 앞으로는 아닐 거야.’

납치 이전이라면 라스의 말대로 별일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놔뒀을 거다.

하지만 다른 이들이 자신을 구하러 와주었고, 그중에 마르타도 있었기에 어떤 상태인지 보고 도와줄 게 있으면 돕고 싶었다.

“여기야.”

루난이 복도 안쪽에 꽉 닫혀 있는 방문을 가리켰다. 방문 아래에는 건드리지 않은 음식이 쟁반에 놓여 있었다. 밥도 먹지 않은 채 이틀 동안 있었던 것 같다.

똑똑.

라온이 가볍게 노크를 했다. 방 안에 사람이 있건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르타.”

직접 이름을 부르자, 방 안에서 작은 기척이 느껴졌다. 물론 문이 열리지는 않았다.

“들어간다. 싫으면 말해.”

라온은 음식이 들어 있던 쟁반을 들고, 방문 앞으로 다가왔다.

“싫….”

“대답 안 했으니까. 들어간다.”

싫다는 말이 나오기 전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커튼까지 쳐놨기에 내부는 암실이나 마찬가지였다. 침대에도, 의자에도 마르타는 보이지 않았다.

“왜 들어왔어.”

방구석에서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르타는 이불을 뒤집어쓴 채로 구석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저게 소고기 소녀라고?

‘음….’

라온이 축 처진 마르타의 어깨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 일인 것 같았다.

“네가 대답 안 했으니까.”

“너라는 새끼는 진짜….”

“불 켤게.”

마법등을 켜지 않아도 마르타는 보였지만, 밝은 게 나을 것 같아서 불을 켰다.

“윽!”

오랜만에 빛을 봤기 때문인지 마르타가 짧게 신음을 흘렸다.

라온은 테이블 위에 음식이 든 쟁반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나쁘지 않은 음식이로다. 네가 먹을 것이냐?

‘너란 놈은 정말….’

미친 소리를 하는 라스를 놔두고 마르타 쪽을 보았다.

“무슨 일 있었어?”

“…아무 일도 없었어. 혼자 있고 싶으니까. 나가.”

마르타가 힘없이 손을 저었다.

“후…..”

라온은 마르타라고 생각되지 않는 가는 손짓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난 말이다. 혼자라고 생각했어.”

“뭐?”

“에덴에게 납치당했을 때도 누가 구하러 온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어. 혼자 살아남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지.”

정말이었다. 언제가 기회가 왔을 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 영약을 챙기고, 금면사와 대결을 벌이고, 투구의 혼을 흡수한 것이다. 가문이 구하러 올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했다.

“하지만 모두와 와준 것을 보고 사고방식 자체가 바뀌었어.”

라온이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기분 좋은 울림이 적막한 방을 울렸다.

“너와 루난을 비롯한 다른 이들이 모두 함께 와준 덕분에 나한테 제대로 된 소속감이라는 게 생긴 것 같다.”

마르타와 뒤에 서 있는 루난을 차례대로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이들을 대한 게 약간의 의리와 마음의 빚을 갚는 느낌이었다면 지금은 그런 거래 관계 자체가 머리에서 사라진 느낌이다.

“세상에는 혼자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 아니,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더 드물지. 우린 가주님이 아니니까.”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나도 이번에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 네게 조언할 자격은 없지만, 고민이 있다면 말해. 무슨 일이든 내 일처럼 고민해줄 테니까.”

마르타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고 나가려 할 때 이불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가….”

물기가 흐르는 목소리가 방을 적셨다. 뒤를 돌아보자 마르타가 꼭 쥐고 있는 낡은 물방울 목걸이가 탁한 빛을 발했다.

“그곳에 엄마가 있었어.”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𝟒
제304화

라온은 눈이 충혈된 마르타를 보며 턱을 떨었다.

“너희 어머니가 전장에 있었다고?”

마르타는 단 한 번도 본인의 사연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다. 분위기상 10사도가 그녀의 마을을 공격했다고 추측했을 뿐이다.

그들이 잡아간 사람들은 혈귀들의 먹이가 되기 때문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여기서 엄마를 봤다는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래.”

마르타가 고개를 끄덕였다. 시꺼먼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우리 엄마가 있었어.”

“누구였는데?”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고, 천장에 달린 마법 등을 올려다보았다.

“더 젊어지고, 예뻐졌지만 분명히 우리 엄마였어. 내가 모를 수가 없다고….”

그녀는 잘못 봤을 리가 없다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마르타?”

이름을 부르자, 그녀의 시선이 내려온다. 절망과 공허함이 담긴 듯 눈동자가 탁 풀려 있었다.

“백…혈교주.”

“…뭐?”

라온이 신음을 흘렸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이름에 순간 머리가 텅 비어서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

루난도 깜짝 놀라서 뒷걸음질을 쳤다. 바닥에 놓여 있던 물병이 쓰러지며 둔탁한 소리가 흘렀다.

“백혈교주가 우리 엄마의 모습을 하고 있었어.”

마르타는 확신을 담아 말했다. 죽어가는 듯한 눈동자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외모가 닮았다는 거야?”

“닮은 게 아니라. 백혈교주가 우리 엄마야.”

“그게 무슨 소리….”

라온은 고개를 젓다가 마르타의 손에 들린 낡은 물방울 목걸이를 보았다.

‘저건….’

훈련생 시절 여름에 거친 훈련을 할 때 그녀의 목에서 튀어나왔던 목걸이다. 굉장히 아끼는지 튀어나오자마자 다시 옷 속에 넣는 모습을 몇 번 봤었다.

‘저걸 분명 봤는데. 아!’

라온이 떨리던 다리를 잡지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백혈교주. 그녀가 가지고 있었어….’

백혈교주가 혈신을 소환하고 글렌과 전력을 다해서 부딪칠 때 그녀의 드레스 밖으로 목걸이 하나가 튀어나와 흔들렸었다.

색은 다르지만, 마르타의 손에 잡혀 있는 목걸이와 똑같은 형태였다.

‘그러고 보니….’

외모도 비슷해.

백혈교주도 마르타는 같은 흑발흑안이었다. 이제 떠오른다. 백혈교주를 보고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바로 앞에 있는 마르타였다.

마르타의 외모는 성격과 다르게 단아한 느낌을 주지만, 그녀가 조금 더 나이를 먹고 농염함을 드러낸다면 백혈교주와 흡사한 외모가 될 것 같았다.

‘그럼 백혈교주가 진짜 마르타의 엄마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확신이 진짜라는 생각이 뇌리를 거세게 두들겼다.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게 대체….’

고민 상담을 해주겠다고 했지만, 마르타에게 무슨 말을 해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전생에 정상적인 삶을 살지 않았던 게 이럴 때 발목을 붙잡는다.

‘라스. 어떻게 해야 하지? 해줄 말 없어?’

-바, 밥을 먹여야 하나?

‘…….’

라스도 정상적인 삶을 살아오지 않았기에 역시나 도움이 되질 않는다.

“마르타. 백혈교주가….”

“그녀는 우리 엄마가 아니야.”

마르타는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를 하며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 얼굴과 몸은 분명 우리 엄마가 맞지만, 그 속에 있는 건 다른 년이야.”

그녀가 바닥을 긁으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우리 엄마는 더럽게 웃지 않아. 남을 죽이긴커녕 욕도 못 하는 사람이야. 우리 엄마가 혈귀 놈들의 대가리가 됐을 리가 없다고!”

“…….”

루난이 다가가서 마르타의 떨리는 손을 꼭 잡아주었다. 평소의 마르타라면 쳐냈겠지만, 그녀는 조용히 루난의 온기를 받아들였다.

라온이 목을 매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그럼 마르타 어머니의 육체에 백혈교주의 혼이 들어간 건가?’

에덴의 투구를 직접 겪었기에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령술이든, 혈술이든, 주술이든 그 정도 수준의 괴물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혼을 옮기는 방법을 만들었을 것이다.

-맞다. 그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라.

라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쯧 찼다.

-마계에도 그런 기생충 같은 것들이 꽤 많지. 놈들은 더러운 영혼으로 건강한 육체를 탐하는 아귀들이니라.

‘…너도 똑같이 내 몸을 빼앗으려고 했잖아.’

라온이 입맛을 다셨다. 따지고 보면 라스도 별다를 건 없었으니까.

-보, 본왕은 네놈의 소원을 듣고 온 거라니까! 네놈이 원했다고!

‘난 안 그랬는데?’

-했다고! 이 망할 악귀 자식아!

‘뭐, 그러던가.’

-끄아아아아악!

라스가 머리를 부여잡은 채 비명을 질렀다.

‘좀 비켜봐.’

라온은 버둥거리는 라스를 밀어놓고, 손가락을 매만졌다.

‘그럼 백혈교가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도 그걸 위해서였나?’

백혈교는 마을이나 도시를 습격한 뒤 그곳에 살던 사람의 절반은 죽이고, 절반은 본부로 데리고 간다.

지금까지는 교리 같은 거라고 생각했지만, 마르타의 말을 듣고 보니, 백혈교주의 혼이 들어갈 육체를 찾기 위해서라는 생각도 들었다.

‘혹시 되돌릴 방법도 있어?’

-끄응, 일반적으로는 불가능하지. 다만 상황에 따라 다르니라.

‘상황? 그게 뭔데.’

아예 가능성이 제로는 아니라는 말이었기에 라스를 붙잡았다.

-육체 주인의 영혼을 집어삼켰는지 혹은 가둬두었는지에 따라 다르다는 말이니라.

라스는 놓으라고 버둥거리며 말을 이었다.

-너도 이번에 겪었잖느냐. 네놈은 반쪽짜리 용의 혼을 흡수했기에 되돌릴 수 없지만, 만약 그 정신세계에 주인의 영혼을 가둬둔다면 살아날 가능성도 있느니라.

‘음, 그럼 마르타의 엄마가 살아 있을 가능성은 없다는 뜻이네….’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을 벌레만도 못하게 보는 백혈교주가 영혼을 살려둘 리 없었다.

-그게 또 그렇지는 않느니라.

‘음?’

-전에 인과율에 대해 말했지.

‘그래. 원인과 결과.’

-강한 힘에는 그만한 반동이 있느니라. 사악하다고 무조건 육체의 혼을 죽인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계약과 조건이 걸렸을지 모르니까.

라스는 목덜미를 떠는 마르타를 보며 결과는 알 수 없다고 중얼거렸다.

“으음.”

라온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괜한 희망을 줄 수는 없어서 마르타에게 라스의 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뭔가 확신을 줄 만한 게 있다면….’

속으로 한숨을 내쉴 때 마르타의 손에 잡힌 목걸이가 보였다.

‘잠깐….’

좀 이상한데.

마르타의 어머니가 백혈교주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면 저 목걸이를 차고 있을 리가 없었다. 예쁘지도, 비싸지도 특별한 능력도 없는 낡은 목걸이니까.

본인과 관계도 없는 낡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는 걸 보면 라스의 말대로 마르타 어머니는 백혈교주에게 밀려서 정신세계에 갇혀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우우우우웅!

허리에 차고 있던 진혼검이 갑작스럽게 진동을 일으켰다. 그 말이 맞다는 것처럼.

“마르타.”

라온이 주먹을 말아쥐고 일어섰다.

“구할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닐 거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 목걸이.”

마르타가 쥐고 있는 물방울 목걸이를 가리켰다.

“백혈교주도 그 목걸이를 착용하고 있었어.”

그 말에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죽어가던 눈동자에 옅은 빛 한 방울이 돋아났다.

“정말 백혈교주에게 네 어머니의 혼이 먹혔다면 그 목걸이를 착용할 이유가 없잖아. 불가능에 가깝겠지만, 희망이 없는 건 아니야.”

라스와의 대화를 그대로 말해주니, 마르타 눈동자가 조금 더 밝아졌다.

‘아, 잠깐.’

라온이 마르타의 눈을 피하며 인상을 찡그렸다.

‘백혈교주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는데….’

-살아 있다.

라스가 그게 뭐 별일이냐는 듯 가볍게 대답했다.

-그놈도, 반쪽짜리 프라이드도 살아갔느니라.

*     *      *

상업도시 카멜룬 외곽.

고풍스러우면서도 화려한 저택 앞에 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다.

도로를 지나가던 상인이 저택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는 궁금증을 참지 못했는지 바로 옆에 있는 노인에게 다가갔다.

“이곳은 빈집 아니었습니까? 무슨 일로 이렇게 모여 있는 겁니까?”

“이곳에 북멸왕께서 묵고 계시다네.”

노인은 별관의 가장 윗층을 올려보면서 짧게 숨을 뱉었다.

“부, 북멸왕이면 글렌 지그하르트?”

노인의 시선을 따라가던 상인이 기겁하며 물러섰다.

“쓰읍! 함부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다니, 조심하게!”

“아, 죄, 죄송합니다.”

“그분이 이곳에 계시니 어떻게 해서든 줄을 서려는 잡상인들이 모여든 것이지.”

노인은 부질없는 짓이라며 피식 웃었다.

“근데 왜 북멸왕이 카멜룬에 온 거죠?”

“그것도 모르나? 자네 대체 어디서 뭘했던 건가.”

“로베르트에서 오늘 올라왔거든요.”

상인은 남쪽에서 가져온 향신료들을 보여주었다.

“아, 그러면 모를 만하군.”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서쪽을 가리켰다.

“에덴 놈들이 카멜룬 서쪽에 지부를 설치해놨었거든. 그곳에서….”

노인은 카멜룬 전체에 퍼진 소문을 모두 말해주었다.

“호, 혼자서 백혈교주와 타천을 상대했다구요? 북멸왕이? 허어….”

상인이 입을 떡 벌렸다. 이전에는 글렌 지그하르트를 대륙제일인으로 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지그하르트의 활동이 멈추면서 다른 절대자들을 더 위로 여기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최근에는 북멸왕을 뒷방 늙은이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는데, 홀로 오마의 수장 둘을 상대할 무력이 되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게 다가 아니야.”

노인이 손가락을 빙글 돌렸다.

“그의 손자인 라온 지그하르트도 북멸왕에 못지않은 업적을 이뤘네. 납치된 상태에서 인질들을 구하기 위해 5사도를 죽이고, 금면사라는 마스터 상급의 검사도 베었다고 하더군. 그것도 백혈교주와 타천 앞에서.”

그는 젊은 검사의 기개가 대단하다고 말하며 씩 웃었다.

“솔직히 말해서 난 그 친구가 더 대단하다고 봐. 이제 20살도 안 된 무인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그, 그러네요.”

상인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지그하르트라….’

최근 지그하르트는 그리 큰 이름을 떨치고 있지 않았다. 중앙에서 큰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육황에서도 중급 정도로 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북쪽의 검은 더 차갑고 강해졌다는 소문이 돌 것이다. 역시나 지그하르트의 이름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상인은 돌린 채 뒤에 가서 선 뒤에 배낭을 내려놓았다.

“자네 갈 곳이 있는 것 아니었나?”

노인이 상인의 배낭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어르신 말씀을 듣다 보니, 지금 장사가 중요할 때가 아니네요.”

상인이 피식 웃으며 주저앉았다.

“현재의 천하제일인과 미래의 천하제일인일 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곳에 있다면 얼굴은 봐야지요.”

*     *      *

저택 최상층에서 아래에 모여든 사람들을 내려보던 노파가 방긋 웃으며 뒤를 돌았다.

“모두 가주님을 보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군요.”

그녀는 중앙에 앉아 있는 글렌을 보며 눈웃음을 지었다.

“인사라도 해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다들 좋아할 텐데요.”

“철새처럼 언제든지 날개를 돌릴 수 있는 자들이다. 의미 없다.”

글렌은 의자에서 일어서지 않은 채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와 거래를 열려면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었는데, 이제 와서 길을 트려는 자들과는 만날 이유가 없었다.

저들이 아니라도, 거래를 트려는 사람은 수없이 많으니까.

“그렇겠지요.”

노파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자네는 왜 온 것이지? 암시장주.”

글렌이 노파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대륙 전체에서 손꼽히는 정보 단체 암시장의 주인이 바로 이 인자해 보이는 노파이다.

중앙에 한정되던 암시장을 지금의 규모로 일궈낸 사람이 이 노파였기에 방심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거래는 끝났을 텐데.”

“거래는 끝났죠. 하지만 은혜는 남았습니다.”

암시장주가 글렌의 앞으로 다가가서 허리를 굽혔다. 힘든지 살짝 목을 떨면서도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은혜?”

“예. 그란세빌은 저희가 꽤 공들여서 운용하는 지역이었습니다. 상업의 카멜룬처럼, 유흥의 그란세빌로 만들려고 했었죠.”

“그래서?”

“그걸 위해서 암시장의 많은 인재를 그란세빌로 파견 보냈습니다. 제 후계자 후보 한 명도 보냈지요.”

“안대를 쓴 여아를 말함인가?”

글렌이 눈매를 좁혔다. 이번 일에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나선 암시장의 지부장이 떠올랐다.

“그렇습니다.”

암시장주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광풍부단주 덕분에 7사도에게서 살아남은 아이지요. 라온 님을 어떻게 해서든 구해야 한다고 제게 매달렸습니다.”

그녀는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 아이를 구해주어서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북멸왕이시여.”

“그 아이는 고마울 정도로 진심이었지. 다만….”

글렌은 암시장주를 지그시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팔걸이를 두드렸다.

“암시장주의 감사는 받기 어렵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길이 없으니까.”

“절 너무 경계하시는군요. 이번만큼은 그저 감사드릴 뿐입니다. 소녀의 마음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소녀라.”

글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다만 자네나 그 아이가 감사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야.”

“알고 있습니다. 그 아이도 이곳으로 오고 있으니, 광풍부단주에게 함께 인사를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암시장주는 글렌을 올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광풍부단주를 예상보다 더 아끼고 있군.’

글렌 정도의 위치라면 다른 이들의 인사를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공을 자연스럽게 넘기는 모습을 보니, 라온이라는 아이를 소중히 여기는 게 분명했다.

‘하긴 그게 아니었다면 구하러 오지도 않았을 테니까.’

지그하르트를 무시했다는 핑계를 댔지만, 가주가 직접 움직인 것을 보면 라온이라는 아이를 후계자급으로 여기는 게 분명했다.

‘그럴만해.’

라온 지그하르트는 19살에 마스터 중급에 오르고, 사도 셋과 마스터급 귀신 다섯을 잡은 괴물이다.

나이는 어리지만, 후계자 끄트머리 급에 올라갈 기량은 충분했다.

“가주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암시장주가 허리를 혀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뭐지?”

“이번 일을 통해서 암시장도 에덴과 백혈교의 견제를 받게 될 거라 생각됩니다.”

“그렇겠지.”

“에덴과 백혈교를 상대하는데 임시로 연합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정보를 줄 테니, 무력을 빌려달라는 건가?”

“그렇습니다. 저희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은 하겠지만, 상위 사도 급은 희생이 극심할 듯해서….”

“알겠네.”

글렌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뜬 후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암시장주가 고개를 숙였다.

‘이것도 라온 때문인가.’

본래 글렌의 성격은 독보. 이런 연합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을 리가 없다.

그는 아직도 라온을 납치한 백혈교와 에덴에 대한 분노를 가라앉히지 못한 것 같았다.

‘라온에게 선물을 준비해야겠군.’

미리 선을 대놔서 나쁠 건 없으니, 그의 몸 상태를 좋게 할 선물을 챙겨두는 게 좋아 보였다.

“전 그럼 서류를 준비한 뒤 넷째와 다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암시장주는 고개를 꾸벅이고서 방을 나섰다.

“나쁘지 않겠군요.”

외곽에 서 있던 셰릴이 앞으로 나오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 쪽 정보는 북과 중앙에 한정되어 있으니, 암시장의 힘을 빌린다면 꽤 많은 이득을 얻을 수 있을 겁니다.”

“제 생각도 비슷합니다. 이미 전쟁은 시작되었고, 피할 수 없다면 멸망시켜야지요.”

로엔이 허리춤의 세검을 어루만졌다. 인자하기만 했던 그의 눈빛에 섬뜩한 살의가 일어났다.

“진정 좀 하세요.”

셰릴이 피식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음, 실례했습니다.”

로엔이 민망하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다만 눈빛에 맺힌 살기는 지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전 라온 도련님께 위해를 가한 놈들을 가만히 놔둘 수가 없군요. 굳은 몸을 좀 풀어놔야 할 듯 합니다.”

그는 전성기의 능력을 되돌려야겠다며 검병을 쥐었다.

“이해해요. 만약 라온이 잘못되었다면 저도 대륙을 헤집으면서 돌아다녔을 테니까.”

셰릴도 섬뜩한 눈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렇지.”

글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벌레 같은 것들은 살려둘 이유가 없다. 보고가 뜨는 대로 확실하게 지우도록.”

“예!”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섬뜩한 눈빛을 빛냈다.

“하….”

리메르가 로엔과 셰릴, 글렌을 보며 헛바람을 흘렸다.

‘맨날 나보고 팔불출이라더니, 지들이 더하네.’

예전에 뭘 애를 그리 챙기고 다니냐고 하던 사람들이 이젠 라온 때문에 대륙을 뒤집을 기세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

‘진짜 이상하다니까.’

셰릴은 딱히 아이를 좋아하지 않고, 로엔은 인자해 보이지만 누구보다 냉정한 성격이다. 저 둘이 라온에게 빠졌다는 게 참으로 신기했다.

‘하긴 매력은 있지.’

라온은 아이답지 않게 누군가에게 어리광을 부리지도, 도움부터 요청하지도 않는다. 천재 따위가 아니라, 위를 보며 달리는 노력가였기에 저들의 마음을 끌어당겼을지도 모르겠다.

“저….”

리메르가 글렌에게 말을 걸려고 할 때였다. 문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가주님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노크 이후에 조금 긴장한 듯한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어?”

살기를 일으키고 있던 로엔과 셰릴의 기세가 촛불처럼 훅 꺼졌다.

“제가 문을 열겠습니다.”

“잠깐!”

로엔이 평소처럼 문으로 다가가려 할 때 리메르가 기막을 쳐서 소리를 막았다.

“가주님.”

그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또 냉정한 척하실 생각이죠?”

“음….”

“이번 일을 겪었으니까 잘 아실 텐데요. 무인으로 사는 이상 위험한 일은 수시로 찾아와요. 진심을 전하지 못할 수도 있다구요.”

리메르는 드물게도 진지한 눈빛으로 글렌을 쏘아보았다.

“이제 속마음을 좀 밝히세요. 손주 아낀다고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어요!”

“윽….”

글렌이 처음으로 리메르를 보며 어깨를 움찔했다.

“뭐, 저 주정뱅이의 말은 무조건 반박하고 싶지만, 이번만큼은 맞는 말이네요.”

셰릴이 큼지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문 앞에 선 로엔이 방긋 웃었다.

“저도 가주님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으니까. 많은 거 안 바랍니다.”

리메르가 한숨을 쉬며 검지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걱정! 걱정했다는 한마디는 꼭 해주셔야 합니다!”

그는 부탁한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고서 문 앞으로 다가갔다.

“잠깐!”

글렌이 손을 들어 올렸다. 리메르, 셰릴, 로엔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크흠.”

그는 바싹 긴장한 음성으로 헛기침했다.

“지, 지금 내 목소리 괜찮으냐? 이상하지는 않지?”

“…….”

또 무슨 소리를 하나 싶어서 인상을 찌푸리던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멍해졌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𝟓
제305화

라온은 글렌의 방문 앞에 서서 눈매를 좁혔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시는 건가?’

조금 전 내부의 소음이 사라졌다. 누군가가 소리를 지우기 위해서 기막을 설치한 것 같다.

‘조금 전 그 사람 때문인가?’

이곳으로 올라오면서 암시장 간부로 보이는 노파와 눈을 마주쳤는데, 그녀와의 대화 내용을 감추기 위해서 내부의 소리를 막은 모양이다.

툭.

노파의 얼굴을 확실히 기억해두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로엔이 나왔다. 평소와 같은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때와는 천지차이네.’

세검 한 자루로 10사도를 몰아붙였던 차디찬 암살자는 사라지고, 마을을 돌아다니는 동네 할아버지만 남아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덕분에요.”

라온이 주먹을 쥐었다가 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군요. 들어오시지요.”

로엔이 옆으로 나오며 길을 비켜주었다.

“감사합니다.”

라온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안으로 들어갔다.

리메르는 벽에 등을 기댄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고, 셰릴은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가운데로 걸어가 글렌의 앞에 섰다. 그는 가주전 알현실에 있을 때처럼 무뚝뚝한 얼굴이었다.

아니, 노파와 이야기가 잘못되었는지 표정이 평소보다 더 굳어 있었다.

“무슨 일이냐.”

목소리가 조금 갈라진 것을 보니, 내상이 다 회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감사 인사를 드리려고 왔습니다.”

“감사 인사?”

“예.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온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와주리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그 고마움은 훨씬 컸다. 글렌을 보자, 죽음을 마주했던 때가 생각나 지금도 가슴이 떨렸다.

“널 위해서가 아니었다.”

글렌이 눈동자가 겨울을 담은 듯 차갑게 내려앉았다.

“버러지들에게 지그하르트를 무시한 대가를 치르게 해주었을 뿐이다.”

“억….”

이유는 모르겠지만, 글렌의 말이 끝나자마자 리메르가 갑자기 본인의 이마를 탁 쳤다.

“그렇다고 해도 제가 가주님 덕분에 살게 된 건 달라지지 않습니다. 저와 제 동료를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 정도 예상했던 대답이었기에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숙였다.

“라온 지그하르트. 넌 자만하고 있다.”

글렌의 눈동자가 가늘게 좁혀졌다. 검기와도 같은 날카로운 기파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그 나이에 그 무력. 분명 나쁘지 않은 성취지. 허나 네 위에는 수없이 많은 강자가 있다. 그들은 나이가 어리다고, 재능이 넘친다고 봐주지 않는다.”

맞는 말이다. 스스로의 성장에 과신하여 뒤를 생각하지 않고 움직였다.

‘너무 단순하게 달려들었어.’

웬만한 사도급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7사도를 베긴 했지만, 그 뒤에 튀어나온 10사도와 멀린의 등장은 자신의 예측을 한참 벗어나 있었다.

그런 괴물들은 계획 자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에 처음부터 벗어날 구멍을 만들고 움직였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라온이 글렌의 꾸짖음을 받아들이며 고개를 숙였다.

“하아….”

셰릴이 평소와 달리 한숨을 내쉬고서 등을 돌려 창밖을 내려다보기 시작했다.

“다시는 이런 기적이 없을 것이다.”

글렌이 턱을 괸 채로 인상을 찌푸렸다. 눈빛이 더 서늘한 빛을 띠었다.

“네 주제를 넘어서는 행동은 하지 말도록. 무력이 따르지 않는 참견은 그저 의미 없는 희생일 뿐이니까.”

“흐읍.”

로엔이 입을 틀어막은 채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을 하늘처럼 여기는 그에게서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이것도 맞는 말이야.’

세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글렌의 말은 옳았다. 무력이 모자란 채로 남을 구하기 위해 뛰어드는 건 동반 자살하겠다는 뜻밖에 되지 않는다. 마음만으로 이룰 수 있는 건 없으니까.

“가주님의 말씀을 뼛속에 새기겠습니다.”

라온은 진심으로 글렌의 충고를 받아들이며 눈을 내리감았다.

‘그러고 보니 가주님은 괜찮으신가?’

그가 피를 흘리는 모습을 보았고, 지금 표정도 좋지 않았기에 조금 걱정이 되었다.

“가주님, 내상은 괜찮으십니까?”

“크흠, 신경 쓸 것 없다.”

글렌의 얼굴이 바싹 마른 나뭇잎처럼 심하게 굳어졌다. 아무래도 아직 내상이 낫지 않은 것 같았다.

“…너는 괜찮으냐?”

“나쁘지 않습니다. 일주일 정도 지나면 복귀할 수 있을 겁니다.”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을 잊었나?”

그의 목소리에 무거운 위엄이 서렸다. 강한 압력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자만하지도, 주제를 넘지도 말라고 했지. 넌 죽다가 살아났다. 몸이 다 회복될 때까지 확실하게 쉬도록!”

“음, 알겠습니다.”

“그래도….”

글렌의 가라앉은 음성이 약간 떨리는 것처럼 들렸다.

“무사해서 다행이다.”

“아….”

고개를 홱 들었다. 글렌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줄은 생각도 못 했기에 입이 떡 벌어졌다.

다만 글렌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를 바 없이 냉랭했다. 지나가는 안부 인사처럼 한 말이었겠지만,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걱정에 코끝이 시렸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푹 숙였다.

“크흠.”

글렌은 헛기침을 하고서 의자에 등을 깊게 묻었다.

“오.”

“음!”

“크으.”

다른 곳을 보고 있던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며 낮은 탄성을 흘렸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이만….”

“있습니다.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백혈교주와 타천이 살아서 도망간 것 같습니다.”

라스가 그런 일로 거짓말을 할 리 없으니, 둘이 살아 있다는 건 사실이다. 최대한 빠르게 글렌에게 알려야 했다.

“알고 있다.”

글렌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을 한 번에 제거하려 했던 건 내 실수였다. 타천만 노렸어야 했거늘 욕심을 부리다 틈이 벌어졌다.”

그는 예상과 달리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남이 아닌, 본인에게 가하는 짜증이었다.

‘정말이지 모를 사람이야.’

본래 높은 위치에 있을수록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얼버무리는 법이다.

데루스 로베르트 역시 본인의 실수를 어떻게든 부하에게 떠넘기는 밴댕이였지만, 글렌은 누구보다 높은 위치에 있음에도 본인의 실수를 자연스럽게 인정했다.

그의 무력만큼이나 놀라운 일이었다.

“그 이야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냐?”

“아뇨. 하나 더 있습니다. 마르타에게….”

라온은 마르타에게 들었던 백혈교주에 대한 이야기와 스스로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말해주었다.

“미친!”

“빌어먹을….”

“후우….”

모두에게 충격이었는지 리메르가 이를 바득 갈았고, 셰릴이 턱을 떨었으며, 로엔이 질끈 눈을 감았다.

“으음.”

글렌도 차가운 안색을 깬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마르타는 어떤 상태지?”

“밥을 먹고 잠이 들었습니다.”

마르타는 희망이 있다는 말을 믿고, 밥을 먹은 뒤에 자고 있었다.

“하아.”

그는 느릿하게 한숨을 내쉬고 햇볕이 스며드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가 백혈교주를 처음 만났을 때는 적발에 푸른 눈을 가진 어린 소녀였고, 두 번째는 금발에 보라색 눈을 가진 20대 여인이었다. 네 생각대로 백혈교주는 타인의 몸을 갈아타는 이혼술을 사용할 수 있다.

“역시….”

“다만 평범한 이혼술과는 조금 다르다.”

“그건 무슨 뜻입니까?”

“이혼술은 타인의 육체에 들어가는 술법이다 보니, 가지고 있던 힘의 대부분을 잃고, 육체의 능력도 전부 사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괴물의 이혼술에는 그런 단점이 없다.”

글렌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백혈교주에 대한 분노가 치미는 것 같았다.

“백혈교주는 이혼술을 사용하여 새로운 육체에 안착하자마자 본래 가지고 있던 무력과 주술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다. 제약 자체를 받지 않지.”

“하….”

“다만 네 덕분에 그 비밀이 약간은 풀린 느낌이구나.”

“예?”

“원인 없이 결과가 이루어질 수 없는 법. 마르타와 같은 목걸이를 차고 있다는 점에 어떤 비밀이 숨어 있다는 뜻이겠지.”

그는 라스와 마찬가지로 인과율을 말하며 눈매를 좁혔다. 아무래도 강자들은 그 법칙을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 혹시 마르타의 어머니를 구할 방법이 있습니까?”

“본래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글렌이 담담하게 눈을 내리감았다.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력도 백혈교주를 압도할 정도라면 가능성이 없진 않아 보이는구나.”

“그렇군요.”

라온이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글렌이 저런 말을 할 정도면 아예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뜻이다. 물론 백혈교주를 제압해야 하니, 그 가능성이 무척 희박하겠지만.

“라온 지그하르트.”

“예.”

“훌륭하다.”

글렌은 갑자기 칭찬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백혈교주의 비밀이 풀린다면 그 절반 이상은 네 공이 될 것이다. 수고했다.”

“아, 아닙니다. 전 그냥 도울 방법이 있나 싶어서….”

그저 마르타를 위로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머리를 굴렸을 뿐이다. 이런 칭찬을 받기에는 과분했다.

“동료를 생각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다. 그 마음을 잊지 말도록.”

“명심하겠습니다.”

“마르타가 깨어나면 너희들이 잘 챙겨주도록 해라. 가문으로 복귀하면 그 아이를 부르도록 하지.”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혹여나 백혈교주의 딸이라고 마르타를 좋지 않게 생각할까 봐 걱정했지만, 글렌은 그녀를 걱정하고 있을 뿐이었다. 냉정하면서도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글렌은 평소처럼 파리를 쫓듯 손을 휘휘 저었다.

“예.”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일어섰다.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날카로우면서도 인간적인 조언을 해준 글렌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지만, 생각이 잘 나지 않았다. 떠오르는 건 얼마 전 그의 입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뿐이었다.

“오, 오래 사셔야 합니다.”

라온은 그 말을 뱉고서 도망치듯 방을 나갔다.

“아이고! 오래 사시라니, 그게 여기서 나올 말이냐고! 내가 보기엔 저 녀석도 문제야!”

리메르가 라온이 나간 문을 보며 한숨을 뱉었다.

“기분 나쁘지만, 오늘 너랑 좀 통하네. 아, 답답해.”

셰릴이 에휴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씩 나아지지 않겠습니까.”

로엔은 우리가 이해하자며 리메르와 셰릴의 어깨를 두드렸다.

“크으….”

세 사람은 앞에서 들린 신음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글렌이 왼쪽 가슴을 움켜쥔 채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허억!”

“가, 가주님?”

“혹시 내상이!”

리메르와 셰릴, 로엔이 깜짝 놀라서 글렌에게 다가갈 때 그가 고개를 들었다.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오래 살라니….”

글렌은 감격한 눈빛으로 문을 바라보았다.

“마르타를 생각하는 마음도 그렇고, 너무 순수하고 착하지 않느냐.”

“…….”

세 사람의 시선이 또 한 번 굳어졌다.

*     *      *

라온은 숙소로 돌아와서 자리를 잡고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고리가 공명하며 전신에서 일어나던 지독한 통증이 가라앉고, 육체의 회복이 가속화되었다.

‘확실히 달라.’

만화공도, 글래시아도 뛰어난 연공법이지만 불의 고리는 그중에서도 특별하다. 파열된 혈관과 찢어진 피부가 조금씩 재생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고오오오오!

시간조차 잊고 연공에 몰두하여 네 줄기의 마나회로를 회복시켰을 때 방문 앞으로 사람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

걸음 소리 뒤로 노크와 도리안의 음성이 이어졌다.

“부단주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이라는 소리에 눈을 떴다. 도리안 뒤로 두 사람이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올 손님이 있던가?’

라온이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안색이 좀 좋아지셨네요.”

씩 웃는 도리안 뒤에서 두 명의 여성이 다가왔다. 앞에 있는 사람은 글렌의 방에서 나왔던 노파였고, 그 옆에 선 사람은 암시장 그란세빌 지부장 데닝로즈였다.

“하아아….”

데닝로즈가 입을 틀어막으며 균형을 잡지 못하고 벽에 어깨를 부딪쳤다.

“다행이에요. 정말로….”

그녀는 가슴을 움켜쥔 채로 입술을 꽉 깨물었다.

“지부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부단주님이 살아 있는 모습을 보고 힘이 빠진 거랍니다.”

노파가 데닝로즈의 등을 두드리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음….”

라온이 눈을 내리감은 채 옅은 숨을 뱉는 데닝로즈를 보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고 했었지.’

광풍단에게 그간의 사연을 들을 때도 데닝로즈의 이야기가 나왔다. 에덴의 지부를 찾기 위해서 밤새 암시장의 요원들을 운용했다고 하던데 그 긴장이 지금에 와서야 풀린 것 같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 수 있었습니다.”

라온이 데닝로즈에게 목례하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에요.”

데닝로즈가 고개를 저었다. 순식간에 평정을 되찾고, 담담한 눈빛이 되는 걸 보면 역시나 평범한 정보상이 아니었다.

“부단주님이 아니었다면 저부터 7사도에게 농락당한 채 죽었을 테니까요.”

그녀는 보답을 했을 뿐이었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이분은….”

라온은 데닝로즈의 어깨를 꼭 잡고 있는 노파를 보았다. 지부장을 저렇게 대하는 것을 보면 예상대로 암시장의 간부가 분명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암시장을 운영하고 있는 로젤린이라고 합니다.”

노파는 귀족처럼 고아한 자세로 인사를 해왔다.

“암시장주?”

암시장 지부가 아니라, 암시장을 운용한다고 했다. 즉, 이 노파가 대륙 전역에 퍼진 암시장의 주인이라는 뜻이었다.

“예. 과분하게도 제가 암시장을 맡고 있지요.”

그녀는 별일 아니라는 듯 웃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라온이 로젤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과분이라…. 그럴 리가 없지.’

암시장을 지금의 크기로 만든 게 지금의 암시장주이자, 눈앞에 있는 로젤린이다. 암시장의 모든 권력을 손에 쥔 그녀에겐 그저 겸손의 말일 뿐이었다.

“일단 들어오십시오.”

문 앞에 세워둘 수는 없기에 두 사람을 안으로 불러서 테이블 앞에 앉혔다.

“도리안. 미안하지만 차 좀 가져다….”

“옙.”

도리안은 대답은 하고서 나가지 않았다.

“아, 여기 있네.”

배 주머니에서 찻잔 세 개와 주전자를 꺼냈다. 주전자에 붉은 찻잎을 넣자, 갑자기 주전자가 끓어 오르며 김을 내뿜었다.

치이이익!

주전자에서 묵직하면서도 청아한 차향이 흘러나와 방을 덥혔다.

‘하여튼.’

라온이 피식 웃었다. 언제 보아도 신기한 주머니와 도구들이다. 오랜만에 감탄이 나왔다.

“벤자르 녹차에요. 잘 말려서 향이 좋을 거예요.”

도리안은 집사라도 된 듯 씩 웃으며 세 사람의 찻잔에 차를 부어주었다.

“이쪽 분도 보통 가문이 아니셨군요.”

로젤린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차를 한 입 마시고서 품에서 목갑 하나를 내려놓았다.

“이건….”

“우보의 백약이랍니다.”

“우보의 백약? 이걸 왜….”

“부단주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라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우보는 약선이라 불리는 영약 제조의 장인이다. 그가 제조하는 백약은 죽은 사람도 살린다는 치료약인데 이런 귀한 물건을 선물로 줄 줄은 몰랐다.

“제게 이걸 왜….”

“부단주님이 납치를 당하신 데에는 저희의 책임도 있었답니다. 도움을 드리기는커녕 역으로 도움만 받았으니, 이 정도 성의는 보이는 게 맞겠지요.”

그녀가 백약이 든 목갑을 앞으로 내밀었다.

‘음….’

라온은 백약이 아니라, 로젤린을 보았다. 평온한 눈빛. 어떠한 사심도 없는 맑은 눈동자였지만 그걸 그대로 믿을 수는 없었다.

살짝 눈동자를 돌려 데닝로즈를 보았다. 그녀는 당연한 일이라는 듯 백약을 보며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둘의 반응이 조금 다르군.’

로젤린은 자신이 아니라, 가주 글렌을 보고 우보의 백약을 넘겼다면 데닝로즈는 정말 걱정을 하여 약을 주는 느낌이었다.

다만 두 사람 다 이 정도는 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같아 보였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고개를 숙인 후 목갑을 잡아서 앞으로 가지고 왔다. 가볍지만, 묵직한 온기가 느껴졌다.

“그 정도는 당연히 해야지요.”

로젤린이 가볍게 손을 젓고서 차를 한 입 마셨다.

“차 맛이 좋네요.”

“감사합니다!”

도리안이 주전자를 든 채 히죽 웃었다.

-맛있다는 뜻인가? 너도 먹어보아라!

라스가 분위기 파악을 못 하고 끼어들어서 찻잔을 가리켰다.

‘너랑은 안 맞아.’

-그건 본왕이 결정하는 것이니라!

‘후우….’

한숨을 내쉬고 차를 한입 마셨다.

-쯧! 밍숭맹숭하구나

라스는 혀를 차고 얼음꽃 팔찌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거 뭐 애를 키우는 것도 아니고, 어이가 없다.

“그럼 다음으로 넘어가죠.”

로젤린이 찻잔을 내려놓으며 빙긋 웃었다.

“다음이라면….”

“이 아이에게 임무를 완수했을 때의 보상을 말씀하지 않으셨더군요. 아니, 그럴 기회가 없었죠. 뭐든 해드린다고 했다 하니 그 약속을 지켜야지요.”

“아….”

그런 말을 했었고, 실제 부탁할 것도 생각했었다. 다만 그 말을 입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제 구출을 위해서 암시장 전체가 힘을 썼다고 들었습니다.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았으니, 그 이상은 과합니다.”

정말이다. 욕심이 과하면 독이 되는 법. 모두가 살아남았으니, 지금은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그걸 받으면 양심이 없는 거지.’

그란세빌에서 7사도를 처리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약속된 보수와 정보를 받았겠지만, 상황이 더럽게 꼬이며 역으로 암시장의 도움도 받았다. 본래의 보수라면 모를까. 추가 요구를 하는 건 도리가 아니었다.

“이 아이는 암시장의 지부장이자, 제 후계자 중 한 명입니다.”

로젤린이 데닝로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저희가 지그하르트처럼 근본 있는 단체는 아니라도 후계자가 한 말을 어길 수는 없지요.”

그녀가 라온을 직시하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원하시는 것을 말씀해보시지요.”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𝟔
제306화

암시장주 로젤린은 고민하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설화검협이라….’

협이라는 글자가 좋지만은 않지.

협이라는 이명이 붙은 무인들은 악인에게 자비가 없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자비로운 성향을 가지고 있다. 공명정대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들이다.

대단하고 멋지게 보이겠지만, 실제로 그들만큼 불편하게 사는 사람들은 없다.

‘타인의 시선을 신경 써야 하니까.’

협객들은 다른 이들에게 귀감이 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이름을 얻었기에 필연적으로 사람의 시선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술자리도 조심해야 하고, 유흥도 함부로 즐길 수 없으며, 제멋대로 힘을 사용하기도 어렵다.

본인에게 급한 일이 있더라도 눈앞의 불의부터 해결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협은 그 고고한 뜻만큼이나 다루기 쉽지 않은 이명이었다.

‘이 아이 역시 다를 건 없군.’

라온도 원하는 요구를 말하라고 판을 깔아주니, 오히려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

이번에 에덴 지부를 찾기 위해 암시장은 천문학적인 금액을 사용했다.

광풍단의 살림을 도맡아 한다는 라온이 그런 걸 모를 리가 없으니,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이다.

로젤린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래서 요구를 들어준다는 말을 한 거지만.’

암시장주가 한 약속은 암시장의 맹세와 다를 바가 없다.

무슨 요구를 해도 들어줘야 하지만, 어린 나이에 설화검협이라는 고고한 이명을 가진 라온이라면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다.

‘손해 없이 이득만 있는 일이야.’

북멸왕의 신뢰를 받게 될 테니까.

글렌 지그하르트가 라온을 소중히 여기는 건 확실하다. 라온에게 무엇이든 들어주겠다는 제안을 했다는 소문이 퍼지게 되면 북멸왕도 만족스러워 할 것이다.

‘흐음….’

옆에서 쏘아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리니, 데닝로즈가 너무하는 거 아니냐는 듯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렇게 살았기에 암시장을 운영할 수 있는 거란다.’

진정한 고수는 조건이 아니라, 상대의 심리를 조율하는 법.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이런 삶을 고수했기에 지금 규모의 암시장을 만들 수 있었다.

“저어….”

라온의 입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네. 말씀하세요.”

로젤린이 입맛을 살짝 다신 후에 미소를 지었다.

‘이제 때로군.’

라온은 분명 다시 거절할 테니, 그 모습을 칭찬하면서 부드럽게 상황을 넘기면 된다. 항상 해오던 일이니 자신 있었다.

“힘드시면 나중에….”

“일단 육황오마의 정보가 필요하겠네요.”

“어….”

그는 예상과 다르게 곧은 눈동자를 빛내며 요구사항을 말했다.

“유, 육황오마라고요?”

“예. 그들의 상세한 정보가 필요합니다. 인원, 위치, 성향, 무력 수위까지.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 이상의 강자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빠지면 안 됩니다.”

라온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또박또박 말했다. 지금까지 시간을 끈 건 이 말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

“정보들은 지그하르트 본관이 아니라, 별관으로 보내주십시오. 그리고….”

로젤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또 있다고?’

육황오마의 정보는 한 줄당 금화 하나를 넘어설 정도로 값이 비싸다. 특히 라온은 고수에 대한 정보를 말했기에 말 그대로 천금이 있어도 부족하다.

아니, 돈이 있어도 주지 못하는 정보도 많다. 지금 저 요구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불사조의 위치를 찾고 싶습니다.”

“부, 불사조….”

불사조는 분명 존재하는 몬스터지만, 환상이라 생각될 정도로 조우하기 어렵다.

강함을 떠나서 드래곤이 더 흔하다고 여겨지는 희귀한 존재를 어떻게 찾아달라는 건지 모르겠다. 갑자기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으…”

로젤린은 라온의 번들거리는 눈동자를 보고 턱을 떨었다.

‘이, 이 아이가 협?’

잘못 생각했다. 지금 보니 라온의 눈동자는 욕심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설화검협이 아니라, 설화검욕이라고 불러야 했다.

“마지막으로….”

‘여기서 더?’

로젤린이 억지로 표정 관리를 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

데닝로즈도 이 정도로 많은 요구를 할 줄은 몰랐는지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과 물건을 좀 찾고 싶습니다.”

“어, 어떤 사람과 물건이죠?”

“이건 가문으로 돌아간 뒤에 제대로 정리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아, 그, 그래요.”

얼굴은 웃지만 목소리는 어쩔 수 없이 떨렸다.

‘저것도 보통 일이 아닐 거 아니야.’

저 아이가 쉬운 일을 맡길 리가 없다. 육황오마에 대한 정보 수준은 아니더라도 어려운 일이 될 게 분명했다.

후룩.

로젤린은 목이 타는 듯한 느낌에 차를 마셨다. 조금 전까지 청아하기만 했던 차 맛이 더럽게 썼다.

‘미치겠군.’

지금 이 짧은 시간에 얼마만큼의 돈이 빠져나갈지 정확히 계산이 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고.’

자신과 데닝로즈가 라온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으니, 글렌의 귀에도 들어갔을 것이다. 지금 제안을 취소하겠다고 하면 기껏 쌓은 신뢰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이다.

‘안 할 수도 없어.’

지부장 수준이 아니라, 암시장주의 이름으로 직접 선언했으니 무조건 들어주어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외통수에 눈앞이 껌껌해졌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걱정하지 마시길.”

로젤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천문학적인 손해를 어떻게 메꿔야 할지 머리를 굴렸다. 물론 답은 나오지 않았다.

“부단주님의 요청을 들었으니, 이만 가봐야겠군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일어섰다. 빨리 본부로 돌아가서 계산을 해봐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부단주님. 몸조리 잘하세요.”

데닝로즈도 고개를 꾸벅이며 일어섰다. 그녀 역시 라온의 요구에 충격을 받았는지 살짝 다리가 떨렸다.

“암시장주님. 지부장님.”

두 사람이 방을 나가려 할 때 라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젤린과 데닝로즈가 천천히 뒤를 돌았다.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라온의 붉은 눈이 진중한 이채를 발했다. 루비 같은 그 눈동자를 멍하니 보고 있을 때 그의 입술이 열렸다.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아….”

글렌 지그하르트처럼 가라앉은 라온의 음성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하아….”

로젤린이 흐트러진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기대하죠.”

그녀는 옅은 미소를 흘리고서 살짝 고개를 숙인 뒤에 방을 나섰다. 데닝로즈도 무언가를 느끼고 굳어진 얼굴로 그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저택을 나선 뒤 마차를 탈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마차의 문이 닫히고 나서야 로젤린이 입매를 비틀어서 말아 올렸다.

“제대로 당했구나.”

라온은 단순히 욕심이 많아서 그런 부탁을 한 게 아니다. 이쪽의 심리를 전부 파악하고 거절할 수 없는 칼을 내민 것이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꺾인 게 얼마 만인지.’

한참 아래라고 생각해서 특별한 준비를 안 했다고는 하지만 저런 어린아이에게 머리채를 잡힐 줄은 몰랐다. 그저 강하기만 한 무인으로 여겨서는 안 될 것 같다. 이미 상당한 위험도지만, 단계를 하나 높여야 할 것 같았다.

“넌 어떻게 보았느냐.”

로젤린이 데닝로즈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그는 이 짧은 시간에 무학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한층 더 성장한 듯합니다. 전에 없는 여유와 긴장이 보입니다.”

데닝로즈가 멀어지는 저택을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긴장이 보이는데 성장했다고?”

“예.”

그녀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에 본 라온 지그하르트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죠. 하지만 오늘 본 그는 달랐습니다.”

“어떻게?”

“본인이 실패할 수 있다는 점과 항상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할 수는 없다는 점을 알게 된 듯합니다.”

“그런가.”

로젤린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데닝로즈를 쓰다듬었다.

‘성장한 건 너도 마찬가지로구나.’

본래 데닝로즈는 우유부단하여 판단을 넘기거나 미루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번 일을 겪으며 그녀도 조금 성장한 듯싶었다.

“그러면 남자로서는 어떠냐?”

“예에?”

데닝로즈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인물, 무력, 집안, 성격에 심계까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데, 네가 마음이 있다면 내가 매파를 해보마.”

로젤린은 진심이라며 데닝로즈의 손을 어루만졌다.

“이렇게 보여도 내가 맺어준 부부만 100이 넘을 게다.”

“저, 전 사부님을 모셔야지요. 사부님이 은퇴하실 때까지는 혼인을 할 생각이 없습니다.”

데닝로즈는 검은 안대만 제외하고 얼굴을 빨갛게 물들인 채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하는 애들이 제일 먼저 가더구나.”

로젤린이 픽 웃으며 손을 저었다.

“그 자두 같은 얼굴빛이나 감추고 말하던가.”

“사부님!”

*     *      *

라온은 우보의 백약이 든 상자를 만지작거리며 피식 웃었다.

‘이렇게 당할 줄은 몰랐겠지.’

처음에는 양심상 당연히 거절하려 했지만, 로젤린의 눈을 보고 마음을 바꿨다.

다정하고 인자해 보이지만, 절대 요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빛. 노련한 장사꾼의 그것이었기에 이용해 보기로 마음먹고, 제대로 성공했다.

‘상상 이상의 소득이네.’

육황오마의 정보를 사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비용이 들어가고, 돈으로 살 수 없는 비밀스러운 정보들도 많았다. 그 모두를 얻지는 못해도 적당한 것들은 알 수 있을 테니, 어마어마한 이득이었다.

-흐흥!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흘러나와 씩 웃었다.

-악마 같은 네놈에게도 약간의 배려는 있는 모양이구나. 바로 약속을 지키려 들다니.

‘자비? 갑자기 무슨 소리야?’

-그 할망에게 부탁한 불사조의 위치는 본왕의 몸보신을 위해 찾는 게 아니더냐. 맛난 것을 먹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

녀석이 허공을 올려보며 쩝 입맛을 다셨다.

-불사조 고기는 야들야들하면서도 바삭하고, 입맛을 돌게 하는 효과까지 있지. 오랜만에 몸보신을 할 생각을 하니, 벌써 기대가 되는구나.

‘너 불사조도 먹어봤어?’

-당연하느니라. 자주 먹지는 못했지만, 좋아하는 별식이었느니라. 햐!

라온이 히죽이는 라스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드래곤에 불사조까지. 이 식충이는 진짜 안 먹어본 몬스터가 없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난 불사조를 사냥할 생각이 없는데.’

-뭐?

‘불사조를 찾는다기보다는 불사조가 있는 곳을 찾는 거니까.

-그게 무슨 말이냐! 불사조를 보고도 불사조를 안 먹는다니! 눈앞에 밥이 있으면 먹는 게 당연하지 않느냐!

‘…….’

라스는 최상급을 넘어선 환상의 몬스터를 보고 차려둔 밥상이라는 미친 소리를 하고 있었다.

‘손님. 저희는 불사조를 취급하지 않습니다.’

-야. 인마!

라온은 얼굴을 들이미는 라스를 밀어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불사조를 찾는 이유는 그놈의 사냥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불사조는 잡아도 그만, 잡지 않아도 그만이다.

파삭!

과자를 씹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도리안이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배 주머니에서 꺼낸 과자를 먹고 있었다. 저 감자칩 같은 건 훈련생 시절 때부터 먹던데, 대체 언제 끝나는지 모르겠다.

“암시장주와의 심리 싸움에서 이기다니, 진짜 대단하시네요.”

“너 아직 안 갔냐?”

“진짜 너무해….”

도리안이 들고 있던 과자를 툭 떨어뜨렸다.

“내가 이긴 게 아니야.”

“원하는 거 다 얻으신 거 아니에요?”

“이번엔 저쪽이 날 너무 무시했거든.”

로젤린이 마음먹고 찾아왔다면 제대로 된 요구를 입에 담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녀가 자신을 한참 아래라고 생각하고, 성격도 착각을 했기에 얻어낸 이득이었다.

“그건 그렇고 넌 집에 안 가냐?”

“예?”

“죽다가 살아났잖아. 휴가를 받아서 잠깐이라도 다녀오지?”

로젤린이 도리안의 배 주머니를 보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했던 게 생각나서 말해보았다.

“그, 글쎄요. 딱히 갈 필요는 없을 것 같고….”

도리안이 헤헤 웃으며 벌떡 일어났다.

“나중에 가보죠. 뭐.”

그는 머리를 긁적이고서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사정이 있는 건가.’

아직도 타인과의 거리감은 어렵다. 특히 가족관계는 조심해야 하기에 잡을 수가 없었다.

“흠….”

라온은 손에 쥔 우보의 백약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이건 어쩐다.”

불의 고리의 회복력이 있어서 이 영약까지 먹을 필요는 없었다.

-어쩌긴 뭘 어째! 욕심 그득한 네놈이 먹을 거면서. 근데 무슨 맛이냐?

‘…….’

라스는 본체로 현신해서 모든 힘을 소모한 뒤부터 더 식탐이 강해졌다. 식욕에 미쳐가는 것 같았다.

‘그래. 그게 좋겠네.’

라스가 욕심 그득하다고 하니 약간의 반발심이 고개를 들었다. 우보의 백약을 들고, 다시 윗층으로 올라가서 글렌의 방에 노크를 했다.

똑똑.

이번에는 소리가 다 울리기도 전에 로엔이 문을 열어주었다.

“다시 오셨군요.”

“가주님께 드릴 게 있습니다.”

“들어오십시오.”

그는 손에 들린 목갑을 보고서 기쁜 얼굴로 옆으로 물러나 주었다.

“뭘 드릴 건데?”

“좋은 거냐?”

셰릴과 리메르도 어쩐지 기대가 되는 듯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라온은 세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앞으로 향했다.

“뭐지?”

글렌이 또 왜 찾아왔냐는 듯 귀찮은 눈빛으로 내려보았다.

“아직 내상이 치유되지 않으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라온이 앞으로 우보의 백약을 내밀었다.

“암시장주가 주고 간 우보의 백약입니다. 저보다는 가주님이 복용하시는 게 나을 듯하여 가져왔습니다.”

글렌은 백혈교주와 타천의 무력을 홀로 버텼다. 뒤에 영향을 주지 않기 위해서 피하지도 않고 몸으로 견뎌냈다.

그가 아무리 강해도 아직 내상이 치료될 때가 아니다. 받은 게 있다면 그만큼 주어야 하는 법. 그에게 이 영약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난 불의 고리와 나태가 있으니까.’

낮에는 불의 고리를 이용하여 치유할 수 있고, 밤에는 나태의 회복 효과가 자연스레 발동된다. 일주일이면 대부분 회복할 수 있을 테니, 지금의 자신에게 우보의 백약은 필요 없었다.

“오오!”

“라온!”

“허허.”

리메르와 셰릴, 로엔은 방긋 웃으며 잘했다는 듯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쿠구구구!

다만 정작 영약을 준 글렌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분노한 듯 차디찬 눈동자로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음….’

라온이 마른침을 삼켰다.

‘잘못 걸린 느낌인데.’

조금 전 찾아갔을 때 분위기가 그리 나쁘지 않아서 받아들일 거라 생각했는데, 잘못 생각한 모양이다. 분위기가 점차 싸늘해졌다.

“내가 자만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건방진 녀석. 여전히 주제를 모르는구나. 내상? 네가 날 걱정하려면 100년은 이르다.”

“그게 아닙니다. 저는 회복할 수 있지만, 가주님은….”

“필요 없다.”

글렌이 차가운 눈빛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약은 지금 이 방을 나가는 대로 네 입에 넣도록. 일주일 뒤에 가문으로 돌아가는 날. 네 회복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벌을 내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라온이 다시 우보의 영약을 챙긴 뒤에 일어섰다. 그는 고개를 꾸벅인 뒤에 방을 나섰다.

뚜벅.

라온의 발걸음 소리가 사라지자마자, 방문 앞에 있던 세 사람이 몸을 획 돌렸다.

“이 영감탱이가! 저렇게 보내면 어떻게 해요!”

“맞아요! 일단 받아주는 척을 하던가! 아니면 고맙다고 하던가!”

“정말이지 답답합니다.”

리메르, 셰릴, 로엔이 차례로 글렌에게 악을 질렀다.

“정말 가주님은… 음?”

더 따지려던 그들은 이마를 부여잡은 글렌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크으, 저리 착한 아이가 있을 수가 있나….”

글렌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기파가 퍼지며 방에 있는 물건들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진동했다.

“누구보다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서 나를 걱정하다니, 천사가 아니더냐!”

“아니, 그니까 그걸 알면 좀….”

“이렇게 있을 수는 없겠어.”

그가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손아귀에서 황금빛이 뿜어지며 방이. 아니, 건물이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허억! 여, 여기서 보고를 여시면 안 됩니다!”

로엔이 다급하게 달려가서 글렌의 팔을 붙잡았다.

“가주님 건물이 무너질 겁니다! 거기다 보고의 보안에도 문제가 생길 거구요!”

셰릴 역시 보법을 밟아서 글렌의 손가락을 막았다.

“놓아라. 지금 라온에게 선물을 주지 않는다면 대체 언제….”

“외부에서 보고를 열면 문제가 생기는 건 가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지그하르트 보고는 영지 내부에서만 열 수 있게 설계된 마법 창고다. 다른 곳에서 함부로 열었다간 좌표가 꼬여서 보안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었다.

“괜찮다. 노리는 놈은 모조리 죽이면 그만이다. 그보다 라온에게….”

글렌은 상관없다는 듯 손을 뻗었다.

“에휴….”

리메르는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그는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잡으며 방을 나갔다.

“오랜만에 도박장이나 가야지.”

“야! 말리라고!”

*     *      *

일주일 뒤.

라온이 저택 밖으로 나왔다. 광풍단 만이 아니라, 아직 가문으로 복귀하지 않은 천검대와 공검대가 줄을 맞춰 서 있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글렌과 눈을 마주쳤다. 그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홱 돌렸다.

‘후우….’

다행히 통과한 모양이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우보의 백약을 아끼기 위해서 불의 고리를 미친 듯이 운용하고 숙면을 취한 덕분에 일주일 만에 몸 상태가 상당히 회복되었다.

더 높은 경지의 무인과 싸우는 건 무리지만, 어중간한 마스터는 가볍게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가 돌아왔다.

“그럼 복귀한다.”

글렌의 손짓에 저택의 정문이 열렸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외부로 나감과 동시에 주변에서 우렁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와아아아아아!”

“지그하르트!”

“라온! 라온! 라온!”

“광풍단! 광풍단!”

“라온 님!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광풍단! 앞으로 평생 응원하겠습니다!”

저택 주변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라온과 광풍단을 보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라온이 눈매를 좁혔다. 지그하르트에 줄을 대려는 상인들이 대기하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란세빌과 결계 안에서 백혈교에 잡혀 있던 인질들이었다.

자신과 광풍단 덕분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이곳까지 찾아와서 목이 터져라 함성을 지르고 있었다.

“우오….”

“아, 이거 참.”

“별거 아니었는데.”

광풍단 검사들은 얼굴을 어색해하면서도 기분이 좋은 건 어쩔 수 없는지 손을 흔들며 히죽였다.

“음….”

라온 역시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감사하다는 말이 이렇게 가슴을 울리는 줄은 이번 생이 되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이 맞았군.’

마음으로 따르게 만드는 검사.

지그하르트 검사답게 살아가라는 말 덕분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할 수 있었다. 옳은 선택을 할 수 있게 해준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라온이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이야아아아아!”

“북멸왕!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글렌은 누구보다 큰 환호를 받았지만, 그는 그 소리에 답하지 않은 채 말을 몰았다.

라온은 글렌의 등을 모습을 보며 제천검의 검병을 꽉 움켜쥐었다.

‘언젠가는….’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𝟕
제307화

라온은 멀리 보이는 지그하르트의 성벽을 보며 눈을 내리감았다.

‘이제야 도착했군.’

수많은 세월을 버텨온 성벽을 보고 있자니, 복귀하면서 마주친 사람들의 시선이 떠올랐다.

‘경외.’

이번 사건 전과 달리 사람들은 존경과 경외가 담긴 눈빛으로 지그하르트를 바라보았다.

본래도 지그하르트는 육황오마에 속한 위대한 가문이었지만, 그 안에서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가라앉는 배.]

[잊혀진 패자.]

[무너진 강호.]

[녹이 슬어버린 검.]

한참 동안 걸음이 멈춰 있었기에 몰락한 가문이나 들을 법한 문구들이 지그하르트의 이름 앞에 붙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치르면서 모든 것이 변했다.

‘전부 우러러보았지.’

가문으로 복귀하면서 만난 사람들은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환호하며 최강의 가문이라 소리치고, 경의를 담은 눈을 빛냈다.

대륙의 꼭대기에 선 세력 육황오마. 그중에서도 지그하르트를 정점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건….’

라온이 여전히 가장 앞에서 말을 모는 글렌의 등을 보며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가주님 덕분이야.’

다른 이유 따위는 없다. 홀로 백혈교주와 타천을 몰아낸 초월자 한 명 때문에 지그하르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이다.

‘역시 다르네.’

개인의 무력으로 대륙 전체를 울리다니, 경악스러운 힘이다. 지금의 자신은 글렌의 옷자락조차 잡을 수 없었다.

-쯧쯧.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올라오며 혀를 찼다.

-네가 저 영감처럼 될 생각은 하지 않고, 감탄만 하다니 추하기 그지없느니라.

‘감탄만 하지 않았어.’

-뭐?

‘가주님을 따라잡기 위해서 등을 보고 있는 거야.’

글렌은 높고도 높은 하늘이지만 언제까지 바라보기만 할 생각 따위는 없다.

‘손을 뻗어야지.’

나도 달라지고 있으니까.

마스터 중급에 확실하게 안착했고, 검술과 오러의 경지가 크게 발전했으며, 육체 능력 역시 이전과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검계현신의 힌트도 얻었지.’

직접적으로 정신세계를 접하며 검계현신의 실마리도 잡았다.

버거운 일들이 많았지만, 그 이상의 보상을 얻었기에 결과적으로는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육체가 회복된 이후 수련과 대련을 하고 싶었지만, 글렌의 눈치가 보여서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대련이나, 실전을 치르지 못한 점이 아쉬웠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정문 앞에 도착했다. 문을 지키는 검사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며 문을 열었다.

글렌의 뒤를 따라서 문 안으로 들어가는데, 좌측에서 익숙한 사람들이 보였다.

“라온….”

“도련님!”

실비아와 헬렌 그리고 시녀들이 성벽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는 톡 건드리면 눈물을 흘릴 것처럼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쯧.”

도괴도 그 옆에 서 있었는데, 비틀어진 입매로 혀를 차는 걸 보니, 그 나름대로 잘 왔다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음….”

그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울렁거렸다. 바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아직 복귀가 끝나지 않았기에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모두 수고했다.”

글렌은 실비아를 잠시 바라보다가 차가운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해산하도록.”

그는 가볍게 손을 젓고서 본관쪽으로 향했다.

“수고하셨습니다!”

가문의 검사들은 바로 말에서 내려서 글렌에게 고개를 숙였다.

라온도 글렌에게 고개를 숙인 뒤에 바로 실비아와 시녀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나 돌아….”

“라온!”

“도련님!”

“도련님….”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모두가 박치기하듯 달려들었다.

“라온. 라온. 라온….”

실비아는 목을 끌어안은 채 계속해서 이름을 불렀다. 그녀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다행이에요! 정말 다행이에요!”

헬렌은 손을 꽉 잡은 채 끝없이 눈물을 흘렸다. 저리 우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으아아아앙! 라온 님!”

“크흥!”

유아는 바지에 매달려서 엉엉 울었고, 율리우스는 그래도 무인이라고 울음을 참은 채 입만 삐죽 내밀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신 거죠?”

“아프신 곳은 없죠?”

“으아아아앙!”

“으흐흐흑!”

시녀들도 달라붙어서 방울진 눈물을 흘렸다. 옷이 전부 젖어 드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

주디엘은 유일하게 울지 않고, 조용히 뒷편에 서 있었다.

‘이, 이게 무슨….’

-크흥!

라온이 당황하고 있을 때 라스가 코를 훌쩍이면서 허공을 올려보았다.

-이게 무슨이라고? 사람을 걱정시키는 것도 죄이니라!

라스는 마왕답지 않은 말을 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앞으로 저들에게 잘하거라! 유일하게 손익 없이 네놈을 생각해주는 이들이니까.

‘알고 있어.’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너무 멍청했어.’

살아서 돌아왔으니, 모두 기뻐할 거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이들은 그 기쁨 이상으로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수없이 묵고 묵힌 걱정이 터져 나와 본인들도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늦게 돌아왔네.”

라온은 실비아와 헬렌. 시녀들을 모두 끌어안으며 눈을 감았다. 요동치는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온 진심을 담아 입을 열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     *      *

“…그래서 가주님 덕분에 살아 돌아올 수 있었어.”

라온은 실비아의 침실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해주었다.

“다, 다행이야.”

그렇게 울고도 또 나올 눈물이 있었는지 실비아의 눈가에 맑은 물이 차올랐다.

“아버지께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러 가야겠네.”

실비아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고서 헤헤 웃었다.

“인사?”

“네 아빠와 누나도 아직 잊지 못했는데, 너까지 에덴에게 뺏겼다면 나도 살 자신이 없었거든.”

“그런 말 좀 하지마.”

그녀의 말이 가슴을 파고드는 칼날 같았다. 모두가 자신을 걱정할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알겠어.”

실비아는 알겠다는 듯 손등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응?”

“아빠는 어떤 사람이었어?”

지금까지는 관심이 없어서 묻지 않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가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되며 궁금해졌다.

“네 아빠는 바보였어.”

“바보?”

“잘난 게 하나도 없었거든. 아, 키 하나는 컸네. 지금 너보다 더 컸으니까. 거의 기둥이었지.”

실비아가 천장을 올려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검술도 실력 자체만 보면 대단하기는 했어. 오러에 대한 재능은 아주 바닥이었지만.”

“그런데 왜….”

“왜 결혼했냐고?”

“응.”

아무리 가문에서 따돌림을 당했다고 해도 실비아는 직계이자, 천재라 불렸던 검사이며,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다. 그런 그녀가 검술만 뛰어날 뿐인 사람과 만났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멋있었거든. 자신의 한계를 알면서도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해서 검을 들었어.”

“음….”

“돈을 벌기는커녕 맨날 손해만 보고 다니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더라고. 재밌는 사람이었지.”

실비아의 목소리에서 활기와 그리움이 동시에 번졌다.

“어떻게 보면 지금의 너 같네. 네 아빠가 강했다면 딱 너처럼 됐을 거야.”

손등을 잡고 있는 그녀의 손에서 떨림이 전해졌다.

“난 네가 그 사람처럼 타인의 고통을 아는 사람이 되어주길 바라고, 지그하르트 검사다운 삶을 살아달라고 말했어. 하지만 네가 납치되었다는 말을 듣고, 그 말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몰라.”

실비아는 미안하다고 말하며 옅은 숨을 내쉬었다.

“정말 너한테는 죄 많은 엄마….”

“아니야.”

라온이 고개를 저으며 떨고 있는 실비아의 손을 꽉 쥐었다.

“난 그 말 덕분에 살 수 있었어.”

실비아가 해주었던 그 말은 내가 진짜 사람이 되는데, 가장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전생처럼 자기만 아는 외로운 삶을 계속 걸었을지도 모른다.

인간답게, 검사답게 살라는 그녀의 한마디는 자신을 목줄이 풀린 사냥개가 아니라,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고마워.”

라온이 실비아의 어깨를 부드럽게 두드렸다. 그녀는 대답하지 못했다. 긴장이 풀려서 잠에 빠진 것 같았다.

실비아에게 이불을 덮어주고서 침실을 나왔다. 뭔지 모를 만족감을 느끼며 방으로 돌아갔다.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 마치 몇 년 만에 방에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런데….’

라온이 손목에 찬 얼음꽃 팔찌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너 왜 이렇게 조용하냐?’

평소라면 밥 달라고 아우성을 쳤을 녀석이 잠잠하니,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본왕은 끼어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있는 고고하면서도 아름다운 분노의 군주이니라.

라스가 팔찌 위로 올라오며 인상을 찌푸렸다.

-분위기를 깨지 않았으니, 오늘 저녁은 본왕이 원하는 대로 먹어라.

‘역시나.’

솜사탕 모습 라스의 진중한 모습에 웃음이 나왔지만, 고마운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오늘 저녁은 거하게 차려질 테니, 녀석이 원하는 싶은 음식을 마음껏 먹게 해주기로 마음먹었다.

똑똑똑.

라온이 피식 웃으며 겉옷을 벗었을 때 세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에 듣는 주디엘의 신호였다.

“들어와.”

문이 열리고 언제나 같은 표정의 주디엘이 들어왔다.

“곧 식사 준비가 끝납니다.”

“알겠어.”

“마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시겠군요.”

“어떻게 알았어?”

“도련님이 납치당했다는 소식 이후 마님께선 거의 주무시지 않았습니다. 그분만이 아니라, 별관에 있는 사람 모두가.”

그녀의 말에는 본인도 포함되어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하지만 또 조금은 기쁜 오묘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주디엘이 종이 한 장을 넘겨주었다.

“이건 뭐야?”

“엔시아 님이 남기고 가신 편지입니다.”

“남겼다고?”

“라온 님이 납치됐다는 소식이 들리기 전에 떠나셨습니다.”

“그렇군….”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별관이 왠지 조용하다고 생각했는데, 엔시아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녀에게도 익숙해진 건가.’

피식 웃으며 편지 봉투를 열었다. 세 장의 편지지가 들어 있었다.

[존나 잘생긴 라온 님께. 그 옥면을 보지 못하고 떠나는 게 아쉽네요. 다시 본다면 오지는 표현으로 그 얼굴을….]

“어휴.”

첫 장의 대부분이 얼굴에 관한 이야기였다. 바로 뒷장으로 넘겼다.

[실비아 님을 위한 인공단전의 설계도가 어느 정도 완성했어요. 문제가 있는데, 좀 귀한 재료가 필요해요. 드래곤 하트….]

“드래곤 하트?”

어처구니없는 재료에 입이 떡 벌어졌다.

[…를 구하기는 너무 어려우니까. 드래이크 하트와 씨 서펜트 하트가 필요해요. 그 둘을 연결시킨다면 그랜드 마스터급 오러를 운용해도 버틸 수 있는 단전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두 번째 편지지는 설계도를 더 완벽하게 만들고, 재료를 구하기 위해서 가문으로 돌아간다는 것으로 끝났다.

[떠나려니까 너무 아쉽네요. 이렇게 된 거 라온 님의 오지는 얼굴을….]

세 번째 장도 얼굴에 관한 이야기였다. 제대로 된 내용이 담긴 건 두 번째 편지지뿐이었다.

‘엔시아 님답네.’

피식 웃고서 편지지를 다시 봉투에 넣었다.

‘드래이크와 씨 서펜트라….’

각기 비룡과 해룡이라 불리며 목에 마나하트를 가지고 있는 최상급 몬스터들이다. 강하면서도 희귀한 놈들이지만, 아예 보이지 않는 녀석들은 아니다.

‘이건 되겠는데.’

그저 꿈만 같았던 실비아의 단전을 만들 수 있다는 생각에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중무전에 관한 보고도 올리겠습니다.”

주디엘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중무전주 카룬이 복귀했지만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가주님의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합니다.”

“그렇겠지.”

에덴 지부 습격에는 활동 중지 상태인 중무전의 검대도 움직였다.

어떻게 해서든 활동 중지 기간을 풀어야 하는 놈들이니, 술수를 쓸 여력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부터 그들의 움직임을 자세히 파악해두겠습니다.”

“응. 수고해줘.”

“예. 그럼….”

“잠깐.”

라온은 방을 나가려는 주디엘을 불러세웠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그녀는 감정 없는 인형처럼 딱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만간 암시장에서 육황오마에 대한 정보가 올 거야. 그중에서 필요한 것과 필요 없는 것을 분석해줘.”

“암시장에서 정보를?”

“그래. 이번 일에….”

라온은 주디엘에게 암시장주를 역으로 이용해 먹은 것을 말해주었다.

“아, 암시장주와 심계 싸움을 이기시다니….”

“그리 대단한 건 아니야. 그쪽에서 날 무시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네 동생에 대한 것도 알려줘.”

“예?”

주디엘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가, 갑자기 무슨….”

“암시장주에게 사람을 찾고 싶다는 부탁도 했거든. 네 동생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했잖아.”

라온이 침대에 걸터앉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 그걸 잊지 않으신 겁니까?”

“당연하지.”

그동안 기회가 없었을 뿐 주디엘에게 잃어버린 동생을 찾아주겠다고 약속한 건 한 번도 잊지 않았다.

암시장주의 장담을 받아냈으니, 최소한 어떤 상태인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주디엘이 라온을 보며 턱을 파르르 떨었다.

‘진심이었다고?’

라온을 믿는다고 했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가 동생을 찾아줄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동생을 찾는 게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암시장주에게 부탁을 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다른 부탁도 할 수 있었을 텐데….’

암시장주와 대면할 수 있는 사람은 거대 가문과 왕국의 최상위 간부들 뿐이다. 그런 대단한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을 위해 썼다는 게 믿기질 않았다.

“저, 정말 그걸 제가 사용해도 되는 건가요? 그 사람은….”

“약속은 지켜야지.”

“그으….”

라온의 사심 없는 고갯짓을 보자, 속이 울렁이고 머리가 멍해졌다. 시야가 뿌예져서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괜찮으니, 네 동생에 대해 말해줘.”

“제, 제 동생의 이름은 쥬벨. 이제 21살이 되었을 겁니다. 엔팅카 마을 출신으로 갈색 머리카락에 푸른 눈 그리고 이마에 작은 상처가 있습니다. 저와 함께 중무전으로 팔려 왔고, 그 이후에는 본 적이 어, 없습니다….”

“그렇군.”

쥬벨의 인적 사항을 머리에 새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되면서 기회가 된다면 바로 그녀의 동생부터 찾아주고 싶었는데 이제야 지키게 되어 오히려 미안했다.

“감사합니다. 정말….”

주디엘은 창백한 안색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오랜만에 진짜 얼굴을 드러내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찾을 수 있을 거야.”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후욱!

두 사람이 정겨운 모습을 보이고 있을 때 라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밥 안 먹냐?

라스는 허공을 빙글빙글 돌면서 몸집을 부풀렸다. 큼지막한 솜사탕이 되어 외쳤다.

-밥 다 식는다고!

*     *      *

일주일 뒤.

라온은 정말 오랜만에 5연무장으로 나왔다. 아직 휴식 기간이 끝나지 않아서 연무장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어제 청소한 듯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천천히 몸을 풀었다. 몸이 가볍다. 이젠 글렌이나, 실비아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몸은 완벽하게 회복된 상태였다.

“후우.”

호흡을 고르며 제천검을 뽑았다.

치이이잉!

청명한 검명이 심금을 울렸다. 만화공을 운용하자, 마나회로를 질주하는 열화의 오러가 폭주하듯 치솟았다.

우우우우웅!

제천검의 칼날 위로 적색 불길이 돋아난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강기. 그 아름다운 자태는 아롱져 떨어지는 햇살처럼 장대했다.

‘확실히 달라졌군.’

검술 경지만이 아니라, 무학 경지 자체가 올랐어.

검술의 경지가 상승하며 강기 운용 능력도 한층 성장했다. 위력과 내구성 그리고 지속력까지 모든 게 이전과는 격이 달라졌다.

‘오러의 양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고.’

록타와 라바 크로커다일 킹의 혼에 깃든 마나가 이제야 완벽하게 흡수되었는지 단전의 크기도, 그 안에 든 글래시아와 만화공도 이전보다 확연히 커졌다.

찌이이잉!

라온이 왼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광아검을 펼쳤다. 굶주린 짐승이 먹잇감에 어금니를 박아넣는 듯한 섬뜩한 기세가 허공을 내리찍었다.

후우우웅!

이어서 좌측에서 짓쳐 드는 이격에서는 대기조차 베어버릴 예리함이 피어났다.

광아검으로 펼치는 검세 하나하나가 살아있는 듯 요동쳤다. 실력이 한층 성장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실전 감각을 찾으려면 꽤 걸리겠는데.

검술과 오러를 포함한 무학 자체가 성장한 건 확실하지만, 상대에게 검을 휘두르지 않은 지 많은 시간이 지났다.

성장한 능력치와 상승한 경지에 완벽하게 적응하기 위해서는 많은 실전이 필요했다.

‘누구 없으려나?’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설풍검결을 펼치고 있을 때 연무장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역시 여기에 있구만.”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징한 녀석. 그럴 줄 알았다.”

“단주님. 잘 오셨습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으응? 네가 그렇게 웃으면 뭔가 불안한데?”

리메르는 눈매를 좁히며 슬쩍 뒤로 물러섰다. 이럴 때만큼은 눈치가 빨랐다.

“대련 한판 해주시죠.”

“대, 대련?”

“오랫동안 검을 휘두르지 않아서 감각을 좀 올리고 싶거든요. 덤비시죠.”

“덤비라니, 무슨 깡패야?”

그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떡 벌렸다.

“좀 봐주라. 윗대가리들한테 맞는 것도 지겨운데, 너한테까지 털리면 내 정신이 못 버틴다.”

리메르는 아직은 힘들다고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다 난 환자….”

“괜찮아요.”

라온이 빙긋 웃으며 제천검을 휘돌렸다.

“가볍게. 아주 가볍게 할 테니까.”

“넌 가볍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무겁다고!”

리메르가 악을 질렀다. 광풍단이 얻어맞는 것을 본 이상 지금 오러로 저 녀석과 싸웠다간 곤죽이 될 거다.

“빼지 말고….”

“그럴 필요 없다.”

문 쪽에서 굵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도괴가 느릿한 걸음으로 연무장으로 들어왔다.

“저 비실이 대신 네 대련 상대가 가득한 곳이 있으니까.”

“예?”

“육황회의.”

도괴가 라온을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육황회의가 열린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𝟖
제308화

라온이 도괴를 보며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육황회의라면 그…….”

“말 그대로 육황의 수장들이 한곳에 모여 과거의 일과 미래의 일을 상의하는 자리다.”

도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데루스 로베르트 밑에 있을 때도 육황회의가 열린 적이 있었다.

물론 음지에 속한 자신은 회의장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고 지하에 처박혀 있었지만.

“갑자기 왜 육황회의가 열리는 거죠?”

라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때가 안 됐을 텐데.’

육황회의가 주기적으로 열리는 건 알고 있지만, 지금은 아직 그때가 아니었다. 본래 정해진 규칙이 깨진 것을 보면 보통 일이 아니다.

‘음? 잠깐.’

설마…….

육황회의 개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머릿속으로 합당한 이유 하나가 떠올랐다.

“알아차린 표정이로군.”

도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 굵직한 손가락 끝이 향하는 건 라온이었다.

“그래. 너 때문이다.”

“라온 때문에?”

리메르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덕분에 에덴이 카멜룬 지척에 지부를 설치했었다는 것과 백혈교가 중립도시의 사람들을 대놓고 납치하며 진법을 설치했다는 게 드러났지 않느냐.”

도괴가 왜 당연한 걸 설명해야 하냐며 혀를 찼다.

“점차 활동이 잦고 격해지는 에덴과 백혈교의 처리에 관한 회의다.”

“아, 그렇겠네.”

리메르는 히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영감이 그걸 어떻게 알았대? 원래 이쪽 일에는 관심 없잖아.”

그는 도괴를 보며 의외라고 중얼거렸다.

“왜일 것 같으냐.”

“어?”

“네놈이 연락도 없이 일주일 동안 놀러만 다니니까! 나한테까지 짬이 돌아왔지 않느냐!”

도괴가 리메르를 노려보며 빠득 이를 갈았다.

“업무에 관심이 없으니, 육황회의가 왜 열리는지도 모르고 있었겠지! 이 쓸데없이 귀만 큰 자식아!”

라온은 주먹을 부르르 떠는 도괴와 에헷 하고 웃는 리메르를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맞는 말이네.’

원래라면 리메르가 육황회의가 왜 열리는지 모를 리가 없다. 휴가 동안 신나게 노느라 정신이 빠져 있던 것 같다.

“아하하하. 할 말이 없네.”

리메르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패를 들킨 도박꾼의 표정이었다.

“네놈이 자주 가는 도박장에도 안 보이던데, 대체 어디를 다녀온 것이냐.”

“이 동네는 끗발이 안 좋아서.”

그는 손가락을 슥슥 비비며 입맛을 다셨다. 눈동자가 반쯤 돌아갔다.

“에휴…….”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 귀때기는 가문을 말아먹든, 가문을 드높이든 할 미친놈이니라. 저런 놈들은 중간이 없지.

‘그럴지도.’

다만 도박으로 구박받는 리메르를 보고 있으니, 평화가 느껴졌다. 이제야 가문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네놈은 이따가 나를 보고.”

도괴가 리메르에게 주먹을 들어 올린 뒤에 라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련 상대를 찾는다고 했지?”

“예.”

“본래 육황회의에는 각 세력의 수장만이 아니라, 이제 막 명성을 떨치기 시작하는 애송이들도 따라온다. 가문의 동량들에게 친목회를 열어주는 거지.”

“아….”

육황회의에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점까지는 알지 못했다.

“친목회라고 쓰고 잘난척 모임이라고 읽어.”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내가 더 잘났소. 네가 더 잘났소. 하면서 어린 것들이 어른 흉내를 내거든. 보고 있으면 꽤 재밌지.”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도괴는 리메르에게 이를 드러내면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친목회에서 애송이들끼리 대련도 열린다. 나이는 어리지만, 최상위 무학을 제대로 익힌 놈들이 올 테니, 대련하기에 딱 좋은 곳일 거다.”

“거기다 남자 놈들은 여자 앞에서 폼 잡고 싶어서 어떻게 해서든 잘난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잖아. 가만히 있으면 알아서 시비를 걸어 올걸.”

“그건 그렇겠네요.”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돌아가는지 훤히 보여.’

어린 무인들은 참을성이 적고, 그 힘을 발휘할 곳이 많지 않다. 육황이라는 절대 세력의 어린 무인. 그것도 남녀가 모두 모이게 된다면 어떤 이유로든 자웅을 겨루게 될 것이다.

“괜찮겠네요.”

그들과의 무력 차이는 심하게 나겠지만, 다른 육황의 최상급 무학을 눈과 몸으로 겪을 수 있으니, 경지를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사실 너는 강제 참가지만.”

“강제 참가요?”

“그래. 가주전에서 너는 무조건 참가하라는 공문이 내려왔다. 일주일 뒤에 출발이니 준비해.”

도괴는 거부하려면 알아서 따지라고 중얼거렸다.

“가주님도 가시는 겁니까?”

“가주님은 한 번도 직접 가신 적이 없다. 전부 대리자를 보냈지. 저 양아치 자식도 한 번 다녀왔었다.”

“아, 그랬지.”

그가 리메르를 가리켰고, 리메르는 씩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위치는 어디죠?”

“오웬이다.”

“오웬…….”

오웬이라고 하니, 수련생 시절에 만난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이 떠올랐다. 카멜룬에서 본 이후로 많은 시간이 지났으니, 그도 많은 성장을 이뤘을 것이다.

“육황회의는 네 생각보다 도움이 될 거야.”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손가락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그곳에 애들만 오는 건 아니니까.”

그는 기대하라고 말한 뒤 연무장 담벼락을 올랐다.

“어딜 가는 것이냐! 네놈은 나와 할 말이 있다고!”

“아, 나 좀 놔둬! 영감들이 날 왜 이렇게 좋아하는 건데!”

도괴는 멍하니 서 있다가 급히 리메르를 뒤쫓았지만, 그는 이미 담벼락 아래로 뛰어내렸다.

“크으….”

도괴는 리메르가 사라진 담장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어떻게 점점 애가 되어가는 건지.”

“원래 저런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말썽꾸러기 꼬마를 보는 기분이다.”

“그럼 꼬마 대신 도괴 님이 제 상대를 좀 해주시겠습니까?”

라온이 옅게 웃으며 도괴의 앞으로 다가갔다.

“납치당했을 때 조금 깨달은 것들이 있거든요, 정리 좀 하고 싶습니다.”

“나참.”

도괴가 헛웃음을 흘리며 눈매를 찡그렸다.

“널 처음 보았을 때 늘어난 오러를 보고 내 눈이 잘못된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납치된 놈이. 그것도 에덴에 끌려간 놈이 더 강해져서 돌아온다는 게 말이 되냐!”

“말이 안 되긴 하는데 어쩌다 보니.”

라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네놈에게 벼르고 있던 건 알고 있겠지?”

도괴가 차게 웃으며 검을 뽑아 들었다.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제천검의 검병을 꽉 말아쥐었다.

“와라.”

도괴가 손가락을 까딱이자마자, 진각을 밟았다. 상처를 회복하여 더 두껍고 넓어진 마나회로 사이로 만화공의 열기가 질주한다.

강대한 기운은 찰나의 순간에 전신을 휘돌아 제천검 위로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음!”

이전과는 달라진 오러 운용 속도에 도괴의 눈동자가 부풀었다. 손아귀에 조금 힘을 뺀 채로 제천검을 끝까지 뽑아냈다.

치리리링!

검집을 거칠게 긁으며 뻗어나간 칼날이 청아한 검명을 터트렸다. 한층 성장한 청우의 울림이 적괴의 고막을 향해 쏘아졌다.

캬앙!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속도와 위력의 청우였지만, 도괴는 검을 가볍게 털어내는 것으로 소리에 담긴 오러의 파동을 베어버렸다.

“네놈….”

다만 도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못 볼 것을 마주한 듯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오러 수준만 오른 게 아니라, 검술 경지 자체가 오르다니, 그곳에서 대체 무얼 처먹고 온 것이냐!”

“아직 놀라긴 이릅니다.”

라온이 태화보를 밟고 앞으로 나아갔다. 사선으로 도괴를 베려는 순간 허공에서 칼날이 쏟아졌다.

시꺼먼 칼날에서 대지를 쪼갤 듯한 강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투웅!

가람보법을 응용하여 자세를 다잡은 뒤 제천검을 올려 쳤다. 은빛 칼날 위로 스며든 광아검의 사나운 이빨이 포효를 터트렸다.

쩌어어어엉!

대지를 부수는 듯한 도괴의 검격과 하늘을 가를 듯한 라온의 검격이 중심에서 맞부딪쳤다.

캬아아앙!

두 검이 튕겨 나감과 동시에 라온과 도괴가 보법을 밟으며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화아아아아!

라온은 검날 위로 만화공의 불꽃을 회전시키며 그어 내렸다. 하늘을 가득 채운 태양이 검이 되어 떨어지는 듯한 모습이었다.

“크음!”

도괴가 인상을 찌푸리며 검을 휘돌렸다. 칼날이 부채꼴로 번지며 수십 개의 검은 선을 그렸다.

쩌어어어억!

검과 검이 정면에서 맞부딪치며 라온과 도괴가 동시에 밀려났다.

피익!

도괴의 소매가 길게 찢어져서 흩날렸다.

“너….”

그가 큼지막하게 베인 소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처음 싸웠을 때와 같은 짓을 한 건가?”

“맞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야 제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보여드릴 수 있으니까요.”

도괴와 삼약을 할 때 사용했던 검술을 그대로 사용했다. 그에게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는데, 예상 이상으로 놀란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로 강해졌구나. 짜증이 나서 네 머리털을 뽑아버리고 싶을 정도야.”

“그거 다행이네요. 전 숱이 많아서.”

“건방진 것도 더해졌군.”

도괴가 서늘한 웃음을 흘리며 검을 앞으로 겨눴다.

“제대로 시작해보지.”

“물론입니다.”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만화공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검과 검이 서로의 목을 향해 이를 드러냈다.

쩌어어어엉!

*     *      *

“크으!”

리메르는 5연무장 뒤편에 세워진 나무 위에서 라온과 도괴의 싸움을 지켜보며 탄성을 흘렸다.

“좋구만.”

허리춤에 있던 술병을 꺼내서 한입 들이켰다.

시원하면서도 달달한 술로 목을 적시니, 정신이 확 깨어났다. 술은 맛있고, 날씨는 좋고, 싸움 구경까지 하고 있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건 그렇고.”

리메르는 도괴를 밀어붙이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저 녀석 또 강해졌네.”

에덴 지부에서 만났을 때도 강해져서 놀랐는데 지금은 그보다 더 성장했다. 아파서 골골대기만 하던 녀석이 어떻게 경지가 올랐는지 모르겠다.

“어디서 초고수의 무력을 빨아 먹기라도 하는 건가?”

말이 안 되지만 정말 그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저런 어처구니가 없는 성장은 불가능하니까.

‘지금이라면 상급도 때려잡겠는데.’

현재 라온의 경지는 마스터 중급이지만, 저 녀석이 전력을 발휘하면 마스터 상급도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끔찍하네.’

볼 때마다 경지가 높아지는 19살짜리 괴물이라니, 보고만 있어도 머리털이 쭈뼛 섰다. 적이었다면 매일 악몽을 꾸었을 것이다.

‘저 영감탱이도 등골이 오싹하겠는데.’

라온이 지금 속도로 성장한다면 도괴가 전력을 다해야 할 날도 머지않을 듯싶다. 자신이 저 앞에 서 있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육황회의라….”

리메르가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일으키는 라온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재밌겠는데?’

지금 지그하르트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고 있는 이유는 오롯이 가주님 덕분이다. 라온이 협의를 보여주었다고 하지만, 결국 납치를 당했고, 타인에 의해 구출되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즉, 라온은….’

회의장에서 무시당할 가능성이 높다는 거지.

이번 사건 전까지 라온은 사도와 에덴의 귀신들을 연달아 격파하며 대륙 전체에 명성을 떨쳤지만, 납치 이후 그의 무력에 관한 말들이 쏙 들어갔다.

요즘에는 전부 글렌의 이야기만 떠들고 있었고, 라온의 무력은 회자되지 않았다. 육황회의에 간다면 라온에게 시비를 걸 녀석이 한 수레는 될 것이다.

‘아, 기대되네.’

저 괴물 자식이 건방진 육황의 자제들을 어떻게 밟을지 기대가 되어 저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라온을 막으려면 대륙십이성은 불러와야지.’

지금 라온을 막으려면 미래의 절대자로 점을 찍었다는 대륙십이성은 데리고 와야 한다. 어설픈 것들은 라온에게 검을 제대로 휘두르지도 못할 테니까.

리메르가 씩 웃으며 얼마 남지 않은 술병을 비웠다.

“따라가야겠는데.”

어차피 글렌은 육황회의에 참석하지 않으니, 대리인이 될 셰릴을 따라가서 재밌는 구경이나 해야겠다. 육황의 잘난 것들이 라온의 발에 깔리는 모습을 즐기고 싶었다.

“이 망할 자식! 좋다! 끝까지 가보자!”

도괴가 이를 바득 갈면서 손가락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밟은 대지에서부터 검은 기운이 흘러나와 라온을 휘감았다.

“흐음.”

라온은 도괴의 검계에 끌려가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두 눈을 빛냈다. 꼭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허?”

리메르가 검은 구슬 속으로 사라진 라온을 보면서 헛바람을 흘렸다.

‘설마 벌써 검계를 탐색하는 거야? 그러면….’

대륙십이성도 절반쯤은 깔고 가겠는데.

*     *      *

지그하르트 가주전 알현실.

글렌은 고개를 숙인 마르타를 보며 천천히 입술을 뗐다.

“괜찮으냐.”

“예.”

마르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가 맑으면서도 곧았다. 흔들림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이제 괜찮습니다.”

눈동자와 머리 색. 그리고 외모까지. 이번에 본 백혈교주와 꼭 닮아 있었다. 라온의 예측대로 현 백혈교주의 육체는 마르타의 혈육이 분명했다.

“정말이냐?”

“예.”

마르타는 똑 부러지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님께서도 엄마를 구할 기회가 있을 거라고 말씀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저보다 엄마가 더 힘들 테니, 슬퍼하고 절망할 시간 따위는 없습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섬뜩한 정도로 진중한 빛을 뿌렸다. 자신과 라온의 말을 완벽하게 신뢰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글렌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우울해한다면 혼쭐이라도 낼 생각이었는데, 맑은 눈빛을 보니 대견하기만 했다.

“한가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말해보아라.”

“강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네 성취는 나이를 제외하더라도 뛰어난 편이다. 그 이상의 속도로 발전하는 건 구멍 뚫린 모래성이 될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라온은 당대의 내가 와도 비교할 수 없다. 걷는 속도가 다른 아이이니, 따라잡을 생각보다는 뒤에서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생각해라.”

글렌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가 떴다.

“네 장점은 적의 약점을 파악하는 본능적인 후각과 타이탄 오러를 이용한 공방일체의 검술이다. 넌 그 장점에만 집중하여 힘을 키우고 있지만, 지금은 더 많은 것을 볼 때다.”

“많은 것이라면….”

“다른 무학도 보고 배우며 스스로 장단점을 파악해라. 하나에 집중하기에 넌 아직 어려. 더 높고 멀리 가고 싶다면 지금은 많은 것을 봐두거라.”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손을 들었다.

“이번에 육황회의가 열릴 것이다. 너도 따라가도록.”

“알겠습니다. 하나만 더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말하거라.”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자, 마르타가 입술을 꾹 깨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저도 검계현신을 쓸 수 있을까요?”

“검계현신은 지그하르트 핏줄만이 사용할 수 있는 혈계 무학이다. 옅은 피라도 섞여 있지 않다면 불가능하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걸 깬 녀석이 있지 않느냐.”

“단주님….”

“그 녀석은 지그하르트의 피에 담겨 있는 흐름을 속성력을 극대화시켜서 상쇄했다. 직접 물어본다면 힌트를 알 수도 있겠지. 다만 그리 추천하지는 않는다.”

그는 정 궁금하면 리메르를 찾아가라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마르타는 허리를 쭉 편 당당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가보거라.”

“예.”

그녀는 머뭇거림 없이 등을 돌린 뒤 알현실을 나섰다.

“당당한 모습을 보니 좋군요.”

셰릴이 마르타가 나간 문을 보며 시원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예. 걱정했는데, 오히려 마음이 굳어지신 듯합니다.”

로엔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니어가 딸을 잘 들였어. 앞으로가 더 기대가 되는 아이다.”

글렌도 마르타와의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라온한테도 좀 저렇게 해보시죠. 오늘 딱 좋았는데.”

“크흠!”

로엔이 눈매를 좁히자, 글렌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돌렸다.

‘그걸 누가 모르겠나.’

당연히 그렇게 하고 싶다. 누구보다 부드럽게 대해주고 싶지만, 라온만 보면 몸과 얼굴이 굳어졌다.

“가주님.”

셰릴이 앞으로 나와서 글렌의 앞에 섰다.

“이번 육황회의도 제가 다녀오면 되겠습니까?”

글렌은 지금까지 열린 육황회의에 한 번도 참여하지 않았다. 이번에도 가지 않으리라는 생각에 그녀가 먼저 나섰다.

“라온과 아이들을 데리고 다녀오려면 제가….”

“아니.”

글렌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내가 간다.”

“예?”

“음!”

셰릴과 로엔이 동시에 눈을 부릅떴다. 글렌이 직접 움직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지 둘 다 경악한 표정이었다.

“가주님이 직접 가신다구요?”

“정말이십니까?”

“한 번은 갈 때가 되었지.”

글렌은 별일 아니라는 듯 눈을 내리감았다.

“자랑도 좀 하고.”

“예?”

“그건… 음?”

그는 두 사람에게 고개를 젓다가 눈매를 찡그렸다.

“셰릴, 로엔.”

글렌이 굳어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불렀다.

“잠시 나가 있도록.”

“예.”

두 사람은 글렌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알현실을 나갔다.

치이이잉!

침묵에 잠긴 알현실에서 글렌이 턱을 치켜들었다.

“나오도록.”

그 나지막한 음성이 사라지기 무섭게 문 앞의 공간이 갈라진다.

치이이잉!

종이처럼 찢어진 차원 속에서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노인이 걸어 나왔다. 이 세상 존재가 아닌 듯한 신비로운 분위기에 압도적인 마나의 흐름이 함께 했다.

“오랜만이오.”

금발의 노인이 지팡이를 짚으며 알현실의 중앙으로 걸어왔다. 그의 목소리는 다른 세계에서 들려오는 듯 가늘게 울렸다.

“그래. 오래도 되었지.”

글렌이 노인을 내려보며 눈썹을 찡그렸다.

“로드여.”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𝟎𝟗
제309화

“글렌 지그하르트.”

로드라 불린 금발의 노인은 글렌을 올려보며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내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는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을 것이오.”

“찾아온 이유라….”

글렌은 노인을 굽어보며 가늘게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들과의 거래는 이미 끝났을 텐데.”

“다 알고 있으면서 말장난을 치다니 당신답지 않구려.”

질책을 하는 듯 노인의 눈빛에는 옅은 화가 어려 있었다.

“나다운 게 뭐지? 우리가 그런 것을 논할 정도로 친했던가?”

글렌이 손등에 턱을 괴며 차게 웃었다.

‘귀찮은 놈이 왔군.’

눈 앞의 금발 노인은 드래곤. 그것도 모든 드래곤들을 통솔하는 드래곤 로드였다.

올 때마다 좋은 소리를 가져오지 않으니, 저 얼굴을 보고 있으면 짜증만 돋아났다.

“후우, 좋소. 내 입으로 말해드리지.”

드래곤 로드가 짧게 혀를 차고서 허리와 목을 세웠다. 고귀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녹인 듯한 우아한 몸가짐이었다.

“전에도 말했듯이 당신의 무력은 이 대륙의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요. 세계의 중재자인 우리 드래곤조차 넘어설 정도니까.”

그는 조금 분한 듯한 눈빛으로 글렌을 바라보았다.

“지그하르트의 선조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고 어떻게 인간이 그런 힘을 얻었는지는 모르지만, 그 힘은 어긋나있소.”

“어긋나 있다?”

“당신들의 힘은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세계의 중심을 망가뜨리지. 인과율조차 벗어나는 힘이라는 뜻이오.”

“드래곤들의 힘도 균형을 깨뜨리지 않나? 최강의 종족이 하는 말치고는 우습군.”

글렌이 드래곤 로드를 보며 코웃음을 쳤다.

“우리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천천히 힘을 쌓고 있소. 고작 100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하늘에 닿는 당신들과는 다르오.”

드래곤 로드가 손가락으로 길쭉한 선을 그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럼 혈육이 납치당해도 이곳에서 죽치고 있으라는 말인가? 구할 힘이 있음에도?”

“넓게 보셔야 하오. 혈육이라고 해봐야 세계의 시선에서는 티끌밖에 되지 않소. 당신처럼 하늘에 닿은 자가 생각해야 하는 건 대의. 세계의 흐름과 균형이오.”

“지랄을 하는군.”

“그게 무슨….”

“개소리라고 했다.

글렌의 미소가 진해지며 그에게서 지독한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해츨링이 사냥당하거나, 다치면 드래곤들이 우르르 몰려가서 그 종족을 멸망시키면서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모르겠군.”

해츨링은 500살을 넘지 않은 어린 드래곤으로 모든 드래곤의 보호를 받는다. 해츨링을 건드렸다가 드래곤 무리에게 멸망 당한 왕국이나 가문도 여럿이었다.

“그, 그건….”

드래곤 로드가 대답하지 못하고 눈매를 찡그렸다.

“우리는 인간과 다르잖소! 드래곤에겐 이 대륙의 균형을 수호하고 어그러짐을 중재하는 사명이 있기에….”

“결국 너희는 되고 우리는 안 된다는 이중적인 태도인가. 대륙의 수호자이자, 중재자가 하는 말치고는 우습군. 하긴 매번 그런 식이니 그때 그놈도 놓쳤겠지. 아니, 도망갔다는 게 옳은 말인가.”

“크윽….”

“대의니, 대륙의 균형이니. 전에는 그 혓바닥에 속아주었지만, 이번에는 달라.”

글렌은 서늘하다 못해 섬뜩한 눈빛으로 드래곤 로드를 노려보았다.

“내 손자는 네놈들의 해츨링 수백 마리보다 더 귀한 녀석이다. 내 행동에 후회는 없으니, 그만 입 닫고 나가도록.”

“잘 알고 있을 텐데.”

드래곤 로드는 물러서지 않고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에겐 그리 많은 시간이 남지 않았소. 이번 일 덕분에 그 짧은 시간이 더 줄었겠지.”

“…….”

“글렌 지그하르트. 당신이 남기고 간 원인은 거대한 결과가 되어 이 가문을 덮치게 될 것이오. 지금부터라도 잘 생각….”

“또 개소리.”

글렌의 건조한 음성이 드래곤 로드의 목구멍을 막았다.

“내가 쌓은 업보는 모두 내가 가져간다. 누구에게도 넘기지 않아.”

“그, 그런 일을 하면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하늘에 오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의 진중한 눈빛에는 자그마한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이전에도 지금도 난 정해진 길 따위는 걷지 않았으니까.”

“으음….”

“하나 더.”

글렌의 시선이 드래곤 로드를 향했다. 굳게 가라앉은 눈빛에서 오싹할 정도로 예리한 기파가 뿜어졌다.

“혹시라도 우리 아이들을 건드린다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대륙이 무너지건, 멸망하건 상관없이 세상에 있는 모든 드래곤의 목을 베어버릴 테니까.”

그는 당장이라도 싸울 듯 검병으로 손을 가져갔다.

“후우, 결국 이렇게 되는군. 우린 당신과 싸울 생각은 없소. 다만….”

드래곤 로드가 한숨을 내쉬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편 갈라지며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차원이 열렸다.

“내 충고를 무시했다간 분명 후회하게 될 거요. 글렌 지그하르트.”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차원 속으로 사라졌다.

“후회?”

글렌은 드래곤 로드가 사라진 공간을 보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후회 따위는 항상 안고 있다.”

*     *      *

찌지이이잉!

연무장을 뒤덮었던 검은 구슬이 갈라지고, 라온과 도괴가 동시에 튀어나왔다.

“크음.”

도괴가 사라지는 검계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검은 칼날의 개수를 늘렸는데, 적응하는 속도가 더 빨라지다니….”

첫 대결 때보다 더 진지하게 검계를 열었는데, 라온은 이전보다 훨씬 쉽게 검계를 파훼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만 나왔다.

‘단순히 강해진 게 다가 아니야.’

이놈 검계에 다가가고 있어.

소리로도 잡을 수 없도록 특별하게 숨겨둔 칼날의 위치까지 파악한 것을 보면 라온은 단순히 경지와 오러만 올라간 게 아니라, 검계현신의 진의에 걸음을 내디딘 게 분명했다.

‘미친놈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군.’

라온은 이제 19살인 꼬맹이다. 남들은 간신히 검기를 날릴 때건만 이 괴물은 마스터 중급에 오른 것도 모자라서 검계에도 접근했다.

육체에서 혼이 쭉 뽑히는 듯한 기분이었다.

“네놈, 에덴에서 대체 무얼 하고 온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봐도 납치된 놈의 무력 수위가 아니다. 영약을 먹고, 누군가에게 검술 수련이라도 받은 것 같았다.

“음….”

라온이 당황한 도괴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수련이라고 할 수도 있겠네요.”

멀린에게 영약 2개를 빼냈고, 금면사와 싸우며 실전 감각을 키웠으며, 가면을 써서 영혼까지 흡수했다. 따지고 보면 이곳에 있을 때보다 더한 수련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후우, 머리가 아프군. 질린다. 질려.”

도괴는 술이나 마셔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연무장을 떠났다.

“흐음.”

라온이 제천검을 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아쉽네.’

이제 막 흥이 올랐는데, 끝나서 살짝 입맛이 썼다. 조금 더 검을 휘두르고 싶었다.

‘내일은 단주님을 찾아다녀야겠는데.’

-귀때기를?

‘그래. 오러가 얼마나 늘었나 보자면서 가볍게 몸을 풀면 좋을 것 같아.’

-…또 곡소리가 들리겠군.

라스는 귀때기의 명복을 빈다며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그냥 적당히 할 거야.’

-본왕이 장담하지. 네놈의 적당히와 귀때기의 적당히에는 민트초코와 쿠앤크 수준의 차이가 있을 것이다.

‘쿠앤크가 나은 거지?”

-무슨 헛소리냐! 당연히 민트초코 압승이지!

‘아닐 텐데.’

라스와 잡소리를 하며 홀로 검술 수련을 하려 할 때 연무장 문이 다시 열리고 비연회주 채드가 들어왔다.

“비연회주님?”

“라온 님. 오랜만에 뵙는군요.

채드가 앞으로 다가와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예. 오랜만이네요.”

라온이 고개를 숙이며 채드의 상태를 살폈다. 눈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어색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채드가 그란세빌에 대한 정보를 줄 때 10사도는커녕 7사도에 관한 내용도 없었다. 아무래도 납치 사건 때문에 고생을 했던 것 같다.

‘사실 비연회 잘못은 아니지.’

그란세빌 암시장 지부장인 데닝로즈도 사도와 멀린이 있다는 건 몰랐으니, 이 먼 곳에 떨어진 비연회주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알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다만 그 일을 떠나서….’

여전히 채드를 신뢰할 수는 없었다. 그의 행동에는 여러 가지로 의심할 부분이 너무 많았으니까.

“죄송합니다.”

채드는 그 지위가 무색하게도 바로 고개를 숙였다.

“제가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봤어야 했는데, 실수하여 라온 님께 폐를 끼쳤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라온이 손을 저었다. 사과하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이렇게 정중한 사과를 할 줄은 몰랐다.

“암시장 사람들도 몰랐으니, 비연회가 10사도나 멀린의 존재를 아는 건 무리죠.”

“그렇다고 해도! 저는 비연회주로서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채드가 허리를 직각으로 굽히고 고개를 내렸다.

‘절대 밉보여서는 안 돼!’

이번 일을 통해 확신했다. 가주님이 가문에서 가장 아끼는 사람은 아들이나, 딸이 아닌 막내 손자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 사람에게 잘못 보였다간 비연회주고 뭐고 하루아침에 목만 남는다.

“이러지 마십시오.”

라온이 채드의 어깨를 잡고 억지로 일으켰다.

‘역시 이 사람은 이상해.’

말했듯이 이번 일은 비연회의 잘못이 아니다. 사과를 할 수는 있지만 이렇게 과하게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신뢰를 얻으려고 이렇게 나오는 것 같은데….’

생각하면 할수록 채드의 행동과 말은 과하다. 의심할 수 밖에 없다.

‘카룬이나, 발데르인가? 아니 다른 직계 쪽일 수도 있어.’

외부의 전쟁이 끝났으니, 다시 내부에서 시비나, 사건을 일으킬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이걸 받아주십시오.”

채드가 목갑 하나를 내밀었다.

“이건….”

“보약입니다. 체력과 정신력을 북돋아 주는 물건이죠. 다 나으셨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서 가져왔습니다.”

그는 품에서 책자도 하나 꺼냈다.

“이번 육황회의에서 주의할 사람이나, 상황을 적어놓았습니다. 참고해주십시오!”

“어….”

“그럼 저는 이만.”

채드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몸을 돌렸다.

‘좋아. 완벽해.’

실수를 저지른 건 어쩔 수 없었지만, 후 대처는 완벽했다. 라온의 표정을 보니 잘 먹힌 것 같았다.

‘그럴 수 밖에.’

값비싼 보약에, 육황회의에 관한 정보도 주었으니, 좋아하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이다.

채드는 결과에 만족하면서 5연무장을 떠났다.

라온은 멀어지는 채드의 등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상하지?’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니라. 친하지도 않은 것이 이리 잘해주는 것을 보니 1순위로 경계해야 할 놈이니라.

라스도 채드를 보며 이상하다고 중얼거렸다.

‘역시.’

암살자 교육을 받을 때도 이유 없이 베푸는 친절은 믿지 말라는 말이 있었다.

라온은 채드가 준 보약을 만지며 눈매를 좁혔다.

‘채드….’

주의해야 할 사람이야.

*     *      *

일주일 뒤.

지그하르트 정문 양쪽에 수많은 검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오웬으로 떠나는 글렌을 배웅하기 위한 배치였다.

‘음….’

라온도 출발 준비를 마치고, 중앙에 서서 광풍단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르타도 괜찮아 보이네.’

마르타에게 해주었던 말이 도움이 되었는지 그녀에게서 포기나 절망 같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활력이 넘치는 듯 보였다.

“버렌이랑 루난은 여전하고.’

버렌은 육황회의에 참석한다는 것만으로 기뻐서 히죽거렸고, 루난은 날카로운 눈빛을 버리고 예전처럼 맹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보고 있었다. 머리 위에 작은 나비가 날아와 앉아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근데 이 녀석들….’

그동안 수련을 한 건가?

2주 동안 연무장에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아서 놀고먹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아니었다.

광풍단 검사들은 이 짧은 시간에 오러와 경지 모두를 상승시켰다.

확연히 발전한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보니, 잠도 제대로 자지 않고 수련한 모양이다.

‘대단한데.’

검사들의 성취를 보니 게으름을 부린 건 사실 자신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감탄과 대견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대단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라스가 머리 위에서 광풍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자신의 무력함을 알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고자 하는 자들은 강해지는 법이니까.

‘무력함?’

-눈앞에서 네놈이 납치당하는 것을 보지 않았느냐. 그때의 절망감이 저 애송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원이 된 것이지.

‘…그런가.’

광풍단이 어떤 생각으로 휴식 시간에도 검을 휘둘렀는지 알 것 같아 심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가주님께서 나오십니다!”

뒤에서 들려온 웅장한 목소리에 양옆에 선 검사들도, 출발을 위해서 대기하던 검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었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라온도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패도가 실린 걸음 소리와 함께 글렌이 옆을 스쳐 지나간다. 성장할수록 느껴지는 가공할 무력이 어깨 위로 흘러가 소름이 돋아 오르게 만들었다.

“일어나라.”

글렌은 이번에도 가장 앞에 서서 말에 올라탔다. 전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부하들의 앞에 서서 먼저 길을 뚫는 성향의 수장인 것 같았다.

수하들을 무조건 먼저 보내는 데루스 로베르트와 정반대였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글렌이 뒤를 돌아보았다. 붉은 눈빛이 침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그하르트가 무엇을 담고 있는지만 보여주어라.”

그는 그 말을 남기고 먼저 앞으로 나아갔다. 좌측에서 로엔이 따랐고, 우측에서 셰릴이 움직였다.

천검대는 거대한 검기를 일으키며 그를 수호했다.

의심조차 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글렌을 따르는 그들의 모습은 자신을 위하는 광풍단을 보는 듯했다.

라온은 가장 앞에 있는 글렌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가주가 될 생각은 없지만, 가주님처럼은 되고 싶어.’

그의 절대적인 무력을 닮고 싶은 게 아니라, 누구보다 앞에서 싸우며 등으로 동료를 이끄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라온은 글렌의 등을 눈과 머리에 새기며 앞으로 나아갔다.

*     *      *

“우와아아아아!”

“지그하르트 만세!”

“글렌 지그하르트!”

“북멸왕! 북멸왕! 북멸왕!”

오웬 왕국 지근에 있는 토르틴 시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나와서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아니, 글렌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환호했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은 모두 글렌에게만 쏠려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재앙 그 자체인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무찔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마치 글렌의 칭찬이 본인들을 향한 것처럼 자부심 넘치는 걸음으로 도시를 가로 질렀다.

“이야아아아아!”

“북멸왕!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사람들의 환호와 손짓에서 반응하지 않고, 숙소로 향하던 글렌이 뒤를 돌았다. 그는 라온을 보며 앞으로 나오라는 듯 손짓했다.

“부르셨습니까.”

라온은 글렌의 옆에 서서 걸음을 맞췄다.

“이 환호가 들리느냐.”

“예.”

“저들이 지금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부르짖는 건 모두 나 때문이다.”

글렌은 차가운 눈으로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백혈교주와 타천을 눌렀기에 저런 환호가 나오는 것이다.”

그 말이 맞다. 환호의 대부분은 글렌의 이름이었으니까.

“그럼 내가 없어진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건….”

무엇을 묻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어서 일단은 대답하지 않았다.

“저 환호는 흙바닥에 깔리고, 지그하르트에. 아니, 내게 짓눌렸던 악의가 불길처럼 일어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지그하르트를 노린다면 너는 어떻게 할 테냐.”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글렌은 본인이 죽은 뒤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왜 자신에게 묻는지는 모르겠지만, 최근 떠오른 생각들을 정리할 겸 그 미래를 그려보았다.

‘예전이라면 떠났겠지.’

에덴에 납치되기 전이었다면 별관 사람들만 데리고 가문을 나왔을 것이다. 자신에게 지그하르트는 별 의미도 없는 곳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달라.’

이번 사건을 계기로 자신의 머리에 박혀 있던 지그하르트가 크게 달라졌다.

가문 그리고 사람. 별관을 떠나 이젠 지그하르트라는 이름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 가문이 실망스럽다면 더러운 부분을 잘라낼지언정 떠날 수는 없었다.

‘그럼 내가 가장 잘하는 것을 해야겠지.’

작을지언정 이 가문에 도움이 될 일을 하고 싶었다.

“저는 굴리겠습니다.”

“굴린다? 무슨 의미지?”

“가문에 있는 검사들을 죽기 직전까지 굴려서 강하게 만들겠습니다. 글렌 지그하르트라는 가주 한 명이 아니라, 지그하르트라는 이름을 겁내도록.”

라온이 서서히 가라앉는 태양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해는 가라앉았다가도 다시 떠오릅니다. 가문의 이름 역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가주님이 사라져서 가문이 잠시 가라앉더라도 다시 떠오를 수 있도록 모두를 굴려서 깨어지지 않을 단단한 발판을 만들겠습니다.”

“그 말은 네가 가주라도 되겠다는 게냐.”

“그럴 생각은 없습니다. 그저 제 위치에서 해야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정말 가주 자리에는 관심이 없었기에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냐.”

글렌은 무언가 딱딱한 고갯짓을 하고서 시선을 돌렸다. 이제 관심이 없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음….’

라온은 쩝 입맛을 다시고서 다시 뒤로 돌아왔다.

‘마음에 차지 않은 건가.’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솔직하게 말했고 그에 대한 후회는 없으니까.

*     *      *

그날 밤.

토르틴 시를 둘러 싸고 있는 뒷산에서 거대한 울림이 일었다.

“후우….”

글렌이 반으로 쪼개진 거대한 바위에 등을 기댄 채 옅은 숨을 뱉어냈다.

“어찌 그리 현명한지.”

라온에게 미래에 관한 질문을 하고 돌아올 답은 하나라고 여겼다.

본인이 강해져서 가문의 벽이 되겠다는 대답. 진부하지만 그 상황에 가장 어울리는 답이었다. 누구라도 그리 대답했을 것이다.

하지만 라온은 달랐다.

‘모두를 굴리겠다니….’

홀로 강해진다는 게 아니라, 다른 이들과 함께 강해지겠다는 뜻. 개인이 아니라, 가문으로서 성장하겠다는 말에 가슴이 크게 울렁였다.

‘그건 깨달음 얻은 이후의 목표였으니까.’

자신은 한참 헤매고 나서야 도달했던 진짜 목표에 라온은 벌써부터 도착해 있었다. 기꺼워서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라온을 꽉 안아주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았다.

“정말 대견한 아이지 않느냐?”

“그럼요.”

“물론입니다.”

글렌의 물음에 양옆에 서 있던 셰릴과 로엔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은 이번 일을 통해 가문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듯하네요.”

셰릴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예. 무력만이 아니라, 정신도 함께 성장하고 계십니다. 앞으로가 더욱 기대되는군요.”

로엔 역시 글렌을 보며 흥겨운 웃음을 흘렸다.

“내 손주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크게 될 녀석이다. 라온이 어떤 아이인지 모두가 알아야 하는데.”

글렌은 짜증이 돌은 듯 인상을 찌푸렸다.

“일단 오늘 그 아이가 한 말은 적어놓아라. 모두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말이야.”

“후우….”

리메르는 글렌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일단 댁이 손주를 아끼는 것부터 알리라고.”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𝟎
제310화

“지겹다. 지겨워.”

리메르는 숙소로 돌아가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대체 왜 말을 못 하는 건데.’

후회 가득한 손으로 라온을 안아 줄 수 없다는 글렌의 신념은 이해한다. 하지만 냉정한 척만 하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

‘저렇게 좋아하면서….’

글렌은 결국 로엔을 시켜서 라온이 했던 말들을 수첩에 적어놓았다. 손주의 어록까지 만들려는 인간이 사랑한다는 말 한 번 못 한다는 게 어처구니없었다.

“에휴.”

리메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눈을 내리감았다.

‘말을 해도 들어 먹질 않으시니.’

먼저 못 다가갈 것 같으면 속마음이라도 밝히라고 말했지만, 고집이 센 글렌은 조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라온만 보면 쌀쌀한 표정으로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나도 모르겠다.”

억지로 도박할 때보다 머리가 더 아프다. 달달한 술이나 마시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음?”

산 아래에 도착해서 도시로 들어가려고 때 수풀에서 기척들이 느껴졌다.

“나와.”

리메르는 눈매를 가늘게 좁힌 채 손을 까딱였다.

우측 수풀 속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밤하늘 같은 흑발을 어깨 위로 늘어뜨린 마르타가 튀어나왔다.

“알고 있었으면 빨리 좀 말하시죠.”

“숨어 있던 녀석이 할 말이 아닌데….”

리메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헛바람을 흘렸다.

“여긴 왜 왔어?”

“단주님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도시 밖으로 나가셔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마르타는 글렌을 따라 산에 오르는 모습을 보았던 것 같다.

“숙소에서 기다리지.”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말해 봐.”

리메르가 기막을 펼친 채 나무에 등을 기댔다.

“검계현신을 배우고 싶어요.”

이쪽을 바라보는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에서 바위처럼 굳건한 기세가 느껴졌다.

“검계현신이라….”

리메르가 입맛을 다시고 마르타가 나온 반대편의 수풀을 바라보았다.

“너희도 나와.”

나오라는 말을 하자, 왼쪽 수풀에서 루난이 슬금슬금 기어 나왔고, 뒤편의 나무 위에서 버렌이 내려섰다.

“뭐, 뭐야! 너희도 있었어?”

마르타는 루난과 버렌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리메르는 놀란 마르타를 보며 피식 웃었다. 자신을 미행하느라 집중해서 저 둘이 뒤를 따르는 것도 몰랐던 모양이다.

“나도 검계현신.”

루난이 슬며시 손을 들어 올렸다. 본인에게도 검계현신을 알려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저도 알고 싶습니다!”

버렌은 고개를 빳빳하게 세운 채 소리쳤다.

“갑자기 왜들 그래? 귀찮게.”

리메르가 세 사람을 보며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육황에서도 지금 너희 수준을 따라갈 수 있는 인재는 드물어. 아니, 거의 없을걸?”

거짓이 아니다. 라온과 함께 죽을 위기를 여러 번 넘긴 광풍단의 무력은 동나이 대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라온이 너무 압도적이라 티가 나지 않을 뿐이지 이들은 어디를 가도 유망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그 정도로는 안 돼요.”

마르타가 입술을 깨물며 앞으로 나왔다.

“내가 목을 따야 할 새끼들은 저 하늘 위에 있어요. 땅에 발을 붙이고 있는 이상 상대할 수 없다구요!”

“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마르타의 적은 10사도와 백혈교주. 특히 백혈교주는 자신의 무력이 돌아온다고 해도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었으니까.

“너희는?”

“라온과 마르타는 동료입니다. 더 이상은 납치당하는 것도, 힘들어하는 것도 보고 싶지 않습니다.”

버렌은 동료의 적은 자신의 적이라고 말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맞아요.”

루난은 뭐라 말을 하려다 귀찮았는지 맞다고 하며 고개를 크게 꾸벅였다.

“다, 닥쳐! 내 일이야! 너희는 빠….”

“네가 광풍단에 속해 있는 이상 혼자만의 일은 없어.”

마르타가 손을 저으려 할 때 버렌이 내려왔던 나무 위에서 라온이 떨어졌다.

“허억!”

“라온?”

“뭐, 뭐야! 네가 왜 거기서 나와!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마르타가 기겁하며 눈을 부릅떴고, 루난은 눈동자를 빛냈으며, 버렌은 귀신이라도 본 듯 뒷걸음질을 쳤다.

“너희가 줄줄이 움직이길래 재밌어 보여서.”

라온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너희도 참 많이 변했네.”

리메르가 네 사람을 보며 낄낄 웃었다.

“마르타. 라온의 말이 맞아.”

그는 눈매를 찡그린 마르타에게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 광풍단에서 단원의 사정을 남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특히 라온이 납치된 이후는 더해졌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 텐데?”

“그건….”

“네 사정이라서 혼자 처리하겠다면 나도 내 마음대로 백혈교와 싸울 거다.”

라온이 마르타 옆에 서며 턱을 들어 올렸다.

“나도.”

루난이 반대편으로 다가와 어깨로 마르타의 어깨를 툭 밀었다. 마르타의 말에 조금 심술이 난 듯한 표정이었다.

“물론 나도 간다. 아니, 단주님 말대로 광풍단이 전부 갈 거다. 다 죽더라도!”

버렌이 팔짱을 낀 채로 콧김을 뿜었다. 절대 물러서지 않을 듯한 표정이었다.

“으으….”

마르타는 이를 꽉 깨물었지만 더이상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마르타.”

리메르가 살짝 허리를 숙여서 마르타와 눈을 마주쳤다.

“스승 노릇을 거의 안 해서 조언하기엔 조금 민망하지만, 고통은 나누면 반이 되는 법이야. 네 마음이 조금 더 단단해지면 사정을 동료들에게 말하는 것도 고려해봐라. 약간이라도 마음이 풀릴 거다.”

“…….”

마르타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리 싫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짝!

리메르가 크게 손뼉을 쳐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너희 모두 검계현신을 익히고 싶다는 거지?”

“예!”

“그렇습니다!”

“솔직히 귀찮기는 하지만 잘 찾아오긴 했어.”

리메르가 자신감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 스스로 지그하르트 혈족의 검계를 만들기 위해 피와 땀, 눈물을 쏟아가며 노력했으니까.”

나오지도 않는 눈물을 훔치며 코를 훌쩍였다.

“이번 회복을 계기로 부작용도 최소화할 수 있는 구결도 만들었지.”

“그, 그러면….”

“그렇지만 나의 어마어마한 노력이 담긴 비법을 그냥 줄 수는 없지.”

어차피 알려줄 거지만, 이 기회에 라온에게 빨린 돈을 좀 받아낼 생각이었다.

리메르가 엄지와 검지를 둥글게 말아서 원을 그렸다. 금화를 표현하는 제스처였다.

“일단 50개만 준다면 다 설명해주지. 먼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발 밑으로 무거운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온이 바로 던진 금화 주머니였다.

“시작하시죠.”

라온은 빨리 하라는 듯 손가락을 까딱였다.

‘저, 저 자식….’

본래 이런 장사는 처음에 조금 무겁게 시작해서 흥정하려 들면 금화의 개수를 늘리는 맛인데, 저 돈 많은 갑부 놈이 처음부터 금화 50개를 던져서 다 끝나버렸다.

‘제기랄!’

처음부터 100개를 불렀어야 했는데!

“돈 줬는데 분해 보이네요. 빨리 시작이나 하시죠.”

라온은 다 안다는 듯 피식 웃었다.

“진짜 못 당하겠다니까.”

리메르가 한숨을 푹 내쉬고서 떨어진 금화 주머니를 옆으로 밀어놓았다. 묵직한 것을 보니, 50개보다 좀 더 들어있는 것 같았다.

“일단 너희 넷 모두 검계현신을 사용하는 건 가능해. 라온과 버렌은 원조 검계현신을 사용할 수 있을 테고, 루난이랑 마르타는 내 방식으로 써야겠지.”

“그 둘의 차이점이 뭐죠?”

마르타가 마른침을 삼키며 앞으로 다가왔다.

“라온과 버렌의 검계는 자유로워. 속성을 담아도 되고, 안 담아도 되고, 검술이 아니라, 다른 방식을 써도 된다. 본인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개척할 수 있지. 하지만 나나 루난, 마르타는 가지고 있는 속성에 의존해야 해.”

“아, 그러면….”

“그래. 루난은 수속성, 마르타는 대지 속성으로 정해진다. 이건 절대 바꿀 수 없어. 저들의 피에 들어있는 힘을 극한의 속성력으로 대신하는 거니까. 제대로 말하자면 검계가 아니라, 속성계라고 해야겠지.”

리메르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루난과 마르타를 가리켰다.

“이것도 너희의 속성 친화력이 엘프급으로 높아서 가능한 일이야. 축복받은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것에 감사하도록.”

그는 다시 네 사람 모두에게 시선을 주었다.

“검계와 속성계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여는 방식도 달라. 오늘부터 마르타와 루난은 속성력을 키우는 수련과 심상 수련을 한다. 이건 기본 훈련이랑 상관없어. 추가로 해야 해.”

“물론이죠!”

“네.”

두 사람은 이번에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과 버렌. 심상에 집중해라. 명상을 하면서 상상력을 키워. 너희들도 추가 훈련이야.”

“검술 수련할 때의 심상과는 다른 겁니까?”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좋은 질문이다. 검계는 단순히 말해서 결계나 진법. 즉, 네가 자신 있는 공간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거야. 그러려면 뭐가 필요할까?”

“내가 무엇을 잘하고, 무엇에 유리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내가 적에게 어떻게 보이는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겠죠.”

라온이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음….”

리메르가 눈매를 좁혔다.

‘역시 이 녀석은 들어갔군.’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니, 다른 이들과 달리 라온은 검계에 한 발 들어간 상태다. 입 밖으로 미쳤다는 말이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그래도 꽤 걸리겠지.’

이제 입문이니, 아무리 빨라도 3년은 지나야 반쪽이나마 검계를 열 수 있을 것이다. 부왕과의 대련 전에 검계를 만든다면 딱 좋을 듯싶었다.

“라온의 말이 맞다. 내가 무엇을 잘하고, 적에게 어떻게 보일지를 계속 상상해. 어떻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을지. 너희들의 머릿속 한계를 깨고 더 깊고, 멀리 나아가라.”

검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쌓은 경험과 그 경험을 운용하는 상상력이다. 이 둘만 제대로 갖춰진다면 저 넷은 충분히 검계를 쓸 역량이 있었다.

이제 마지막 충고만 해주면 될 것 같았다.

“저게 뭐지?”

리메르가 손가락을 들어 달을 가리켰다.

“달이잖아요.”

“붉은 달이죠.”

“달?”

“아니, 난 하늘을 가리켰는데?”

리메르는 네 사람을 놀리듯 빙글거리며 웃었다.

“네에?”

“하지만….”

“결국 달도 하늘 위에 떠 있을 뿐이지.”

버렌과 마르타가 따지려 들었고, 라온과 루난은 가만히 있었다.

“견자망월이라는 말이 있다.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켜도 멍청하게 손가락만 본다는 뜻이지.”

“음….”

“지금 너희가 집중해야 할 건 검술과 오러야. 무학의 경지가 오르지 않으면 검계를 완성한다고 해도 너희가 기대하는 파괴력은 절대 나오지 않을 거다.”

리메르의 눈빛이 진지한 빛으로 반짝였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는 우를 범하지 말고, 무학과 오러 연공에 집중하도록. 그 이후에 시간이 남으면 검계를 연습해라. 너희라면 무슨 뜻인지 알겠지.”

“예!”

“감사합니다!”

라온과 버렌, 마르타, 루난이 모두 고개를 꾸벅였다.

“그럼 가봐. 속성 강화 구결을 불러주어야 하니까. 마르타와 루난은 내일은 내 옆에서 움직이도록”

“알겠어요.”

“네.”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리메르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숙소로 돌아갔다.

“단주님.”

라온은 세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리메르의 앞에 섰다.

“오늘은 제대로시네요.”

“너희들의 눈빛을 보니까 장난을 칠 수가 없더라고.”

“그러실 줄 알고, 저도 조금 더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숙소로 향했다.

“음!”

리메르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닥에 있는 금화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확실히 무거워.’

옆으로 치울 때도 느꼈지만 주머니는 금화 50개 정도의 무게가 아니었다. 대충 헤아려도 100개는 되어 보였다.

‘하긴 50개씩 가지고 다니진 않겠지.’

리메르는 땡잡았다고 중얼거리며 주머니를 열었다,

“어?”

그리고 그대로 굳어졌다.

“마, 많네. 많은데….”

주머니 안에 돈은 확실히 많았다. 다만 그 색은 찬란한 금빛이 아니라, 묵묵한 은빛이었다.

“이거 은화잖아!”

리메르가 악을 지르며 라온에게 달려갔다.

“야이 사기꾼 자식아! 어딜 은화를….”

“사기꾼? 108개나 드렸는데요?”

라온은 오히려 황당하다는 듯 입을 동그랗게 벌렸다.

“108개고 자시고! 금화가 아니라 은화잖아!”

“전 금화를 드린다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분명 금화라고….”

“단주님도 금화라고 안 하셨습니다.”

“아….”

리메르의 눈동자가 회까닥 돌아갔다.

‘아, 안 하긴 했어….’

요즘 단원들과 분위기가 좋아서 속물처럼 보이지 않으려고 금화라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실수였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은화를 생각하겠는가. 암묵적인 합의로 당연히 금화라고 생각하지.

“이런 비기를 전수해주는데 당연히 금화지! 누가 은화를….”

“이런 쪽에서도 가르침을 주시는군요. 저는 이런 거래를 많이 안 해봐서 잘 몰랐습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다음부터는 조심할게요.”

그는 그렇게 말하고 손을 저으며 떠났다.

“아….”

리메르가 손에 든 주머니를 툭 떨어뜨렸다.

“악마 같은 새끼….”

저건 크게 될 거야.

아주 더럽게 크게….

*     *      *

라온은 일행의 뒤를 좀비처럼 느릿하게 따라가며 혀를 찼다.

‘쉽지 않군.’

리메르와 라스의 조언 덕분에 몇 년 전부터 심상 속에서 검을 펼쳐왔지만, 검계를 이루는 건 달랐다.

가장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검술, 현재 가장 자신 있는 검술, 다양한 적을 상대할 때 가장 효율적인 검술들을 고려하다 보니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끝이 없어.’

리메르가 왜 기본 훈련을 빼먹지 말고, 검계는 마지막에 수련을 하라고 지시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계속하면 나아지겠지.’

전생도, 현생도 포기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 10년 후에 검계를 쓸 수 있게 된다고 해도 꾸준히 발전해서 원하는 검계를 이룰 것이다.

-어이.

라온이 다시 심상 속에서 검술 수련을 하려고 할 때 얼음꽃 팔찌에서 라스의 머리가 쏙 튀어나왔다.

-저놈 죽으려고 하느니라.

라스가 말에 온몸을 맡긴 채 축 늘어진 리메르를 가리켰다.

‘음….’

라온이 맛탱이가 간 리메르의 눈동자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아직도 저 상태인가.’

금화 주머니에 은화를 넣어둔 게 충격이었는지 나흘이 지났는데도 리메르는 넋이 나가 있었다.

‘좀 챙겨줘야겠네.’

은화를 가지고 있었을 뿐이지, 일부러 리메르를 놀리려고 한 건 아니었다. 돌아가는 대로 수업료를 두둑이 챙겨주기로 마음먹었다.

-귀때기를 챙기는 김에 본왕도 챙기거라.

‘무슨….’

-구슬 아이스크림 민트초코 맛으로 한 세트면 충분하느니라.

참으로 뻔뻔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디서 이런 솜사탕이 굴러왔는지 모르겠다.

‘너는 정말….’

라온이 라스를 밀어내려고 할 때 선두의 걸음이 언덕을 넘어서 멈춰 있었다.

갓 만들어진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가니, 언덕 아래로 거대한 은빛 왕성이 보였다.

고오오오!

왕성은 무인이라도 된 것처럼 고고한 기파를 뿜어내고 있었다.

‘지그하르트와는 다르군.’

지그하르트가 거칠고 난폭하다면 오웬 왕성은 곧으면서도 예리한 기세를 흘렸다.

-흐음!

손에 밀려서 얼굴이 반쯤 찌그러진 라스가 왕성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저곳에도 꽤 괜찮은 놈이 있구나. 이곳까지 그 기운이 전해져오는군.

‘그렇겠지.’

라온이 왕성의 중심을 보며 검병을 움켜쥐었다.

‘저곳에도 있으니까.’

육황의 세 번째 초월자.

묵검존이라 불리는 남자를 만날 때였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𝟏
제311화

라온은 깎아지른 듯한 성벽을 눈앞에서 보며 눈매를 좁혔다.

‘기사들의 왕국 오웬이라…….’

더할 나위 없는 이름이네.

기사들의 왕국이라는 이름답게 왕성에 다가갈수록 서릿발 같은 기세가 강해진다. 개인의 검기가 아니라, 함께 쌓아올린 군기가 물결치고 있었다.

“마중 나왔나 본데?”

리메르가 피식 웃으며 성문 앞을 가리켰다. 그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자, 거인이 드나들어도 문제 없을 법한 거대한 성문 앞에 서 있는 청년과 중년인이 보였다.

‘저들은…….’

그리 변하지 않은 두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의 이름이 바로 떠올랐다.

5년 전 지그하르트에 찾아왔었던 삼왕자 그리어 드 오웬과 타르탄 공작이었다.

“북멸왕을 뵙습니다!”

삼왕자 그리어와 타르탄 공작은 글렌이 성문 앞에 도착하자마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본인들의 왕국에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오랜만이로군.”

글렌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삼왕자와 타르탄 공작에게 일어나라 손짓했다.

“저희가 지그하르트에 간 이후 처음이니 5년 정도 된 듯합니다.”

“그대가 그리 성장한 모습을 보니, 시간이 흐르기는 흐른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라온 검사에 비하면 전 아직 애송이에 불과합니다!”

갑작스러운 칭찬을 들은 삼왕자가 얼굴을 붉히며 뒤에 있는 라온을 가리켰다.

“크흠, 그런가.”

글렌은 헛기침을 하면서 삼왕자의 어깨를 두드렸다. 이상할 정도로 부드럽고 인자한 느낌의 두드림. 평소의 글렌이 아닌 듯 보였다.

“예. 아마 이야기하지 않았을 거라 생각하지만, 라온 검사가 제 목숨을 구해준 적도 있습니다.”

삼왕자는 카멜룬 근처 언덕에서 백혈교와 싸웠던 때를 말해주었다. 진혼검의 첫 실전이었던 전투였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군.”

글렌은 뒤를 한 번 돌아보며 눈매를 좁혔다. 왜 말을 하지 않았냐고 꾸짖는 듯한 눈빛이었다.

“저 아이는 필요한 말을 제외하곤 하지 않으니.”

“이전에도 느꼈지만 라온 검사님은 무인의 귀감이 되는 분입니다. 겉으로만 겸양을 떠는 자들과 다릅니다.”

“커험, 그저 말수가 적은 거지만, 그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글렌은 조금 더 큰 헛기침을 하고서 삼왕자의 어깨를 더 힘을 주어서 주물렀다. 삼왕자는 평소에 글렌을 존경했는지 좋아서 죽을 듯한 표정이었다.

“음…….”

라온은 옅은 미소를 짓는 글렌과 삼왕자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의외로 죽이 잘 맞네.’

이상하게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처럼 대화가 잘 통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그렇고 무력은 확실히 성장했군.’

카멜룬에서 만났을 때와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왕자의 성취는 발전해 있었다.

마스터까지는 아직 거리가 멀지만,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엔 확실히 발을 디뎠다.

‘다만…….’

라온이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왕성을 보며 감탄하는 버렌과 멍하니 하늘을 보는 루난 그리고 심상 공부에 빠진 마르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쪽의 성장이 더 눈부시지.’

5년 전 밑에서 삼왕자를 지켜보았던 버렌, 루난, 마르타는 조금이지만 삼왕자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 있었다.

오웬 왕국에서 전력으로 밀어주는 삼왕자보다 저 셋이 더 빠르게 성장했다는 건 그만큼 수라장을 헤쳐왔다는 뜻이었다.

‘거기다 저 녀석들은 멈출 생각도 없어.’

본인을 위해서든, 동료를 위해서든 버렌과 마르타, 루난은 지금도 강해지겠다는 욕심으로 가득하다.

검계현신을 사용할 수 있게 될 때까지 저 열정이 꺼지지 않을 테니, 앞으로는 더 차이가 벌어질 것이다.

“북멸왕께서도 대단하셨지 않습니까. 이번에 홀로 백혈교주와 타천을 무찌른 이야기를 듣고 피가 끓어 올랐습니다.”

삼왕자는 좋은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해서 글렌의 활약상을 말하며 활짝 웃었다.

“그런가.”

하지만 글렌의 안색은 본인의 칭찬을 듣고서도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는 삼왕자의 어깨에서 손을 뗀 후 시선까지 돌렸다.

“음, 여기서 이러지 말고 들어가시죠.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 그렇겠네요.”

분위기가 바닥에 깔린 것을 느낀 타르탄 공작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삼왕자의 어깨를 잡았다. 삼왕자가 실수를 알아차리고 옆으로 물러섰다.

쿠구구구구!

거대한 성문이 반으로 갈라져 열리자, 왕성에서 뻗어 나오는 기파가 불길처럼 일어났다.

성문 앞에서 열을 맞춘 기사들에게서 뿜어지는 기세였다.

‘강해.’

괜히 왕궁에 있는 게 아닌지, 줄을 맞춰 선 기사들 한 명 한 명은 고수라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무력을 갖추고 있었다.

‘오길 잘했어.’

다른 육황의 자제들뿐만이 아니라, 이들과 대련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일 것 같았다.

“라온 검사.”

기대감에 입맛을 다시고 있을 때 옆으로 삼왕자가 다가왔다. 이전보다 더 성숙해진 눈빛이지만, 웃는 얼굴은 변하지 않았다.

“몸은 괜찮소? 납치되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걱정을 많이 했소.”

처음 와서 몸을 걱정하는 소리를 하는 것을 보니 성격도 그대로인 것 같았다.

“네. 운이 좋았습니다.”

“운이라. 다른 이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내 판단은 다르오.”

삼왕자의 푸른 눈동자가 깊은 바다처럼 진한 이채를 띄었다.

“난 라온 검사가 얼마나 강하고 현명한지도, 에덴과 백혈교가 얼마나 사악한 놈들인지도 알고 있소. 정말 운만 좋았다면 지금 이곳에 라온 검사는 있지 않았을 거요.”

“음…….”

좀 아쉽네.

라온이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삼왕자는 아쉽게도 자신을 제대로 봐주고 있었다.

-왜 아쉬운 것이냐?

라스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놈을 인정해주니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럼 왕자와 제대로 싸우기 힘들잖아.’

-무슨…….

‘지금쯤이라면 삼왕자도 오웬의 비기를 배웠을 텐데, 그걸 보기 힘들다고.’

삼왕자는 이미 자신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저런 상태라면 대련을 한다고 해도 비기를 숨길 가능성이 높았다.

‘무학을 빼내기 가장 좋은 상대는 날 무시하는 놈들이야.’

에덴에 납치된 이후 설화검협의 명성에 거품이 끼어 있다는 소문이 퍼지며 무시하는 시선들이 다시 나타났다.

친목회에서 시비를 걸어오는 건방진 육황의 자제들을 밟아주며 무학을 빼낼 생각에 기대했는데, 삼왕자의 눈빛을 보니 오웬 쪽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네놈은 대가리에 기름이라도 바른 것이냐. 뭐가 이렇게 잘 굴러가는 건지…….

라스는 징한 놈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왕자님은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잘 지냈다고 말하고 싶지만, 꽤 위험한 상황이 많았소. 백혈교는 정말 어디에나 있더군. 이전에는…….”

삼왕자는 계속 백혈교와 싸워왔는지 혈기만 봐도 구역질이 나온다고 말했다. 그와 잡담하다 보니, 어느새 왕성의 중심에 들어와 있었다.

고귀해 보이는 붉은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 검을 쌓아 올린 듯한 빗금으로 가득한 철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이 전하의 알현실입니다.”

타르탄 공작이 두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열기를 띤 눈빛에서 그가 현 국왕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보이는 듯했다.

“음…….”

라온이 웅장한 철문을 올려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안쪽에서부터 수백 년 동안 칼날만을 벼린 듯한 날카로움이 느껴졌다. 글렌에게도 밀리지 않을 정도의 기파였다.

쿠구구궁!

타르탄 공작이 노크하자, 알현실의 문이 부드럽게 열리고 그 내부가 드러났다.

따스해 보이는 갈색 기둥들 앞에 기사들이 서 있었는데, 지금까지 본 자들과는 격이 다른 강자들이었다. 국왕을 수호하는 최강의 방패, 오웬의 근위 기사단이었다.

고오오오오!

강대한 기운을 두른 기사들의 벽을 지나자, 중앙 왕좌에 앉아 있는 중년인이 보였다. 금발에 푸른 눈. 삼왕자와 비슷한 인상이었지만, 조금 더 날카롭고 곧았다.

“크으…….”

라온이 중년인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강렬해.’

중년인이 기파를 뿜어내는 것도 아니건만 팔에 닭살이 올라온다. 그저 숨을 쉬듯 자연스럽게 피어나는 기운이 이미 하늘에 닿아 있었다.

무력이 낮은 자들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지만, 마스터 이상에 오른 자들은 모두 중년인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오웬의 국왕인가.’

당연한 말이지만 왕이라고 왕국의 최강자는 아니다. 오히려 왕이 강하지 않은 왕국이 훨씬 많았다.

하지만 오웬은 다르다. 오웬의 왕은 항상 최강이었으며 최전선에서 검을 들어왔다.

‘묵검존 레크로스.’

지금 저 왕좌에 앉아 있는 중년인도 마찬가지. 저 남자가 당대 오웬의 국왕이자, 최강의 기사라 불리는 묵검존 레크로스 알버른 드 오웬이었다

-역시.

라스가 레크로스를 보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너희 영감 정도는 아니지만, 제대로 쌓아 올린 무력이다. 인간들도 나름 발전했군.

녀석은 감탄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라스에게 이 정도 인정을 받았다는 건 레크로스의 무력도 하늘에 닿아 있다는 뜻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레크로스가 왕좌에서 일어나 단상 아래로 내려갔다. 본래 왕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지만, 글렌을 대우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오랜만에 뵙습니다. 북멸왕.”

“그렇구려. 전쟁 이후 처음이니, 길었군.”

레크로스와 글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글렌과 레크로스가 유일하게 좋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소문은 진짜인 것 같았다.

“백혈교주와 타천을 동시에 베었다고 들었는데, 헛소문이 아니었군요. 이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높이 올라가신 듯합니다.”

레크로스는 극한까지 다듬은 예리한 기파와 달리 부드러운 인상과 음성을 가졌다. 보고 있으니, 마음이 편해지는 기분이었다.

“과찬이오. 묵검존 역시 그때와는 몰라볼 정도요.”

글렌은 묵검존을 보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가 진심으로 감탄했다는 뜻이었다.

“이쪽이야말로 과찬이십니다. 늙었는지 검이 제멋대로 나갑니다.”

“새로운 경지에 오른다는 자랑을 그리도 하는구려.”

“이런 걸 알아줄 사람이 가주님뿐이지 않습니까.”

레크로스는 고개를 저은 후 글렌의 뒤편을 살폈다. 그의 눈이 가장 먼저 향한 곳은 셰릴이나, 로엔, 리메르가 아닌 라온이었다.

“허…….”

레크로스의 푸른 눈동자가 타원으로 말려 들어갔다.

“자네가 라온 지그하르트인가?”

“인사가 늦었습니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 합니다. 폐하.”

라온이 손을 가슴에 올린 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셋째보다 1살 어리다고 들었는데, 그럼 19살인 건가?”

“그렇습니다.”

“설화검협에 관한 소문을 듣긴 했지만 19살에 벌써 마스터 중급에 올랐을 줄이야. 아니, 그 정도가 아니로군. 마음먹고 싸우면 그 이상의 무력도 발휘하겠어.”

레크로스는 어처구니가 없다며 혀를 내둘렀다.

“에덴의 소굴에서 어떻게 버텼나 했더니 그 이유가 있었군.”

“허어!”

“마, 마스터 중급?”

“19살에 마스터 중급이라니…….”

기둥 앞에 서 있던 근위 기사들에게도 라온의 경지는 놀라웠는지 무표정을 깨고 낮은 신음을 흘렸다.

“우리 셋째도 어디에 내놔도 밀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는데, 저 친구는 반칙 수준이지 않습니까.”

레크로스가 다시 글렌에게 시선을 돌리며 헛바람을 흘렸다.

“저런 손자가 있으니, 마음이 든든하시겠습니다.”

그는 부럽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 정도는 아니고, 열심히는 하는 아이지요.”

글렌은 별거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그의 목소리가 삼왕자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보드라워졌다.

“그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저 친구가 이대로 성장한다면 육황오마의 균형도 깨질 듯합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에 오른 건 묵검존에게도 놀라운 일인지 그는 라온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질투나, 질시가 아닌 흥겨운 시선. 다른 세력의 인재가 강한 것도 좋아하는 것을 보면 듣던 대로 성격 자체가 대범한 것 같았다.

“커험! 아시지 않소. 유망주라고 떠들던 자들 중 실제로 빛을 내는 건 극소수라는 것을. 저 아이에겐 아직 먼 일이오.”

글렌은 입에 주먹을 대서 헛기침을 한 뒤 눈매를 좁혔다. 칭찬이 마음에 안 드는 건지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여전히 엄하시군요. 그러니 저런 아이를 키운 걸지도 모르겠지만.”

레크로스는 글렌과 달리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라온을 바라보았다.

“앞으로도 정진하게나. 훌륭한 무인을 마주하는 건 큰 기쁨이니.”

“감사합니다.”

라온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차나 한잔하시겠습니까? 서쪽에서 들어온 좋은 찻잎이 있습니다.”

“좋소.”

레크로스의 제안에 글렌이 고개를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어.”

“예! 전하!”

“지그하르트의 손님들께 왕궁을 소개해드리도록.”

“알겠습니다!”

삼왕자는 몸을 돌려서 지그하르트 일행들을 바라보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라온은 삼왕자를 따라가기 전에 뒤를 돌아 미소를 짓는 글렌과 레크로스를 보았다. 글렌이 저렇게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아서 뭔가 신기했다.

-흐음……

복도를 지나 다시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하나가 더 오고 있구나.

녀석은 복도 밖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밝은 듯하면서도 음습한 기질이다. 아까 그놈보다 더……

‘음?’

대답을 하려다가 멈춰 섰다.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뛴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등골 사이로 오싹한 소름이 돋아올랐다.

저벅.

수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왕궁의 복도에서 오직 하나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왔다. 너무나 익숙하고 듣고 싶지 않았던 소리가 귀를 울렸다.

“으…….”

턱이 덜덜 떨려서 윗니와 아랫니가 마구잡이로 부딪쳤다. 주먹을 끝까지 말아쥐어 손아귀에서 핏물이 맺혔다.

라온이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빛 제복을 입은 검사들의 중심에서 한 남자가 다가온다.

서리를 빗은 듯한 은발, 차갑기 그지없는 푸른 눈 그리고 해를 보지 않고 산 듯한 새하얀 피부와 깎아지른 듯한 이목구비까지.

데루스 로베르트.

죽었다가 살아나도 잊지 못한 그 얼굴이 다가오고 있었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𝟐
제312화

쿵! 쿵!

데루스 로베르트를 본 순간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렸다. 수십 명이 동시에 치는 북소리처럼 전신을 울리는 거대한 박동이었다.

찌직.

라온이 볼 안쪽 살을 강하게 씹었다. 쇠를 핥은 듯한 피 맛이 입안을 적셨다.

‘크으으….’

강한 고통을 느껴도 머리가 차가워지지 않았다. 뇌리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손과 발에 힘이 가득 차올랐다.

‘참아야 해. 무조건 참아야 해.’

데루스 로베르트는 자신이 아는 그 누구보다 의심이 많고, 조심스러운 인간이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살기나 분노를 일으켰다간 골치 아파진다.

‘제발. 제발.’

다행히 데루스와의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다. 놈이 더 다가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야 했다.

‘제기랄!’

억지로 감정을 누르려고 했지만, 탄성을 지닌 고무처럼 오히려 더 강하게 치고 올라왔다.

-네놈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냐.

라스가 옆으로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저 멀대를 보고 왜 그런 분노를 끌어 올리는 것이냐.

‘으음….’

라스와 놀아줄 정신도 없었다. 감정을 억누르는 것에만 집중했다.

-으음, 그러고 보니 이 분노는 네놈이 본왕을 불렀을 때와 결이 같은….

‘아!’

고개를 갸웃거리는 라스를 보자마자, 녀석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불의 고리!’

라온이 짧게 숨을 뱉어내고서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우우우웅!

일곱 개의 고리가 공명하며 끓어오르던 감정을 가라앉혔다.

분노로 붉게 물들던 머릿속을 푸른 파도가 쓸어내린 듯 뇌리가 맑아지기 시작했다.

‘불의 고리조차 잊어버리다니….’

정신이 아예 나갔었어.

불의 고리를 운용해야 한다는 생각이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분노한 것을 보면 놈에게 복수하겠다는 의지가 더 강해진 것 같았다.

‘아니, 정신을 못 차리는 게 당연한 건가?’

20년이 지났어도 데루스 로베르트에게 목이 날아갔을 때의 광경은 아직 생생하다.

무너지는 내 몸,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한 데루스의 차가운 눈동자 그리고 뒤집힌 달까지. 죽었을 때 본 기억은 아직도 머릿속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사람의 인생을 제멋대로 가지고 놀다가 쓸모가 다했을 때 처분한 원수를 보고 이성을 유지하라는 건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우.

라온이 느릿하게 호흡하며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운용했다. 전력으로 고리를 공명시키며 영혼의 격을 가라앉혔다.

전투할 때처럼 혼을 드높이는 게 아니라, 그림자에 몸을 숨기듯 모든 것을 감췄다. 가진 힘 이상이 드러나지 않게 모든 기운을 꼭꼭 내리눌렀다.

-네놈, 오늘 이상하느니라.

라스가 대체 무슨 일이냐며 눈매를 좁혔다.

‘별거 아니야.’

라스에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라스가 있어서 다행이야.’

요 솜사탕이 미리 데루스 로베르트의 존재를 말해주고, 불의 고리에 대한 힌트까지 준 덕분에 제대로 마주치기 전에 감정의 폭발을 멈출 수 있었다.

이런 때까지 도움을 주다니, 아낌없이 주는 라스의 영업은 오웬 왕국에서도 이어지는 것 같았다.

“허, 천검성까지 오셨군요.”

삼왕자가 다가오는 데루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천검성. 그래. 저 망할 놈의 이명이었지.’

천검성은 하늘에 닿은 검의 성인이라는 뜻을 가진 이명이다.

진짜 데루스가 어떤 놈인지 안다면 천검성이 아니라, 쓰레기라고 불러야겠지만 놈은 누구보다 고고한 이명을 가지고 있었다.

라온은 거의 근접한 데루스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은 느꼈을 수도 있어.’

자신이 아는 데루스라면 조금 전 격해진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렸을 수도 있다. 어떤 질문이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않도록 다시 마음을 가라앉혔다.

“천검성을 뵙습니다!”

삼왕자는 데루스 앞으로 걸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글렌에게 인사를 했을 때와 같은 수준의 예의였다.

“천검성을 뵙습니다.”

셰릴과 리메르는 무릎은 꿇지 않고, 고개만 숙였다. 라온은 놀란 표정을 연기하며 두 사람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어 님과 지그하르트의 영웅분들이시군요. 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데루스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나이로 보나, 지위로 보나 한참 아래인 삼왕자와 지그하르트 검사들 모두에게 존댓말을 했다.

‘이런 점이 역겹지.’

음지에서 암살자와 세작, 노예를 다루는 놈이 겉으로는 모든 사람에게는 존엄이 있다면서 항상 존댓말을 하는 점이 더럽게 역겨웠다.

“북멸왕께서는 안 보이시는군요.”

“전하와 차를 즐기고 계십니다.”

삼왕자가 알현실을 돌아보며 웃었다.

“북멸왕과 묵검존의 티타임이라니, 이건 안 갈 수가 없겠군요. 음?”

데루스가 빙긋 웃었다. 바로 알현실로 향하려던 그와 눈을 마주쳤다.

“금발적안. 설마 당신이….”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토할 것처럼 울렁거리는 속을 꽉 부여잡으며 고개를 숙였다.

“설화검협!”

데루스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설화검협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남쪽에서도 새로운 영웅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었죠.”

“과찬이십니다.”

“직접 보니 그 소문들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겠습니다. 확실히 발군의 성취입니다. 동 나이대에는 상대가 없을 듯하군요. 그런데….”

그의 푸른 눈동자가 은은한 검은빛을 토했다.

‘이 자식….’

다른 이들은 모르겠지만, 놈의 밑에서 썩었던 난 알 수 있다. 저 눈빛은 무언가 걸리는 점이 있다는 뜻이다.

“조금 전에 기분이 좋지 않아 보이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그 말과 함께 내려오는 데루스의 음습한 시선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꽉 조여들었다.

‘역시 알고 있었어.’

감정적으로 격해졌던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데루스는 그 짧은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의심을 담은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야.’

미리 준비해놓아서 정말 다행이었다.

“아뇨.”

라온이 옅은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필사적으로 감정을 가라앉혔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다만….”

“다만?”

“묵검존을 뵈었을 때 가주님과는 다른 결의 기세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심장을 뚫을 듯한 예리함에 긴장하여 저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진 모양입니다.”

“허어! 벌써 그분들이 가진 무학의 결을 느낄 정도라니, 정말 대단하시군요.”

데루스가 헛바람을 흘렸다.

“아닙니다. 두 분께서 스스로를 드러내 주신 덕분입니다.”

미소를 지으며 데루스의 시선을 살폈다. 얼굴은 웃지만, 눈은 웃지 않는다. 놈의 안구 속 깊은 곳이 짧게 번들거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놈을 가까이에서 받들었던 자신을 속일 수는 없다. 놈은 이번 일이 아니라, 그 전부터 자신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었다.

‘역시 나를 노리고 있던 건가?’

의심을 풀었다는 안도가 다가오기 전에 다시 위기감이 뇌리를 적셨다.

‘하긴 계획을 깨부쉈으니까.’

요난 가문을 먹겠다는 데루스의 오래된 계획을 사정없이 깨부쉈으니, 놈이 저런 반응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날 죽이고 싶겠군.’

지금은 웃고 있지만, 데루스는 지금 당장 자신의 목을 비틀고 싶을 것이다.

‘아니 이미 진행 중이려나.’

라이벌 가문에서 나온 최연소 마스터에 본인의 계획마저 부쉈으니, 자신을 노리는 계획은 이미 실행 중일 가능성도 있었다.

“저희 막내가 설화검협의 열성 팬입니다. 나중에 연회에서 가벼운 대화라도 한 번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데루스는 뒤에 있던 소년을 앞으로 데려왔다. 은발의 푸른 눈. 데루스와 비슷한 외모지만 아직 순수함이 찬 눈빛이 뜨겁게 반짝였다.

“레, 레폰 로베르트라고 합니다!”

전생에선 보지 못한 아이다. 나이대를 보니, 자신이 죽은 이후에 태어난 것 같았다.

‘역시 대단해.’

살기 가득한 속마음을 감추고, 부드럽게 웃으며 아들을 소개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인자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조금 전 폭발하여 모든 것을 망칠 뻔한 자신이 꼭 배워야 할 자세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입니다.”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자, 레폰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어, 어! 저, 저는 그 성자님을 구하셨던 전투에서. 아니, 하분 성에서부터 병사들을 구한 그 전투부터 라온 님을….”

“레폰. 라온 님과 대화는 나중에 하고 일단 검존께 인사부터 하자꾸나.”

“아, 예!”

“나중에 뵙죠.”

데루스는 덜덜 떨며 입을 여는 레폰을 데리고 앞으로 나아갔다.

두 사람 뒤에 데루스와 비슷한 외모의 청년이 살짝 고개를 까딱였다. 눈빛과 입매에는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이놈도 왔군.’

저놈은 알고 있다. 데루스의 셋째 아들이자, 현재 대륙십이성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카디스 로베르트였다.

라온은 로베르트 검사들과 스쳐 지나간 뒤 왕성 밖으로 나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오웬 왕성의 자랑인 검묘부터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삼왕자는 활짝 웃으며 지그하르트 일행을 이끌었다.

라온은 그 뒤를 따라가며 주먹을 펼쳤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찢어진 상처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다행이야.’

뒤를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내 복수심이 꺼지지 않아서. 그리고 네가 20년 전보다 더 높은 곳에서 있어 줘서.’

데루스가 은퇴하든가, 죽을까 봐 걱정했지만, 의미 없는 일이었다. 놈은 더 강해져서 더 높은 위치에 서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라온이 피에 젖은 손을 털며 미소를 지었다.

‘하늘에서 땅으로 추락시켜 줄 테니까.’

*     *      *

로엔은 씁쓸한 향의 차를 즐기는 글렌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굉장히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군.’

글렌은 무표정으로 차를 마시고 있지만, 실제 그의 속마음은 기뻐서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그건 모두….’

맞은편에 있는 오웬의 국왕 레크로스와 왕성까지 안내해주었던 삼왕자 때문이었다.

“아이들은 그저 건강하게만 크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광풍부단주를 보니 그 생각이 조금은 바뀌더군요.”

레크로스가 차를 부드럽게 흘려넘기고서 미소를 지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을 넘어서는 무력. 본래 마스터는 단계별로 큰 차이가 나는 경지지만, 저 아이는 상급에게도 일방적으로 밀리지는 않을 듯합니다.”

그는 놀랍다는 듯 짧게 헛바람을 흘렸다.

“어떻게 저런 친구를 키우신 겁니까? 비법을 좀 알려주시지요.”

로엔이 레크로스 국왕의 말을 들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 칭찬 덕분이지.’

오웬의 삼왕자로 모자라, 오웬의 국왕인 레크로스마저 라온을 칭찬하고 있으니, 글렌의 기분은 이미 하늘로 떠오른 상태였다.

손을 살짝 떠는 것을 보니, 곧 참지 못하고 웃음이 흘러나올 것 같았다.

“크음, 그 아이가 알아서 한 거지. 난 딱히 한 게 없소.”

글렌은 입을 막은 채 헛기침을 하며 손을 저었다. 별거 아니라는 듯한 제스처였지만, 뒤에서 보면 입가에는 이미 깊은 우물이 피어나 있었다.

‘어쩔 수 없는 팔불출이시라니까.’

손주 앞에서 억지로 감정을 숨기는 부작용 때문인지, 글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라온의 칭찬만 들었다 하면 헛기침을 하며 입매를 끌어 올리는 건 자동반사나 마찬가지였다.

‘이젠 솔직해지셔도 좋으련만.’

리메르의 말대로 마음을 터놓고 손주 사람을 밝혀도 좋겠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글렌을 모셨기에 그의 생각도 이해가 갔다.

‘그래도 세 사람이 함께하는 모습은 보고 싶군.’

이룰 건 모두 이뤘기에 미련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글렌이 라온, 실비아와 더 가까워져서 함께 밥을 먹고 웃는 모습은 꼭 보고 싶었다.

로엔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는 글렌과 라온을 머릿속으로 그리고 있을 때 시종장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전하. 천검성과 로베르트 가문이 도착했습니다.”

“예정보다 도착이 빠르군.”

레크로스 국왕이 입맛을 다시며 일어섰다.

“아무래도 자리가 하나 추가될 듯한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상관없소.”

글렌은 마음대로 하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국왕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을 나섰다.

“천검성이라….”

로엔이 응접실 문을 바라보며 짧게 입맛을 다셨다.

“가주님께서 재능으로는 발군이라 말한 적이 있었죠. 지금쯤이면 몰라볼 정도로 발전했겠군요.”

천검성 데루스 로베르트는 현 육황의 수장 중 가장 어리고 약했지만, 글렌은 그를 가장 높이 평가했었다.

“그랬었지.”

글렌이 빈 찻잔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예상이 조금 잘못된 듯하구나.”

“예? 그게 무슨….”

“그의 재능은 내 예상을 뛰어넘었어.”

그는 천천히 열리는 응접실의 문을 돌아보았다. 미소를 짓는 데루스 로베르트를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     *      *

검묘는 검의 무덤이라는 음울한 뜻과 달리 밝은 곳이었다.

푸른 수목이 찬란한 생기를 발하고, 각종 검의 조각들이 우아한 분위기를 가꿔냈다. 무덤이라기보다는 잘 가꾼 정원처럼 보였다.

“허….”

라온은 검처럼 다듬어진 수풀을 보며 감탄사를 흘렸다.

‘이거 평범하게 만든 게 아니야.’

지금 눈앞에 있는 수풀의 검은 정원 가위로 다듬은 게 아니다. 수풀의 끝에서 느껴지는 예검의 기세. 이건 진검으로 검술을 펼쳐서 검의 모양을 만든 게 분명했다.

‘대단하네.’

-어이.

검의 수풀을 보며 헛바람을 흘릴 때 라스가 머리를 들이밀었다.

-아까 그놈 누구냐.

‘뭐?’

-그 얍실하게 생긴 멀대와 무슨 관계냐고 물었다.

라스의 눈빛이 서리를 녹인 듯 시퍼렇게 번쩍였다.

-네놈이 끌어 올린 분노의 감정은 처음 본왕을 부를 때와 비슷할 정도였다. 그놈이 네 분노의 대상인가?

‘음….’

이럴 때는 예리하네.

괜히 분노의 군주가 아닌지 라스는 분노의 감정을 느낄 때만큼은 날카로운 감을 가졌다.

그래도 말해줄 수는 없지.

라스와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환생에 대해 말하는 건 시기상조였다.

어떻게 해서든 얼버무리는 게 좋겠어.

라온이 마음을 정하고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원수는 맞아.’

그것까지는 속일 수가 없어서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줄 알았느니라. 다만 좀 이상하군.

라스가 눈매를 가늘게 좁혔다.

-저놈은 네놈을 처음 보는 느낌이었는데? 거기다 당시의 네놈은 한참 어리지 않았더냐. 저놈과 무슨 원한을 쌓은 것이냐.

‘…….’

-말해보아라.

‘으, 음식.’

머리를 굴려봐도 딱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라스가 그나마 넘어갈 법한 단어를 꺼냈다.

-음식이라고?

‘어렸을 때 저놈이 내, 내 스튜의 마지막 그릇을 가져갔거든. 너도 알다시피 그때의 나는 가문에서 없는 취급을 받을 때라 잘 몰랐을 거야.’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 통하겠지?’

내가 생각해도 미친 소리니까.

라스가 아무리 바보라고 해도 이건 좀 선을 넘었다. 말해놓고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크윽, 이 자식이….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였다. 녀석의 입 모양을 보니 호통이 나올 기세였다.

-그런 일이면 빨리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어?’

-어릴 때는 음식에 대한 집착이 강하지. 더군다나 마지막 그릇이라니! 대가리를 깨지 않은 것이 용하구나!

‘…….’

라온이 천천히 눈을 내리감았다. 라스는 음식에 관해서는 예상을 뛰어넘는 바보였다. 고마우면서도 슬퍼졌다.

-진즉에 말했으면 본왕이 도와주었을 텐데! 하여튼 답답한 놈이로다!

‘…그러냐.’

-음식에 대한 원한은. 그것도 마지막 그릇에 대한 원한은 깊고도 깊지. 저놈이 인간 중 드물게 강하다고 해도 네놈은 꼭 그 복수를 해야 할 것이니라!

라스는 도와줄 테니, 그 원한을 꼭 갚으라고 중얼거렸다. 힘내라고 외치는 건 덤이었다.

“하….”

라온은 주먹을 부르르 떠는 라스를 보며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이걸 고맙다고 해야 할지….’

가만히 있어도 퍼주는 라스가 도와준다는 건 천군만마를 얻는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이런 식으로 녀석의 도움을 끌어내다니, 인생이라는 건 참으로 모를 일이었다.

-크으으. 본왕이 다 열받느니라. 만약 본왕 앞에서 마지막 민트초코 아이스크림을 챙기는 놈이 있다면 대가리를 깨고, 세포 하나하나까지 모두 얼려버렸을 것이니라.

‘그, 그렇지….’

고맙기도 하고, 좀 안쓰럽기도 해서 오늘 저녁에 열릴 연회에서는 라스의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어야겠다.

라온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일행을 따라갔다. 검묘의 하얀 길을 따라 쭉 올라가니, 바닥에 박혀 있는 검이 보였다. 주인을 잃은 지 한참 지났는지 칼날은 녹슬었고, 검병은 다 찢어져 있었다.

‘음?’

검은 한 자루가 아니었다. 이곳저곳에 세월을 탄 검들이 무수히 박혀 있었다.

지금까지 빛을 잃지 않은 명검도 있고, 다 낡아 빠진 보급형 검도 가득했다.

“이건….”

“여기가 진짜 검묘입니다.”

삼왕자가 뒤를 돌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 꽂힌 검들은 오웬을 위해 싸웠던 영웅들의 검입니다. 그랜드 마스터든, 오러를 운용할 수 없는 병사든 오웬의 깃발 아래 검을 들었다면 모두 이곳에 검을 꽂을 수 있게 됩니다.”

그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자부심이 넘쳐 보였다. 언젠가 그도 이곳에 검이 꽂힐 거라는 기대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뿌득.

라온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었다. 삼왕자의 말을 듣자, 전생의 기억들이 만화경처럼 떠올랐다.

로베르트를 위해 인생을 바쳤지만, 그 끝은 솥에 삶아지는 개였을 뿐인 지독한 세월이.

‘다르군.’

병사조차 이름을 남기는 오웬과 로베르트 가문에는 너무도 큰 차이가 있었다. 가라앉혔던 분노가 다시 끓어 올랐다.

‘조금 이르지만 시작해야겠군.’

-무엇을?

‘복수.’

당장에 놈을 노릴 수는 없으니 주변부터 천천히 갉아먹어야 한다.

‘그 시작은….’

라온은 비웃음을 흘리며 지나간 카디스를 떠올리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𝟑
✔️제313화

✔️삼왕자가 두 번째로 안내해준 곳은 연무장이었다. 다만 평범한 연무장이 아니라, 오웬 왕국의 적을 말살하는 최강의 공격대 은기사들이 수련을 하는 장소였다.

✔️라온이 눈매를 좁힌 채 은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오싹할 정도로 날카롭군.’

✔️왕실을 수호하는 근위 기사가 단단한 기둥이나 방패라면 은기사들은 끝없이 갈고 닦은 검처럼 보였다.

✔️왕도로 오면서 본 기사들과 확연히 다른 무력. 은기사들이 뿜어내는 예기에 닭살이 올라올 정도였다.

✔️‘좋은데.’

✔️은기사들이 펼치는 검술은 오웬 왕국 특유의 예검과 정검을 극대화한 초식들이었다. 검술 경지가 많이 상승한 덕분인지 그들이 펼치는 검술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건 꽤 도움이 되겠어.’

✔️가진 실력을 모두 드러내지 않았지만, 워낙에 뛰어난 검술인지라 공부가 되었다.

✔️‘그중에서도….’

✔️우측에서 누구보다도 느릿하게 검을 내지르는 청년을 보았다. 바다를 닮은 청발에 갈색 눈동자. 젊어 보이지만 가지고 있는 기운이 다른 기사들과 격이 달랐다.

✔️다만 그의 기운은 처음 느끼는 것이 아니었다. 꽤 오래전이지만 감지한 기억이 있었다.

✔️“역시 보는 눈이 좋네.”

✔️리메르가 옆으로 다가오며 씩 웃었다.

✔️“저 녀석이 보리니 키튼이다.”

✔️“보리니 키튼?”

✔️“대륙십이성의 보리니 키튼. 너 이전에 천재라 불렸던 녀석들이지.”

✔️그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한 자루 칼처럼 고고한 기세를 뿜어내는 청발의 청년을 가리켰다.

✔️“알고 계셨군요!”

✔️삼왕자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저분이 창첨검 보리니 키튼 경입니다. 광검께서도 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리메르가 보리니 키튼을 알고 있다는 게 기쁜지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대륙십이성 정도는 알고 있죠. 술집이나, 도박장에서도 맨날 나오는 이야기가 대륙십이성 중에 누가 센지라서.”

✔️리메르는 알고 싶지 않아도 도박장에 다니면 다 알게 된다고 중얼거렸다.

✔️“왕자님도 한 번 가보실랍니까? 제가 어른의 세계를….”

✔️“그 입 좀 닫아.”

✔️셰릴이 인상을 찌푸리며 팔꿈치로 리메르의 허리를 후려쳤다.

✔️“커억!”

✔️리메르가 허리를 움켜쥐고 뒤로 이탈했다.

✔️“음.”

✔️보리니 키튼이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고 검을 내린 채 다가왔다.

✔️“왕자 저하.”

✔️그는 먼저 삼왕자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알고 계시겠지만, 지그하르트의 손님분 들입니다.”

✔️“은기사단의 보리니 키튼이라고 합니다.”

✔️보리니 키튼은 너무 과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도 않게 허리를 숙였다.

✔️“지그하르트 천검대주 셰릴이다.”

✔️일행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셰릴이 그의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검대주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빈말이 아닌 듯 보리니 키튼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그리고 저분은….”

✔️“아, 신경 쓰지 마.”

✔️그가 아직도 허리를 부여잡고 있는 리메르를 보았지만, 셰릴이 시선을 가렸다.

✔️“광풍부단주 라온 지그하르트라고 합니다.”

✔️그다음 차례라고 할 수 있는 라온이 셰릴의 옆으로 다가가 보리니 키튼에게 고개를 숙였다.

✔️‘이제 어디서 봤는지 알 거 같네.’

✔️가까이서 보니 보리니 키튼의 기척을 느꼈던 때가 떠올랐다.

✔️카멜룬 근처 언덕에서 백혈교와 전투를 벌일 때 멀리서 떠올랐던 기척이 지금 눈앞에 있는 보리니 키든과 똑같았다.

✔️“라온 지그하르트….”

✔️보리니 키튼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이 정도로 성장했다니.’

✔️삼왕자를 몰래 호위할 때 멀리서 라온을 관찰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에도 나이를 뛰어넘는 강함과 우아함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예 사람이 달라진 듯 보였다.

✔️‘어처구니가 없군.’

✔️당시의 라온과 자신 사이에는 거대한 산이 몇 개나 있었건만 지금 그 산들이 모조리 뚫려 있었다. 아직 20살도 안 된 어린 검사는 이미 자신을 턱밑까지 추격해 있었다.

✔️‘이게 가능한 일인가?’

✔️설화검협이라는 이명을 받고 맹활약을 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에덴에 납치당했다고 하여 어느 정도 경시한 것도 사실이다.

✔️허나 지금 본 라온은 누구에게도 무시 받을 만한 수준의 무인이 아니었다. 저 나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무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고 지나쳤겠지.’

✔️상대의 무력을 파악하는 오웬 특유의 감각기를 익히지 못했거나, 자신의 무력이 조금만 낮았다면 라온의 실력을 파악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가 아찔했다.

✔️“보리니 경?”

✔️“아, 예.”

✔️삼왕자의 부름에 보리니 키튼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은기사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아쉽게도 단장님은 현재 부재중이십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대신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따라오라고 말했다.

✔️“흐음.”

✔️라온은 보리니가 소개하는 연무장 시설이나 기사가 아니라, 그의 등만을 바라보았다.

✔️‘어떨까….’

✔️하분 성에 가기 전에는 보리니 키튼의 기척도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큰 차이가 났지만, 지금은 아니다.

✔️경지는 여전히 저쪽이 높지만, 전력으로 싸운다면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따라잡았다.

✔️‘오길 잘했네.’

✔️라온이 검병을 툭툭 건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많은 것을 얻어갈 수 있겠어.’

✔️*     *      *

✔️데루스 로베르트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서 빙긋 미소를 지었다.

✔️“확실히 맛과 향이 좋군요. 처음에는 씁쓸하다가 끝맛은 달달한 걸 보면 벨벳 산호를 제대로 말린 모양입니다.”

✔️그는 찻잔을 내려놓고서 짧게 입맛을 다셨다.

✔️“로베르트에 사는 저도 구하기 힘들 정도인 최고급 벨벳 산호차라니, 대단하군요.”

✔️“알아봐 주시는구려.”

✔️레크로스 국왕이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글렌과 달리 차 맛을 알아주는 데루스에게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아, 이곳으로 오는 길에 설화검협을 만났습니다.”

✔️데루스는 다시 찻잔을 들어 올리며 글렌을 보았다.

✔️“가주님의 얼굴이 밝아지신 이유가 있더군요. 지금까지 본 어린 검사 중에서도 발군이었습니다.”

✔️“역시 천검성도 그리 생각하시는구려.”

✔️레크로스 국왕이 서로 비슷한 생각을 했다며 미소를 지었다.

✔️“19살에 마스터 중급이라니, 누구라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이미 두 분의 무학의 결이 다른 것도 파악했더군요.”

✔️“결을?”

✔️“예. 전하의 예리하면서도 곧은 기세를 느끼고 긴장했다고 한 걸 보면 제대로 본 듯합니다.”

✔️“허어….”

✔️레크로스 국왕은 헛바람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정말이지 무서운 재능이구려.”

✔️“예.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검사입니다.”

✔️데루스는 라온을 칭찬하며 글렌을 살폈다.

✔️‘무표정. 아니, 조금은 기뻐하는 건가.’

✔️글렌의 표정은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차가워 보이지만, 입매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아닌 척하지만, 라온을 아끼는 듯 보였다.

✔️“대륙십이성도 하위 4명은 꺾을 듯하고 중위 4명과는 비등할 겁니다.”

✔️데루스는 조금 더 강한 칭찬을 하며 글렌의 반응을 보았다.

✔️‘음, 아닌가?’

✔️대륙십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묶여 있지만, 당연히 모두 같은 경지는 아니다.

✔️나이와 재능, 무학의 차이로 그 안에서도 하위 4명, 중위 4명, 상위 4명으로 순위가 나뉘어 있다.

✔️그중 중위 4명은 이미 대륙 전체에 그 이름과 무력을 알린 중견급 무인이건만 그들과 비교해주었음에도 글렌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내 생각도 비슷하오.”

✔️레크로스 국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니 녀석이 딱 중위인데, 그 아이와 좋은 승부를 이룰 수 있을 것 같소.”

✔️“예. 저희 카디스 녀석과도 재밌는 싸움을 할 수 있을 듯합니다.”

✔️데루스는 카디스에 대한 말을 꺼내며 다시 글렌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눈빛은 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음, 내 착각이었던 것 같군.’

✔️보리니 키튼과 카디스 로베르트는 라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명성과 업적을 이룬 무인들이다.

✔️그들과 비교해주었음에도 표정에 변화가 없는 것을 보니, 글렌은 라온을 그리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하긴 저 냉혈한이 누군가를 챙기는 건 말이 안 되지.’

✔️자신이 아는 글렌은 손자는커녕 친자식도 챙기는 인간이 아니다. 이번에 에덴을 친 것도 지그하르트를 무시한 것에 화가 났을 뿐이지 라온을 구할 생각은 없을 게 뻔했다.

✔️‘계획을 시작해도 되겠군.’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이렇게 모인 것도 인연이니, 재밌는 대회를 하나 열어보는 건 어떻겠습니까.”

✔️“대회?”

✔️“무슨 대회를 말하는 거요?”

✔️글렌과 레크로스가 동시에 데루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젊은 무인들이 이렇게 모이는 것도 흔하지 않으니, 토너먼트 친선전을 여는 겁니다. 익스퍼트 급과 마스터 급으로 나눠서 열면 재밌을 듯하군요.”

✔️데루스가 손가락으로 가볍게 테이블을 두드리며 미소를 지었다.

✔️“정말 설화검협이 대륙십이성과 싸우면 어떻게 될지 궁금하기도 하니, 저희 아이도 참여시키겠습니다.”

✔️“파랑검 카디스? 그는 중위에서도 가장 높은 순위지 않소?”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는 대륙십이성에서 5위로 지금 라온이 상대하기엔 조금 버거운 상대였다.

✔️“어차피 친선 대회이지 않습니까. 위험한 일은 없을 겁니다.”

✔️“흐음, 재미는 있겠구려. 그럼 우리도 창첨검을 보내도록 하겠소.”

✔️“가주님은….”

✔️“좋소.”

✔️글렌도 무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되는군요. 젊은 동량 중 누가 가장 위에 설지가.”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모았다.

✔️“데루스 님?”

✔️로엔이 눈매를 좁히며 데루스를 불렀다.

✔️“장갑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그 말대로 검은 장갑 안쪽에서 몇 방울의 피가 흘러나왔다.

✔️데루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다.

✔️“아, 별것 아닙니다.”

✔️그가 손을 쓱 훑어내리자, 핏물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이 이야기는 연회 때 전하도록 하죠. 아이들에게 줄 선물도 모으는 게 좋겠습니다.”

✔️“흐음, 좋소.”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연회 때 다시 뵙지요.”

✔️데루스는 글렌과 레크로스 국왕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응접실을 떠났다.

✔️“나도 가보도록 하겠소.”

✔️글렌이 빈 찻잔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편히 쉬시길.”

✔️그는 마중을 나온 레크로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응접실을 나섰다.

✔️“음….”

✔️로엔이 글렌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으며 눈매를 좁혔다.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지신 듯 한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라온의 칭찬을 들어서 기뻐하던 글렌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군.’

✔️글렌의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지만, 라온에 대한 문제만큼은 그의 의중을 잡을 수가 없었다.

✔️“가주님.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로엔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막을 친 채 글렌의 옆으로 붙었다.

✔️“‘그런 말’을 듣고 어떻게 화가 안 난단 말이냐.”

✔️“그 말이라면….”

✔️“라온을….”

✔️“라온을?”

✔️“대륙십이성 따위와 비교하지 않았더냐! 가진 재능과 협의가 격이 다르거늘! 성격 역시 라온 쪽이 몇 수는 위지!”

✔️글렌이 눈매를 찡그리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가 진심으로 화가 났다는 뜻이었다.

✔️‘허….’

✔️미래의 초월자라는 대륙십이성과의 비교를 해도 만족하지 못하다니, 아무래도 손주 사랑으로 가득 찬 할아버지를 너무 얕본 모양이다.

✔️다만 그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지금이라면 몰라도 미래에 대륙십이성은 라온의 발밑에 있을 자들이니까.

✔️로엔은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입니다. 이번에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     *      *

✔️데루스 로베르트는 바로 숙소로 돌아와 두 집사를 방으로 불렀다.

✔️“마티오.”

✔️“예.”

✔️그의 부름에 좌측에 있던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항상 복면을 쓰고 있는 음지의 집사였다.

✔️“네가 키운 암살자들을 알아볼 수 있나?”

✔️“물론입니다.”

✔️마티오가 머뭇거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암살자에겐 특유의 몸짓과 분위기가 있습니다. 그건 세월로도 지울 수 없죠. 특히 제가 키운 녀석이라면 무조건 알아볼 수 있습니다.”

✔️“20년 전이고 다른 무학을 익혔다고 해도?”

✔️“제가 가르친 교육은 새의 각인 효과를 이용했기에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는 당연하다는 듯 자신감 있는 눈동자를 빛냈다.

✔️데루스가 옅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손등에 새겨진 검흔에서 말라붙은 핏물이 맺혀 있었다.

✔️“음?”

✔️그는 장갑을 잡은 채로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다.”

✔️데루스는 눈매를 좁힌 채로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혹시 라온을 기억하나?”

✔️“…그 라온 말입니까?”

✔️“그래.”

✔️“당연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마티오가 눈빛을 가라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렸을 때부터 직접 키웠고, 사냥개 주제에 주인의 손등에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새긴 놈을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지금부터 라온 지그하르트를 감시해라.”

✔️데루스가 손등에 붙은 피딱지를 떼어내며 차디찬 미소를 지었다.

✔️“놈에게서 네가 키운 암살자의 흔적을 찾아봐.”

✔️“…알겠습니다.”

✔️라온 지그하르트와 그림자 라온이 관계있다고 여기는 굉장히 허무맹랑한 명령이었음에도 마티오는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주인이 지시한 대로 따르는 개와 마찬가지의 반응이었다.

✔️데루스는 새로운 장갑을 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기회는 만들어놨으니까.”

✔️*     *      *

✔️라온은 숙소로 돌아와 예복으로 옷을 갈아있었다.

✔️-안 쉬는 것이냐?

✔️라스는 옷을 왜 갈아입냐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영식이 있거든.’

✔️-흥. 인간들은 매번 그런 귀찮은 행사를 치르더군. 이해할 수 없는….

✔️‘연회라서 다양한 요리도 나올 거야.’

✔️-무얼 하는 것이냐!

✔️코웃음을 치던 라스는 어느새 문 앞에 서서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본왕이 연회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당장 가자꾸나! 음식이 다 식느니라!

✔️‘아직 시간 안 됐어.’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보고 있으면 정말 심심할 틈이 없는 마왕이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라스.’

✔️-식사 때냐?

✔️‘아직 1분도 안 지났어….’

✔️시간이 안 됐다고 한 지 1분 만에 저 소리를 하다니, 아까 마지막 스튜에  속은 것도 그렇고 음식에는 제대로 미친 녀석이었다.

✔️‘그게 아니라, 오늘 본 국왕이랑 내 원수 기억하지?’

✔️-당연히.

✔️‘그 둘 중에 누가 더 강해?’

✔️라스의 말을 토대로 생각해보면 데루스였지만, 혹시나 해서 다시 물어보았다.

✔️-그건 확실히 말해줄 수 있느니라. 네 마지막 한 그릇을 훔쳐 간 도둑놈이 더 강하다.

✔️‘…역시 그런가.’

✔️라온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 사이에 경지를 뛰어넘었군.’

✔️20년 전 데루스는 육황에서 가장 약한 수장이라 평가받았다. 나이가 제일 어렸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그 격차를 뛰어넘은 모양이다.

✔️지랄 맞은 성격과 달리 재능이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시간의 벽을 넘어 다른 육황의 수장을 따라잡을 정도일 줄은 몰랐다.

✔️-걱정하지 마라.

✔️‘응?’

✔️-본왕이 그놈에게 복수할 기회를 열어주겠노라.

✔️라스가 눈썹은 찡그린 솜사탕의 모습으로 어깨를 두드렸다.

✔️-네놈이 나딘 빵을 먹고도 멀쩡하고, 맛 좋은 음식들을 보고도 수련이나 하는 미친놈이 된 것도 다 그 악마 놈 때문이겠지.

✔️‘어….’

✔️솔직히 틀린 말은 아니다. 암살자 훈련을 받은 덕분엔 음식의 맛을 신경 쓰지 않게 된 거니까.

✔️-음식의 분노는 곧 본왕의 분노! 그놈의 면상에 주먹을 후릴 수 있게 도와주겠노라!

✔️‘허.’

✔️입을 열 때마다 음식 이야기가 나온다. 지금도 이 녀석이 분노의 군주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능력치나 특성이라도 주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그럼 그렇지.’

✔️라온이 피식 웃었다. 능력치와 특성에 짠돌이인 라스가 퍼줄 리가 없었다.

✔️‘그럼 대체 뭘….’

✔️라스에게 다시 물어보려고 할 때였다. 창가 아래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어린 다람쥐가 창문 앞으로 올라와 있었다.

✔️“다람쥐?”

✔️검묘와 정원에서도 다람쥐 같은 작은 동물들을 보았지만, 사람을 무서워하는 다람쥐가 창가로 다가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툭툭.

✔️다람쥐는 열어달라는 듯 손으로 창문을 두드렸다.

✔️‘누가 키우던 다람쥐인가?’

✔️혹시나 해서 기감을 펼쳐봤지만, 다람쥐에게서 특별한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저 다람쥐에 이상한 기운이 있어?’

✔️-평범한 다람쥐 같지만, 아주아주 미세한 마나의 기척이 있느니라. 오랜 기간에 걸쳐 길들인 것 같다.

✔️라스도 정확하게는 모르겠다며 인상을 찡그렸다.

✔️“음….”

✔️라온이 진혼검의 검병에 손을 올린 채 창가로 다가갔다. 혹여나 위험한 짓을 하면 바로 벨 수 있도록 경계하며 창문을 열었다.

✔️툭.

✔️다람쥐는 작게 열린 창문 사이로 몸을 밀어 넣고 안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모습으로 바로 아래에 있는 서랍장으로 내려왔다.

✔️“넌 대체….”

✔️“빨리 좀 열지 그랬니.”

✔️다람쥐의 입에서 사람의 말을 흘러나왔다. 어색하지만 또박또박했으며 누군가가 떠오르는 어투였다.

✔️라온은 사람처럼 히죽 미소 짓는 다람쥐를 보며 눈을 부릅떴다.

✔️“멀린…?”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𝟒
✔️제314화

✔️라온이 눈을 비빈 뒤에 서랍장 위에 있는 다람쥐를 보았다.

✔️‘다람쥐가 맞는데….’

✔️내가 꿈이라도 꾸는 건가?

✔️다시 보아도 특별한 게 없다. 마법이나, 주술, 투기 혹은 오러까지 어떠한 기운도 없는 평범한 다람쥐. 이 녀석이 말을 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나만 바라보면 조금 부끄러운데.”

✔️다람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슬쩍 돌렸다.

✔️“허….”

✔️다람쥐의 조곤조곤한 어조를 듣자,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역시 꿈이 아니었다.

✔️“너 대체 뭐야.”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줬잖아.”

✔️다람쥐가 부끄럽다는 듯 작디작은 손을 밑으로 내리며 옅게 웃었다.

✔️다람쥐라는 개체가 이렇게 표정 변화가 자유롭다는 건 처음 알았다.

✔️“오랜만이야. 라온.”

✔️“멀린….”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 느꼈던 대로 저 다람쥐 안에는 멀린의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역시 네 목소리로 내 이름을 들을 때가 가장 흥분돼.”

✔️멀린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니, 올리려 했겠지만, 지금 그녀의 모습은 다람쥐였기에 머리 부근의 털을 비비는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그 집착녀?

✔️라스가 기겁을 하며 멀찍이 떨어졌다.

✔️-안 죽은 건 알고 있었지만, 이곳까지 찾아왔다니! 진짜 감당이 안 되는 미친 것이니라!

✔️녀석은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며 턱을 떨었다.

✔️-끄으으윽, 트라우마가 떠오르느니라.

✔️라스는 머리를 부여잡은 채 침대 위에서 쓰러졌다.

✔️‘안 죽은 걸 알았으면 말을 좀 해주지.’

✔️라온이 버둥거리는 라스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내가 왔는데 어딜 보는 거니.”

✔️멀린이 서랍장 위에 걸터앉은 채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이번에는 농염한 척하려는 듯 보였지만, 복실복실하게 흔들리는 꼬리털만 보였다.

✔️“안 죽었던 건가?”

✔️“내 걱정을 해줬던 거야? 기뻐!”

✔️“후….”

✔️한숨이 절로 나온다. 대화가 안 통하는 것을 보면 멀린이 확실했다.

✔️“거기서 대체 어떻게 살아나온 거지?”

✔️“토끼도 빠져나갈 구멍을 만드는데, 사람이면 구명줄 하나는 있어야지.”

✔️멀린이 당연한 걸 왜 묻냐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도 네 할아버지 덕분에 꽤 많은 것을 희생했지만.”

✔️그녀는 말을 이어가며 씁쓸한 표정이 되어갔다. 기쁨에 이어 아쉬움까지. 다람쥐의 모습으로 저렇게 표정을 잘 드러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금면사도 살아 있는 건가?”

✔️“‘금면사’는 죽었어.”

✔️“음….”

✔️멀린의 어조가 조금 이상했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넌 살아남기 위해서 그 다람쥐의 모습이 된 건가?”

✔️“아니. 내 몸은 다른 곳에 있지. 왜 보고 싶어?”

✔️“그럴 리가 있겠냐.”

✔️라온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얼마 대화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피곤해졌다.

✔️“그럼 그 모습은 뭐지?”

✔️“육황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아주 천천히 이 다람쥐에게 내 사념을 담는 방법을 사용했어. 이 아이의 육체도, 영혼도 건드리지 않으니 아무도 모를 수밖에.”

✔️마나나, 마법을 사용하지도 않았고, 이 다람쥐를 이용하여 공격할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모두가 평범한 다람쥐라고만 여겼던 것 같다.

✔️“내가 육황회의에 간다는 이야기는 없었을 텐데? 거기다 오웬에서 열리는 것도 최근에 퍼진 거고.”

✔️“네가 이번 회의의 당사자니까 당연히 올 거라 생각했어. 혹시 몰라서 육황 전체에 의심받지 않을 작은 동물들을 뿌려놨고.”

✔️멀린이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배시시 웃었다.

✔️“미친….”

✔️그 말 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거 좀 무서운데….’

✔️움직임을 예측한 건 물론이고, 어떠한 상황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육황 전체에 작은 동물들을 뿌려놨다는 말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끄으으윽!

✔️라스는 듣기 싫다는 듯 귀를 막았다. 아무래도 저 녀석도 이런 집착에 시달린 적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날 찾아온 이유는?”

✔️“가족이 함께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

✔️멀린은 그런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웃었다.

✔️“이런 모습이라 그곳에 있을 때처럼 안아줄 수 없는 게 아쉽네.”

✔️“헛소리를….”

✔️“그럼 널 누가 침대에 눕혔다고 생각해? 네가 가면을 쓰고 있을 때는 내 무릎을 베고 자기도 했어.”

✔️“으음….”

✔️솔직히 기억이 나진 않았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깨어나니 바닥에 누워 있던 것만 떠올랐다.

✔️“쓸데없는 소리는 됐고, 솔직하게 말해. 왜 왔어.”

✔️“네가 걱정되어서.”

✔️멀린의 들뜬 목소리가 처음으로 낮게 가라앉았다.

✔️“너희 수장도 가볍게 꺾는 가주님이 옆에 있는데 걱정할 필요는….”

✔️“타천이 널 노리고 있어.”

✔️글렌의 이야기를 꺼내려 할 때 멀린이 고개를 저었다.

✔️“날 노린다고?”

✔️라온이 멀린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나 때문에 찾아온 가주님이 에덴에 괴멸적인 피해를 입혀서 그런 건가?”

✔️“아니.”

✔️멀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다람쥐의 모습인 그녀가 천천히 적응되기 시작했다.

✔️“네 장래 때문에.”

✔️“미래?”

✔️“타천은 네가 앞으로 에덴의 대의를 이루는데 가장 큰 적이 될 것 같다며 이번 기회에 죽일 생각이야.”

✔️“이번 기회?”

✔️“그도 여러 가지로 많은 힘을 소모해서 마음대로 못 움직이거든.”

✔️그녀는 이번만 버티면 괜찮을 거라며 웃었다.

✔️“회의 중 언제 노릴지는 나도 모르겠어. 네 할아버지 같은 육황의 수장들이 근처에 있을 때는 아니겠지.”

✔️그 말이 맞을 거다. 아무리 타천이 은밀하게 노려도 글렌의 눈을 피할 수는 없으니까.

✔️“그걸 알려주기 위해서 동물의 몸까지 빌린 거야?”

✔️라온이 다람쥐의 모습이 된 멀린을 가리키며 눈매를 좁혔다.

✔️“당연하지. 가족이잖아.”

✔️멀린이 머리를 쓱쓱 문지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음….”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멀린이 전력을 다해 백혈교와 에덴을 막아줄 때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정보까지 내어 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알 것 같기에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저기 나는….”

✔️“아, 하나 더 있어.”

✔️멀린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이건 오는 길에 들은 건데, 데루스 로베르트의 입에서 네 이름이 나왔어.”

✔️“뭐?”

✔️갑자기 데루스의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몰랐기에 거칠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가 널 이상하게 보는 게 마음에 걸려서 우연인 척 접근해봤는데, 한 마디에 네 이름이 두 번 나왔어.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 조금 이상하지?”

✔️“그 이후에는?”

✔️“기막 때문에 듣지 못했어. 더 접근했다가는 이 육체가 찢어졌을 거야.”

✔️그녀는 다람쥐의 청각을 조금이라도 더 키워놓을 걸 그랬다며 입맛을 다셨다.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 두 번이라고…?”

✔️라온이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설마.’

✔️보통 사람의 이름을 한 마디에 두 번씩 넣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거기다 라온과 라온 지그하르트라는 말에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그 자식 전생의 나와 지금의 내가 관계있다고 의심하는 건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멀린의 말을 통해 떠오르는 예측 중에서 가장 확률이 높아 보였다.

✔️‘생각해보자.’

✔️내가 암살을 몇 번을 했지?

✔️처음은 녹전귀의 뒤를 노렸을 때지만 외부인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 두 번째는 4사도를 베었을 때였고, 꽤 많은 사람이 목격했다.

✔️‘그것만으로는 날 알아차릴 수 없어.’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로베르트 가문에서 배운 암살기가 아니라, 지금까지 익힌 검술을 응용한 암살 검을 사용했다.

✔️그곳에 있던 무인들의 수준으론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 확신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는 뜻이겠군.’

✔️데루스를 만났을 때 놈에게 확신이 있었다면, 분명 속을 떠보는 질문을 던졌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상황만 따지면 데루스의 의심 정도는 그리 크지 않았다.

✔️‘이제 좀 알겠어.’

✔️처음 만난 데루스의 시선이 이상했던 건 요난 가문의 일 때문이 아니라, 자신을 전생의 라온이라 생각하며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왜 의심하는 거지? 이름이 같다고 비교할 미친놈은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데루스가 자신을 전생의 라온이라고 의심하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데루스의 의심을 피할 방법을 생각해야 해.

✔️후우우우.

✔️라온이 폐에 있는 산소를 모조리 뿜어내고 눈을 감았다.

✔️‘의심하는 데루스가 할 행동은….’

✔️뻔해. 마티오를 시켜서 나한테 아직 암살자의 흔적이 남아 있는지 살피겠지.

✔️마티오는 자신을 세뇌하고, 암살자 훈련을 시킨 데루스의 최측근이자, 음지의 집사다.

✔️놈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암살자의 흔적을 확인할 게 분명했다.

✔️‘의미 없는 짓이지만.’

✔️라온이 입술을 깨문 채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미 다 지웠거든.’

✔️로엔이 암살자라는 것을 파악한 뒤에 자그마한 흔적도 드러나지 않게 암살자가 할 법한 행동이나 움직임을 모조리 지웠다.

✔️실비아 덕분에 마음가짐까지 암살자에서 검사가 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마티오가 자신을 직접 세뇌하고 교육한 교관이라고 해도 절대 알아차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머릿속으로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를 그렸다. 몸을 쓰는 법을 여러 방향으로 점검한 뒤에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끝났니?”

✔️서랍장을 갉아 먹던 멀린이 어색하게 웃었다. 다람쥐의 본능을 완벽하게 제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 고마워.”

✔️라온이 멀린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착각 때문에 진행된 일이지만, 정말 큰 도움을 받았다. 진심을 담아 감사하다고 말했다.

✔️“가족 사이에는 그런 말을 하는 게 아니란다.”

✔️멀린은 언젠가 실비아가 했던 말을 똑같이 말했다. 가슴이 쓰렸다.

✔️“그런 말은 안 해도 돼.”

✔️그녀가 서랍장에서 내려와 자신의 손 위에 작은 손을 얹었다. 작디작은 손가락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

✔️잠시 아주 잠시 이대로 멀린을 이용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랜드 마스터 급의 마법사가 주는 일방적인 애정을 이용하면 앞으로의 일에 큰 도움이 될 테니까.

✔️‘아니, 아니지.’

✔️라온이 스스로의 뺨을 거세게 쳤다. 살이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고요한 방을 울렸다.

✔️“라온?”

✔️-이, 이제 너도 미친 것이냐?

✔️멀린과 라스가 눈을 부릅떴다.

✔️‘맞아. 미친 짓이야.’

✔️저런 멀린을 이용한다면 환생하고 나서도 복수심을 불태우게 만드는 데루스 로베르트와 다를 바가 없다.

✔️설사 적이라고 해도 사람의 인생을 조롱하는 짓만큼은 해서는 안 된다.

✔️“다시 한번 말하지. 정보를 알려줘서 고마워. 하지만 난 네 가족인 록타 데포르트가 아니야. 그의 영혼은 내게 흡수됐다.”

✔️라온이 멀린을 보며 정신세계에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말해주었다.

✔️“그는 이제 이 세상에 없어. 난 네 원수지 도움을 줄 대상이 아니야.”

✔️“록타가 마지막에 한 말이 있어?”

✔️“너를….”

✔️라온이 눈을 감았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직 기억 속에 머물러 있었다. 특별한 말은 아니었지만,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걱정했다. 네겐 죄가 있지만, 그 죄를 저지른 이유가 있다고 했었다.”

✔️“그래. 그렇구나….”

✔️멀린에게서 돌아올 원망을 기다렸지만,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라온. 역시 넌 록타야.”

✔️멀린이 방긋 웃었다. 배 터지게 해바라기 씨를 먹은 다람쥐가 지을 법한 표정이었다.

✔️“록타는 기사라 부끄러운 짓을 하지 않거든.”

✔️“난 록타가 아니라니까!”

✔️“전에도 말했잖아. 록타의 혼이 깃든 이상 내게 넌 록타야.”

✔️“난 라온 지그하르트다.”

✔️“이름은 그렇게 불러줄게. 라온.”

✔️“크으….”

✔️라온이 입술을 깨물었다. 좀 괜찮나 싶었더니, 또 우기기가 시작되었다.

✔️“내 사랑이 일방적이라고 해도 상관없단다. 말했듯이 가족이란 그런 거니까.”

✔️“난 네 가족이 아니….”

✔️“아, 시간이 다 되어가네.”

✔️멀린의 목소리가 떨리고, 다람쥐의 털이 쭈뼛 섰다.

✔️“이 이상 사념이 지속되면 이 아이에게도 부담이 되거든. 이번에도 살아남기를 바랄게.”

✔️그녀가 마지막으로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귀여운 다람쥐의 모습이지만 실제 멀린의 인사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내가 사라지면 이 아이에게 먹이를 좀 챙겨주렴. 그런 거래였으니까.”

✔️그 마지막 말이 끝나자, 다람쥐의 눈동자가 맑아졌다.

✔️끽?

✔️정신을 차린 다람쥐가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다가 침대 구석으로 숨어버렸다.

✔️-미친 집착이니라. 무서울 정도였느니라….

✔️라스가 멀린이 있던 서랍장 위를 보며 턱을 떨었다.

✔️‘그럴지도.’

✔️-대체 왜 네 주변에는 미친 놈들 뿐인지 모르겠느니라!

✔️‘음….’

✔️라온은 차마 네가 ‘제일 이상해’라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똑똑.

✔️고개를 젓고서 침대 아래로 들어간 다람쥐를 부르려고 할 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부단주님! 왜 안 오시는 거예요! 우리가 입장할 차례라구요!”

✔️도리안의 다급한 목소리였다.

✔️“도리안 잠시 들어와 봐.”

✔️“네?”

✔️그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혹시 견과류 있어?”

✔️“그런 거야 당연히 있죠. 땅콩? 아몬드? 호두? 피스타치오? 해바라기 씨? 잣? 호박 씨? 캐슈넛? 전부 있어요.”

✔️오랜만에 느끼지만 정말 대단한 준비성이다.

✔️“해바라기 씨랑 땅콩으로.”

✔️“옙!”

✔️도리안이 고개를 끄덕이고 배 주머니에서 견과류가 가득 담겨 있는 원통을 꺼내 해바라기 씨와 땅콩을 주었다.

✔️“나오렴.”

✔️침대 밑으로 땅콩과 해바라기 씨를 천천히 건네자, 다람쥐가 하나씩 입에 물며 천천히 침대 밖으로 나왔다.

✔️“엑? 다람쥐? 다람쥐가 왜 여기에 있어요?”

✔️“정이 고파서.”

✔️쓰게 웃고서 손바닥 위의 해바라기 씨까지 볼 주머니에 넣은 다람쥐를 들어 올려 창가에 내려놓았다. 녀석은 잠시 뒤를 돌아보고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정원 쪽으로 사라졌다.

✔️라온은 해가 떨어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겉옷을 걸쳤다.

✔️“가자.”

✔️*     *      *

✔️도리안을 따라 연회장으로 향하자, 다른 이들은 보이지 않고, 지그하르트 검사들만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우리가 마지막이었군.’

✔️본래 연회는 계급과 연배가 낮은 쪽이 먼저 입장하기에 지그하르트는 가장 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야, 라온. 많이 컸다? 나를 기다리게 만들고?”

✔️리메르가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다가와 인상을 찌푸렸다.

✔️“부단주가 감히 단주를… 커헉!”

✔️“네가 시간을 더 끌어.”

✔️물론 시비를 걸기 전에 셰릴에게 옆구리를 얻어맞고 옆으로 짜졌지만.

✔️“라온. 무슨 일 있었어?”

✔️루난이 다가와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별일 없었어.”

✔️라온은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고민되는 일이지만, 누군가에게 터놓을 이야기도 아니었다.

✔️“가주님. 전부 모였습니다.”

✔️셰릴이 우측 대기실을 향해 고개를 숙이자, 문이 열리고 글렌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복이 아니라, 평소와 같은 제복이었지만, 그게 더 잘 어울려 보였다.

✔️“가자.”

✔️그는 잠시 이쪽을 쳐다보며 눈매를 좁히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셰릴을 필두로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대답하고서 글렌의 뒤를 따라 연회장의 문 앞에 섰다.

✔️“지그하르트의 영웅들을 환영합니다.”

✔️문을 지키는 기사들이 바닥을 향해 창을 내리찍고서 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동시에 안쪽에 있던 사회자들의 웅장한 외침이 연회장을 휩쓸었다.

✔️[북방의 패왕 글렌 지그하르트 님과 지그하르트의 영웅들이 입장하십니다!]

✔️분주하던 연회장의 분위기가 일순간에 가라앉으며 모든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저 남자가 북멸왕 글렌 지그하르트.”

✔️“자, 장난이 아닌데? 무슨 사람의 기세가….”

✔️“으으, 숨이 막혀.”

✔️“백혈교주와 타천을 홀로 압도했다는 말이 진짜였던가.”

✔️“전보다 더하군. 눈을 제대로 볼 수가 없어….”

✔️글렌을 마주한 사람들은 그의 패기에 억눌려 시선을 들지도, 눈을 바라보지도 못한 채 턱을 떨었다.

✔️‘무시무시하지.’

✔️본래 강자들은 자신이 가진 기운을 어느 정도 갈무리하지만, 글렌은 오히려 그 힘을 드러내는 성격이었기에 모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이거 좋네.’

✔️라온은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끼며 옅게 웃었다.

✔️‘나한테 관심을 주는 사람이 없잖아.’

✔️글렌이 모든 시선을 가져가니, 억지로 존재감을 숨길 필요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이곳에 온 목적을 편하게 이룰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이곳의 주인으로서 먼저 단상 위에 앉아 있던 레크로스 국왕이 옆자리를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그 좌측에는 이미 데루스가 앉아 있었다.

✔️라온은 단상 위로 올라가는 글렌의 등을 보는 척하며 데루스를 살피다가 놈과 눈이 마주쳤다.

✔️데루스는 또 본다는 듯 빙긋 웃었다. 놈의 가식적인 웃음을 보자 다시 머리가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이 멍청이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느낀 라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걱정하지 마.’

✔️이제 괜찮으니까.

✔️라온이 불의 고리를 운용하며 치솟던 분노를 가라앉혔다. 데루스에게 자그마한 구김도 없는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 올리자, 데루스의 표정이 살짝 굳어진 게 보였다.

✔️자연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의 뒤편에 있는 두 집사를 살폈다.

✔️‘우측이로군.’

✔️좌측에 있는 노집사는 양지의 일을 담당하는 심부름꾼이었고, 우측에 있는 친근한 인상의 중년 집사가 진짜 실세이자, 정체를 숨긴 마티오가 분명했다.

✔️‘세상일은 이래서 모르는 거지.’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멀린이라는 변수 덕분에 상대를 시험하게 된 건 저쪽이 아니라 이쪽이었다.

✔️라온은 그들에게서 등을 돌리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오랜만이야. 교관.’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𝟓
✔️제315화

✔️-크으으으!

✔️라스가 들뜬 신음을 흘렸다.

✔️-끝내주는군. 입안에서 맛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느니라!

✔️‘그거 다행이네.’

✔️라온이 다 비운 접시 위에 포크를 내려놓으며 피식 웃었다.

✔️-이게 음식이고, 이게 예술이니라! 요즘 것들은 레시피대로 만들기만 하지. 그 안에 정성과 철학을 담을 줄을 모르느니라.

✔️음식을 만들 때 철학까지 담아야 하다니, 요즘 셰프들은 참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더 가져오거라! 아직 본왕은 배가 고프니라!

✔️라스는 이미 빵빵해진 솜사탕 배를 두드리며 연회장 외곽에 있는 뷔페를 가리켰다.

✔️‘이게 10그릇짼데?’

✔️-고작 10그릇이니라!

✔️‘에휴, 끝이 없네.’

✔️라온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뷔페가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또 쳐다보는군.’

✔️데루스의 뒤에 선 마티오의 시선이 느껴진다. 조금 전까지 자연스럽게 봤다면 지금은 노골적인 눈빛이다. 이쪽의 반응을 보기 위한 시선이었다.

✔️“음?”

✔️라온은 자연스럽게 마티오를 돌아보았다. 그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내렸다.

✔️‘이게 가장 좋지.’

✔️상대가 강하게 쳐다보는데 모른 척하는 건 악수다. 의심하는 게 아니라, 왜 쳐다보는지 궁금하다는 반응을 하는 게 가장 좋았다.

✔️‘멀린이 큰 도움이 됐네.’

✔️멀린이 아니었다면 마티오의 시선 때문에 실수 하나는 했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의심을 벗어난다면 그녀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끄으윽….

✔️라스가 이를 바득 갈면서 단상 위에서 와인을 즐기는 데루스를 노려보았다.

✔️-네놈의 양이 적은 것도 다 저 멀대 놈 때문이니라! 음식의 원수는 절대 용서할 수 없느니라!

✔️녀석은 데루스에게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아무래도 도와준다는 말은 진짜인 듯싶다.

✔️-그러니까 이번에는 저기 있는 파이를 좀 담아봐라. 블루베리가 본왕을 유혹하고 있느니라.

✔️라온은 피식 웃고서 음식을 담은 뒤에 다시 식탁으로 돌아왔다.

✔️“그거 가지고 돼? 팍팍 좀 먹어.”

✔️“이거 11그릇짼데.”

✔️“고작 11그릇이지.”

✔️마르타가 요리가 담긴 그릇을 보고는 라스와 같은 소리를 하며 눈매를 좁혔다.

✔️“너야 그렇다 치고 다른 녀석들은 오지를 않네.”

✔️그녀의 말대로 루난은 발에 못을 박아놓은 듯 아이스크림 코너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버렌은 오웬의 기사들과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알아서 하겠지.”

✔️라온은 손을 젓고서 파이를 한입 물었다. 바삭한 시트지 사이에 스며든 블루베리의 달콤함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크으으으! 파티쉐의 정성이 가득 들어간 맛이니라! 본왕의 성에 데리고 가고 싶도다.

✔️만족해하는 라스를 보다가 눈을 내리감았다.

✔️20년이 지났어도, 환생까지 했어도 눈만 감으면 그 시절이 떠오른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으며 암살 기술을 배웠고, 훈련 때는 한 달 넘게 제대로 자지도 못한 채 사냥개나 선배 암살자에게 쫓겼으며, 부모에게 사랑을 받을 나이에 단검을 꼬나쥐고 임무에 나갔던 전생.

✔️그 악독한 일들을 명령한 건 데루스 로베르트였지만, 실행시킨 건 음지의 집사 마티오였다.

✔️어린 시절에는 폭력으로 협박했고, 세뇌에 당한 이후에는 자유로 협박했던 마티오의 기계 같던 얼굴이 떠올랐다.

✔️‘놈도 살려둘 수는 없지.’

✔️복수의 대상은 데루스 로베르트만이 아니라, 그가 일궈놓은 음지의 세력도 포함이다. 놈들의 모든 것을 철저하게 부숴버릴 것이다.

✔️‘다만 지금은 무리야.’

✔️지금 마티오의 경지는 로엔에게도 밀리지 않는 수준이고, 암살 기예를 익혀서 상대하기는 더 까다로운 놈이었다.

✔️‘지금 최선은 놈의 기운을 파악해두는 것.’

✔️라온은 마티오의 시선을 이용하여 그가 가진 기운을 탐색하는 데 주력했다. 불의 고리까지 운용하여 놈의 기운을 느끼려 할 때 라스의 시선이 뒤쪽으로 홱 돌아갔다.

✔️-둘이 더 왔구나.

✔️라스의 중얼거림과 함께 외부가 분주해졌다.

✔️쿠웅!

✔️잠시 후 연회장 밖에 있던 기사들이 창으로 바닥을 내리찍는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 님과 발카르의 영웅분들이 입장하십니다!]

✔️그 외침에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입구로 향했다.

✔️지금 도착했는지 예복이 아니라 마법사들은 로브를, 기사들은 갑옷을 두른 채 연회장에 입장했다.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입장했지만 모두의 시선을 끄는 건 그 중심에 선 붉은 단발의 아름다운 여성이다. 그녀는 금색 눈동자를 반짝이며 당당한 걸음으로 연회장의 중심을 걸었다.

✔️젊디젊은 외모였지만 그녀에게서는 바다를 담아낸 듯한 거대한 마나가 출렁이고 있었다.

✔️“나 왔어!”

✔️적발의 여성은 단상 위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에게 손을 흔들고서 활짝 웃었다.

✔️‘이 여자가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

✔️대륙에서 딱 세 명만 있다는 대마법사 중 한 명으로 발카르의 왕실마법사단장을 맡고 있는 초월자였다.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군.’

✔️본래 강할수록 노화가 느려지지만, 체임버는 그 경우가 심했다. 현재 나이가 오웬 국왕이나, 데루스보다도 많을 텐데 겉으로는 20대 극초반으로 보였으니까.

✔️“진짜 글렌 아저씨도 왔네?”

✔️체임버는 글렌을 아저씨라 부르며 단상 위로 올라갔다.

✔️“그 가벼운 입은 여전하군.”

✔️“그렇지. 뭐.”

✔️글렌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체임버는 신경도 쓰지 않고 글렌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

✔️라온이 입을 떡 벌렸다. 글렌에게 아저씨라는 말을 하는 사람이 존재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초월자들은 하나같이 이상해.’

✔️고개를 저으며 그녀의 뒤를 따라온 자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역시 왔군.’

✔️발카르의 왕녀 제이나는 당연하게도 연회에 참석해 있었다.

✔️‘내가 오는 줄 몰랐나 본데.’

✔️알았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테니, 자신이 올 거라곤 생각하지 못한 듯싶다.

✔️“흡!”

✔️체임버만큼이나 당당한 걸음으로 걸어가던 제이나가 라온과 눈을 마주치고서 짧은 비명을 질렀다.

✔️“제이나?”

✔️“왕녀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제이나를 바라보았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녀는 손을 부르르 떨고서 처음과 달리 허리를 구부정하게 숙이며 걸어갔다.

✔️‘이득이 하나 더 늘겠는데.’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싸가지 왕녀에게서 무엇을 얻을지를 생각할 때, 입구에서 사나우면서도 강대한 기파가 치솟았다.

✔️‘그러고 보니….’

✔️라스는 분명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고 말했다.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아직 소개를….”

✔️“그딴 건 필요 없다.”

✔️바닥이 부서질 듯한 울림과 함께 상의 없이 코트만 입은 거한이 안으로 들어왔다. 키는 2m가 넘어 보였고, 눈매는 맹수처럼 부리부리했으며,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굳건한 기세를 피워냈다.

✔️‘야수연맹주 야왕 오그람!’

✔️맹수와도 같은 사나움과 예의 따위는 가져다 버린 태도 그리고 비룡의 코트에 박힌 사자의 문양을 보면 서쪽의 수많은 부족들을 하나로 통일한 야수연맹의 맹주. 야왕 오그람이 분명했다.

✔️고오오오오!

✔️그에게서 뿜어지는 야성적인 기파에 연회장이 다시 한번 침묵으로 가라앉았다.

✔️“글렌 지그하르트.”

✔️오그람은 다른 무엇도 보지 않은 채 단상으로 다가가 글렌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로군. 오그람.”

✔️글렌은 침착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거만한 얼굴은 그대로인가.”

✔️“네 건방진 눈빛도 똑같구나.”

✔️“크하하하!”

✔️오그람이 시원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격도 안 변했군. 남들이 한물갔다고 할 때도 난 믿지 않았어.”

✔️그는 단상 위로 뛰어올라 데루스의 옆자리에 앉았다.

✔️체임버나 오그람의 특이한 등장에도 글렌이나, 데루스, 레크로스 국왕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러려니 하는 느낌이었다.

✔️‘육황 중 다섯이라.’

✔️한 명만 움직여도 대륙이 들썩이는 여섯 명의 초월자가 한자리에 모여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연회장이 진동이 이는 것 같았다.

✔️-재밌구나.

✔️라스가 다섯 명의 초월자를 보며 히죽 웃었다.

✔️-인간 주제에 저런 힘들을 쌓다니, 그 짧디짧은 생에 비하면 너희들의 가능성은 인정해줄 만하구나.

✔️녀석은 감탄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능성이라….’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발카르 왕국과 야수연맹 쪽 사람들을 살폈다.

✔️‘대륙십이성도 하나씩 왔군.’

✔️발카르 쪽에도, 야수연맹 쪽에도 대륙십이성에 올라가 있는 천재들이 하나씩 와 있었다.

✔️‘얻어갈 게 늘었네.’

✔️새로운 인물들의 등장으로 친목회에서 얻어가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다. 특히 최강의 육체를 지녔다는 야수연맹 쪽의 무학은 꼭 보고 싶었다.

✔️-음식이나 더 가져다 먹어라! 사람이 더 늘었으니, 얼마 못 버틸 것이니라!

✔️‘음?’

✔️라스의 외침에 고개를 돌렸다. 발카르 왕국의 마법사와 기사들은 자리에 앉아서 가볍게 식사를 즐겼지만, 야수연맹의 무인들은 라스의 말대로 음식을 거덜 내고 있었다.

✔️-빨리!

✔️‘에휴.’

✔️마음껏 먹어주겠다고 약속을 했기에 뷔페 쪽으로 움직이려 할 때 단상 쪽에서 초월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재밌겠네. 난 찬성.”

✔️데루스의 말에 체임버가 손을 들어 올리며 발장구를 쳤다.

✔️“상관없다. 우리 아이들이 네놈들의 보물을 모조리 쓸어가겠군.”

✔️오그람은 돼지 다리를 통째로 씹으며 히죽 웃었다.

✔️“그럼 결정되었군요.”

✔️데루스가 다행이라는 듯 두 손을 맞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레크로스 전하께서 말씀해주시죠.

✔️그는 중앙에 앉아 있는 레크로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알겠소.”

✔️레크로스 국왕이 왕좌에서 일어나 단상의 끝에 섰다.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의 존재감에 연회장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연회는 잘들 즐기고 있는가.”

✔️“예!”

✔️회장에 있는 모두가 대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육황회의에서 다섯이 모이는 건 굉장히 드문 일이기에 이번에는 특별한 행사를 하나 준비 중이다.”

✔️“특별한 행사라고 하신다면….”

✔️“훗날 대륙에 우뚝 설 젊은 무인과 마법사들을 위해 결투대회를 열기로 했다.”

✔️결투 대회를 한다는 말에 연회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익스퍼트급과 마스터급으로 나뉘어 진행하고, 승자에게는 젊은 무인 중 최강이라는 명예와 함께 우리가 내리는 부상이 있을 것이다. 내일모레부터 예선을 시행할 테니, 참여자는 내일까지 등록을 하도록.”

✔️레크로스 국왕이 부드러운 웃음을 지으며 연화장에 있는 무인들을 살폈다.

✔️“결승전은 우리도 관람할 테니,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로 돌아갔다.

✔️“결투대회!”

✔️“그것도 육황 분들이 보신다고?”

✔️“직접 선물도 주신다잖아!”

✔️“미쳤어! 무조건 참여해야지!”

✔️다섯 세력의 무인들은 각자 모여서 대회에 대해 떠들기 시작했다.

✔️“재밌겠네.”

✔️마르타가 쥐고 있던 포크를 구기며 눈빛을 불태웠다.

✔️“엘리트들 밟는 맛이 나겠어.”

✔️그녀는 본인도 엘리트라는 것을 잊고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다른 세력의 무학을 볼 찬스로군. 오길 잘했어.”

✔️버렌은 역시 들뜬 눈빛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음….”

✔️루난은 대회에는 관심 없이 접시에 여섯 층으로 쌓은 구슬 아이스크림을 보며 무엇을 먼저 먹을지만 고민하는 듯 보였다.

✔️-라온! 본왕도! 본왕도 저거!

✔️라스는 루난의 아이스크림 첫 번째 층에 쌓아둔 민트초코를 보며 강아지처럼 혀를 내밀었다.

✔️“…….”

✔️라온이 라스를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정말이지 철이 안 드는 마왕이었다.

✔️“설화검협은 당연히 참여하시겠죠?”

✔️아이스크림을 가져가기 위해서 뷔페로 걸어갈 때 은발의 청년이 길을 막았다. 데루스의 아들이자, 대륙십이성의 5위에 위치한 카디스 로베르트였다.

✔️“에덴, 백혈교에 이어 남북맹까지 몰아붙였다는 무력을 제 눈으로 보고 싶은데, 꼭 참여하셨으면 좋겠군요.”

✔️카디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옆에서 볼 때는 친근한 웃음이겠지만, 앞에서 보면 눈이 웃지 않아 비웃는 듯 보였다.

✔️“파랑검의 눈을 채울 수 있을지 겁이 나네요.”

✔️라온이 카디스와 시선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소문이 잘못되지 않았다면 충분하겠지요. 즐거운 시간이 될 겁니다.”

✔️‘역시 비웃는 게 맞군.’

✔️카디스는 확실히 날 무시하고 있었다. 아집이 있던 어렸을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여기서는 시비를 받아주는 게 좋겠지.’

✔️카디스는 거만하고 건방진 성미답게 남의 도발은 참지 못하는 이중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역도발로 응수해보기로 했다.

✔️“전 비슷한 수준의 상대와 싸우는 걸 즐기는데, 이번에 그 시간이 올지는 모르겠군요.”

✔️‘너 따위로는 내 즐거움을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도발하며 미소를 지었다.

✔️“…자신감이 대단하시군요.”

✔️“별로 없었는데, 파랑검께서 인정을 해주시니, 약간 생기더군요.”

✔️“으음.”

✔️본인이 했던 말을 이용하니, 카디스는 말을 잇지 못하고 신음을 삼켰다.

✔️“결투에서 꼭 만났으면 좋겠군요.”

✔️그의 목소리가 뚝뚝 끊어졌다.

✔️“가능하실지 모르겠지만, 즐겁게 해주신다면 얼마든지.”

✔️라온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카디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의 표정이 깨지거나, 기세를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잔잔했던 분위기가 파도치기 시작했다.

✔️‘당연하겠지.’

✔️도발하러 왔다가 훨씬 어린 자신에게 역도발을 당하고 할 말도 찾지 못했으니, 지금 카디스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을 것이다.

✔️‘아!’

✔️라온이 접시에 아이스크림을 담으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음? 안 담고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는 빨리 안 푸고 뭐 하냐는 듯 어깨를 두드렸다.

✔️라온은 두 가지 색이 섞인 아이스크림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이거 잘하면….’

✔️*     *      *

✔️연회가 끝난 뒤 데루스 로베르트의 숙소.

✔️다리를 꼰 채로 앉아 있는 데루스 앞에 마티오가 서 있었다.

✔️“어땠지?”

✔️“아직 확정할 수 없지만, 지금까지 본 바로는 아니라고 보입니다.”

✔️마티오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암살자들은 특유의 걸음걸이가 있습니다. 언제라도 대상을 암살할 수 있도록 뒤꿈치가 아니라, 항상 앞꿈치로 걷죠. 그게 또 티가 나지 않아야 하기에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걸음처럼 보입니다.”

✔️그는 직접 신발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라온 지그하르트의 구두는 전체가 다 닳아 있었고, 걸음 역시 평범한 검사나 기사의 그것이었습니다.”

✔️“구두까지?”

✔️데루스가 눈매를 좁혔다. 걸음걸이야 사람들의 눈이 많으니 바꿀 수 있다지만, 구두도 똑같이 닳아 있다는 건 이전에도 그렇게 걷는다는 뜻이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음식을 먹을 때도 암살자들은 티가 나지 않게 주변 경계를 하지만 그에게서는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뷔페에 10번 넘게 왕복하면서 음식만 즐기더군요. 꽤 대식가였습니다.”

✔️마티오가 의외라는 듯 눈매를 찡그렸다.

✔️“마지막으로 제가 노골적으로 볼 때도 부자연스러운 반응은 없었습니다. 전투는 보지 못했지만, 일상생활에서만큼은 암살자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흐음….”

✔️데루스가 주먹에 턱을 괸 채로 입맛을 다셨다.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으로 창밖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전투를 보면 확정 지을 수 있나?”

✔️“예. 전력을 발휘해야 하는 전투라면 절대 숨길 수 없을 겁니다.”

✔️“널 결투대회의 심판으로 넣어놨다. 가까이에서 그놈의 상태를 확실하게 살피도록.”

✔️“알겠습니다.”

✔️마티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방에서 사라졌다. 잠시 후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울렸다.

✔️“들어와.”

✔️데루스가 손짓하자, 문이 열리고 카디스 로베르트가 들어왔다.

✔️“부르셨습니까?”

✔️“도발하려다 역으로 도발 당했더군.”

✔️“그걸 또 다 들으셨군요. 민망하게시리.”

✔️카디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미소를 지었지만 눈동자에는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우승할 수 있겠지?”

✔️질문하는 데루스의 눈동자에 어둠이 깃들었다.

✔️“야수연맹이 올 줄은 몰랐지만, 상관없습니다. 십이성의 상위 4명도 꺾을 준비를 마쳤으니까.”

✔️“그럼 하나 더 추가하지.”

✔️“말씀하십시오.”

✔️“라온 지그하르트와 만난다면 놈의 팔을 베어라.”

✔️“호오.”

✔️카디스의 입매가 길게 올라갔다.

✔️“글렌이 왔던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다른 이를 그 입에 올렸다면 네 주둥이를 부쉈겠지만, 글렌만큼은 다르지.”

✔️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며 옅게 웃었다.

✔️“이미 그의 심중을 떠보았다. 죽인다면 모를까. 팔을 자른 정도로는 움직이지 않아. 절격을 써서 팔이 붙더라도 예전처럼 움직일 수 없게 하도록.”

✔️“명령대로 하겠나이다.”

✔️카디스가 어투와 달리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답을 잘 모르겠다면….”

✔️방에 홀로 남은 데루스는 달빛이 쏟아지는 창밖을 바라보며 오싹할 정도로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문제 자체를 지우는 것도 방법이지.”

✔️*     *      *

✔️라온은 연회가 끝난 뒤 광풍단을 데리고 왕궁 외곽으로 향했다.

✔️“어딜 가는 거야. 우리가 들어가도 돼?”

✔️버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내일 모레가 친선 대련이잖아. 조금이라도 쉬고 수련을 해야지.”

✔️마르타가 내일 검술 점검을 위해 자야 한다며 눈살을 찌푸렸다.

✔️“…….”

✔️루난은 이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만 생각하는지 콧노래를 불렀다. 기분이 굉장히 좋아 보였다.

✔️“다 왔어.”

✔️라온은 불안해하는 광풍단 검사들을 안심시키며 작은 정원 근처에 있는 문 앞에 섰다. 단단한 걸쇠로 잠겨 있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잘 관리된 연무장이 나타났다.

✔️“여기는….”

✔️“연무장이네?”

✔️“우리 수련하라고 구해온 거야?”

✔️친선전을 위해 수련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모두 잘 됐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삼왕자님께 부탁드려서 빈 연무장을 빌려달라고 했어.”

✔️라온이 즐거워하는 광풍단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와아아아!”

✔️“역시 우리를 생각하는 건 부단주뿐이라니까!”

✔️“넓어서 전부 쓸 수 있겠는데.”

✔️광풍단원들은 연무장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해야겠지?”

✔️“그래. 새벽부터 바로 수련하자고.”

✔️“수련복이랑 장비도 준비….”

✔️쿠우웅!

✔️내일 수련하자고 말하던 광풍단은 거칠게 문이 닫히는 소리에 움찔 놀라서 문을 돌아보았다.

✔️라온이 연무장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다.

✔️“라, 라온?”

✔️“문이 잠겼는데?”

✔️“무, 문을 왜 잠가?”

✔️광풍단 검사들은 갑작스러운 상황에 라온을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내일? 내일은 없어.”

✔️라온은 그 말을 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타오를 듯한 시뻘건 안광이 번쩍였다.

✔️“내가 다른 건 몰라도 로베르트 가문에 지는 꼴은 절대 못 보거든.”

✔️로베르트 가문의 검술 파훼법은 알려줬다간 정체를 들킬 수 있으니, 이전처럼 강한 검세로 정신과 육체를 깨우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쟤 또 왜 저래!”

✔️“갑자기 왜 미친 건데!”

✔️“저, 저거 집중력 강화훈련을 할 때의 눈이잖아!”

✔️마르타와 광풍단은 턱을 파르르 떨며 뒤로 물러섰다.

✔️“아, 아니 수련하는 건 좋은데, 일단 좀 쉬자고. 방금 밥 먹었잖아.”

✔️“그래. 밤도 늦었으니까. 내일부터 하자.”

✔️“지금 우리 수련복도 안 가져왔고, 수련검도 없어서….”

✔️반면 버렌과 몇몇 검사들은 어떻게든 설득하기 위해서 손을 저었다.

✔️“걱정 마.”

✔️라온이 손가락을 튕기자, 옆으로 도리안이 빠르게 다가왔다.

✔️“있지?”

✔️“흑, 네.”

✔️도리안은 코를 훌쩍이고 배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 안에서 현 광풍단 검사들의 수련복과 수련검이 줄줄이 나왔다.

✔️“하나 더 있잖아.”

✔️“크흑….”

✔️녀석은 눈물을 훔치고서 배 주머니에서 흑환까지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흑환!”

✔️“저거 안 부쉈어?”

✔️“이런 제기랄!”

✔️광풍단이 흑환을 보며 기겁하고 뒤로 물러섰다. 아무리 의지를 다진 녀석들이라고 해도 흑환만큼은 무서운 것 같았다.

✔️라온이 흑환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아, 내가 착각을 좀 했군.”

✔️그 말에 창백해지던 광풍단의 안색이 조금 밝아졌다.

✔️훈련할 생각은 있지만 라온과 함께하는 지옥 훈련만큼은 모두가 피하고 싶어 했다.

✔️“그, 그래. 너무 성급했어!”

✔️“수련하는 건 좋지만 결투 직전이니까 너무 빡세게 하는 건 별로라고.”

✔️“차, 차분하게 가자.”

✔️광풍단은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식은땀을 닦으며 라온에게 다가갔다.

✔️“아니, 그게 아니야. 육황 중 다섯이 참가하니까. 로베르트 가문을 만나기 전에 다른 놈들과 마주할 가능성도 높아.”

✔️라온에게서 퍼지는 기세가 가시처럼 날카롭게 갈렸다.

✔️“즉, 그 넷 모두에 대비해야 한다는 말이야.”

✔️“어….”

✔️“아….”

✔️이제 본인들이 어마어마한 착각을 했다는 걸 알아차린 검사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 이틀이면 충분하니까.”

✔️광풍단의 얼굴이 굳어지는 것과 반대로 라온의 입가에는 섬뜩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가 제천검을 검집째 들고 손가락을 까딱였다.

✔️“지금부터 죽여…아니, 훈련을 시작하지.”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𝟔
✔️제316화

✔️“이, 이러다 죽어요…. 다 죽는다고요….”

✔️도리안이 연무장 바닥을 기며 턱을 떨었다. 눈동자에 촛점이 사라져 있었다.

✔️“벌써 날이 밝았어. 크헤헤헤헤!”

✔️버렌은 대자로 누운 채 떠오르는 해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평소의 침착함은 가출했는지 실성한 듯한 표정이었다.

✔️“시발. 시발. 시이발!”

✔️마르타는 숨소리를 리듬 삼아 허공을 향해 욕을 퍼부었다. 지쳤는지 점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라온이 제일 못생겼어….”

✔️루난은 연무장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자꾸 못생겼다는 소리를 해댔다. 가끔 어젯밤의 아이스크림이 그립다고도 중얼거렸다.

✔️“대, 대체 왜 저 인간 수련은 이렇게 힘든 거야?”

✔️“적응이 안 돼. 적응됐다 싶으면 강도가 올라가니까. 진짜 뒈지겠다고….”

✔️“흐, 흑환 때문이기도 하지.”

✔️“저거 내가 부수라고 했잖아!”

✔️“부숴도 소용이 없어. 도리안 저 자식 배 주머니에서 복사가 된다고….”

✔️“그럼 도리안을 부수자.”

✔️광풍단 검사들도 모두 연무장에 드러누웠다. 넋이 나간 듯 다들 헛소리만 내뱉고 있었다.

✔️라온은 수련을 시작할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쓰러진 광풍단 앞에 섰다.

✔️“쉬면서 들어.”

✔️“또, 또 뭘 하시려고….”

✔️도리안이 공포에 질린 눈으로 손을 떨었다.

✔️“지금부터는 이론 교육이다.”

✔️라온이 훈련생을 가르치던 교관들처럼 허리를 펴고, 뒷짐을 졌다.

✔️“먼저 오웬 왕국부터 시작한다. 오웬 왕국 검술의 특징은 빈틈을 노리는 예리하면서도 정확한 검격이다. 바늘구멍처럼 자그마한 공간도 놓치지 않고 찔러 들어오지.”

✔️“빈틈….”

✔️“정확성인가.”

✔️“거기다 감각도 좋아. 상대의 약점과 흐름을 파악하는 눈은 육황 중 제일이다. 단 한 순간도 마음을 놓아서는 안 돼.”

✔️육황 제일의 눈이라는 말에 광풍단이 마른침을 삼켰다.

✔️“다음으로 야수연맹.”

✔️라온이 두 번째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야수연맹의 무인들은 육황오마 중 최고의 육체를 지니고 있다. 오러를 운용하지 않은 맨몸으로도 잘 벼린 검을 견딜 정도지.”

✔️“으윽….”

✔️“그럼 그냥 괴물 아닌가?”

✔️“잘 말했어. 괴물.”

✔️괴물이라고 말한 검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야수연맹은 대륙에서 괴물이라 불린다. 강철 같은 육체와 바위를 찢어버리는 괴력 그리고 야성의 본능으로 갈고 닦은 무학까지. 맨손이지만, 무기를 들고 있는 무인들보다 몇 배나 더 위험해.”

✔️“근데 좀 단순해 보이던데?”

✔️“맞아. 꼭 몬스터 같은 느낌이었어.”

✔️검사들은 연회장에서 본 야수연맹의 무인들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단순하기에 더 무서운 법이지. 전략 따위 무시하고, 검기는 몸으로 받아치면서 멧돼지처럼 달려들면 오금이 저려 올걸.”

✔️라온이 차게 웃으며 주먹 위로 오러를 일으켰다. 열기로 타오르던 주먹이 바위 크기로 부풀어 올랐다. 맞았다간 다치는 정도가 아니라, 몸이 터질 듯한 모양새였다.

✔️“이게 야수연맹의 오러 운용이다.”

✔️“어우….”

✔️“무, 무섭긴 하네.”

✔️“맞으면 주, 죽겠는데….”

✔️광풍단 검사들은 오싹해졌는지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세 번째는 발카르의 마법사와 기사들. 발카르 마법사들의 특징은 빠른 마법 전개다. 마나의 축복을 받은 그들의 영창은 빠르면서도 정확해. 평범한 마법사들을 상대할 때처럼 속전속결로 끝내려고 하다간 역습에 나가떨어질 거다.”

✔️라온이 세 개의 손가락을 세우며 짧게 혀를 찼다.

✔️“반면 발카르의 기사들은 마법사들의 보호가 주 임무인지라 방어 위주의 검술과 오러를 익혔어. 강철보다도 단단한 그들의 방어 검술을 깨는 건 쉽지 않을 거야.”

✔️발카르는 마법사가 중심이 되는 왕국이지만, 그렇다고 기사들이 약하지도 않다. 마법사들을 보호하는 기사들의 방어는 다른 육황의 무인들도 쉽게 깨지 못한다.

✔️“마지막으로 로베르트.”

✔️라온은 로베르트의 이름을 말하며 흥분하지 않기 위해 불의 고리를 운용했다.

✔️“그들의 검술은 남쪽의 바다와 닮았다.”

✔️“남쪽의 바다는 맑고 잔잔하지 않나요?”

✔️도리안이 눈동자를 위로 올리며 물었다.

✔️“맞아. 우리가 다녀왔던 가젤 강보다도 잔잔하지. 그들의 검술은 그런 바다를 본떠 부드러우면서도, 유려하다. 적의 검술에 담긴 오러와 흐름을 지워버리는 특징도 있지.”

✔️“허….”

✔️“거, 검술의 흐름과 오러를 지운다니….”

✔️“그러면 무적 아니야?”

✔️검술의 흐름을 지운다고 하자 광풍단 검사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게 다가 아니야. 남쪽에는 1년에 한 달 정도 파도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시기가 있다. 그 파도처럼 로베르트의 검술은 잔잔하고 유연하게 버티다가 기회가 왔을 때 파랑을 일으키지. 그때의 공격력은 다른 가문보다 강력해지니까. 조심해야 해.”

✔️라온은 로베르트 가문의 검술을 설명해준 뒤 낮은 숨을 뱉었다.

✔️‘기본밖에 알려줄 수 없어서 답답하군.’

✔️로베르트 가문의 검술을 아예 파훼하는 방법도 알려주고 싶지만 그걸 가르쳤다간 데루스의 의심에 박차를 가하게 만드는 꼴이다. 지금은 광풍단 검사들이 가지고 있는 실력으로 상대를 꺾게 만들어야 했다.

✔️“근데 부단주님은 그걸 다 어떻게 아시는 거예요? 다른 육황에 가보신 적 없잖아요.”

✔️도리안이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단주님께 배웠다.”

✔️잠시 고민했지만, 언제나 통용되는 리메르 패스를 사용했다.

✔️“끄으응….”

✔️“그, 그런 괴물들을 이길 수 있으려나?”

✔️“다들 우리보다 나이도 많던데.”

✔️“으,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광풍단 검사들은 네 세력의 특징을 듣고서 겁에 질린 듯 입술을 떨었다.

✔️“이 겁쟁이 새끼들!”

✔️마르타가 비틀대면서 몸을 일으켰다.

✔️“우리보다 힘든 길을 거쳐온 놈들이 있을 거 같아? 다 좁밥이라고!”

✔️그녀는 뒤에 있는 검사들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오랜만에 맞는 말을 하는군.”

✔️버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죽을 위기를 헤쳐 온 건 한두 번이 아니야. 그런 경험은 다른 육황이라고 해도 쉽게 못 하지.”

✔️그도 주먹을 말아쥔 채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호받기만 하는 건 질렸다고 했잖아.”

✔️루난도 평소의 맹한 눈이 아니라, 별빛처럼 빛나는 눈동자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그건 그러네요.”

✔️“맞아. 지그하르트 광풍단이 싸우기도 전에 겁을 먹을 수는 없지.”

✔️“상대를 꺾을 대책을 생각해봐야지.”

✔️광풍단 검사들도 조장들의 말에 힘을 얻었는지 모두 일어서서 자리를 잡았다.

✔️“좋은 눈빛이다.”

✔️라온은 열기로 달아오른 광풍단 검사들의 눈동자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첫 번째로 설명했던 오웬의 날카로우면서 정확한 검술을 막는 방법은 뭘까?”

✔️“선수필승. 적보다 더 빠르게 공격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레인이 슬며시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아니면 방어 위주로 버티다가 적의 힘이 빠졌을 때 공격하는 법도 있겠지.”

✔️버렌이 몸을 일으키며 입맛을 다셨다.

✔️“둘 다 나쁘지 않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다.”

✔️“더, 더 좋은 방법?”

✔️뭔가 불안감을 느꼈는지 마르타가 목소리를 떨었다.

✔️“그래. 빈틈을 안 만들면 되는 거야.”

✔️“어….”

✔️“빈틈을 없앤다고?”

✔️“그, 그게 가능해?”

✔️“하루밖에 안 남았는데?”

✔️“물론 가능하지.”

✔️라온이 서늘하게 미소를 지었다. 해가 떠올랐지만 그의 미소는 어젯밤보다 더 어두워 보였다.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 몰아붙이면 확실하게 발전하더라고. 내가 해봐서 잘 알아.”

✔️“주, 죽기 직전?”

✔️“몰아붙여?”

✔️“누, 눈동자가 돌아갔어! 어제보다 더 돌아갔다고! 저러다 튀어나오겠어!”

✔️도리안이 네발로 기면서 물러섰다. 그는 배 주머니에서 바위와 모래를 꺼내서 벽을 쌓기 시작했다.

✔️“기분 탓이야.”

✔️라온이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리며 광풍단에게 다가갔다. 불에 타오르는 제천검으로 도리안이 만들어놓은 벽을 깨부쉈다.

✔️콰아아아앙!

✔️무너지는 바위 조각 사이로 라온의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쩍였다.

✔️“히익!”

✔️“으어어억!”

✔️“꺄악!”

✔️도리안만이 아니라, 광풍단 모두가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내일까지 너희를 죽…아니, 진짜 실력을 끌어내 주지.”

✔️*     *      *

✔️“진짜 실력을 끌어내는 게 아니라, 미친개를 끌어내는 거 아닐까?”

✔️리메르가 라온과 광풍단이 있는 연무장을 몰래 살피며 헛바람을 흘렸다. 그는 태양보다 짙게 타오르는 라온의 눈동자를 보며 입술을 떨었다.

✔️“쓰읍, 여기서도 광견단이라는 이름 퍼지면 곤란한데.”

✔️“난 마음에 드는데?”

✔️셰릴이 도망치지도 못한 채 덜덜 떠는 광풍단을 보며 옅게 웃었다.

✔️“싸우기도 전에 쫄아 버리는 겁쟁이보다 다 물어뜯는 미친개가 훨씬 낫지. 안 그래요?”

✔️그녀가 대답을 구하듯 뒤를 돌아보았다.

✔️“제 생각도 같습니다.”

✔️로엔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패배할 바에는 목을 물어뜯고 동귀어진을 하는 게 낫지요.”

✔️그는 인자한 얼굴로 오싹한 말을 뱉었다.

✔️‘진짜 여긴 다 미친 인간들밖에 없나.’

✔️리메르가 고개를 젓고서 바로 옆에 서 있는 글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가주님은 어떻게….”

✔️“라온의 훈련 방식은 광풍단 아이들의 몸과 정신에 쌓아둔 잠재 능력을 끌어내는 훈련이다. 아직 습득하지 못한 무학이 아니라, 이미 익혔지만 적응하지 못한 부분을 위로 떠올리는 거지.”

✔️글렌은 광풍단을 몰아붙이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훈련 방법을 알고 있다니, 어떻게 저리 똑똑하고 현명한지 모르겠군.”

✔️“에?”

✔️“대회 직전에 본인이 아니라, 동료들을 생각하고 교육하는 따스한 마음. 정말이지 모자란 부분이 없는 아이로구나.”

✔️“따스한 마음?”

✔️리메르가 인상을 찌푸리며 연무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쟤가 따스해?’

✔️악마 그 자첸데?

✔️라온은 흉신악살 같은 얼굴로 광풍단을 후려 패고 있었다. 어딜 봐서 따스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저기 보시면 눈동자가 돌아가….”

✔️“어젯밤부터 아이들을 훈련 시켰으니 피곤하겠지.”

✔️“아니, 애들 비명이….”

✔️“기합이 시원하군. 모두가 즐거워하는 것 같구나.”

✔️이미 막내 손자에게 콩깍지가 씌인 글렌에게는 어떤 말도 통하지 않았다.

✔️“리메르.”

✔️“예?”

✔️“라온에게 육황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다니. 네 녀석도 제대로 일할 때가 있구나.”

✔️글렌은 수고했다는 듯 리메르의 어깨를 두드리고 나무에서 내려갔다.

✔️“너도 아예 몹쓸 놈은 아니야.”

✔️“허허.”

✔️셰릴과 로엔이 미소를 지으며 글렌을 따라 내려갔다.

✔️“아하하하! 내가 좀 그렇지.”

✔️칭찬을 들은 리메르가 히죽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근데….”

✔️그는 눈매를 좁힌 채 라온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그런 말을 했던가?”

✔️*     *      *

✔️결투대회 예선 당일.

✔️예선 시작까지 한 시간가량 남았음에도 왕실 대련장은 이곳저곳에서 모여든 구경꾼들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크으으, 육황 무인들의 결투를 내 눈으로 보게 되다니, 앞으로 눈물 따위 안 흘린다.”

✔️“이럴 때가 아니면 황금을 퍼줘도 못 보는 거니까.”

✔️“육황이라는 무게감이 실리니까. 아직 유망주들인데도 긴장감이 넘치지 않냐?”

✔️“시간이 너무 안 가. 빨리 시작 안 하나?”

✔️대련장의 좌석에 앉은 구경꾼들은 오늘 보게 될 결투를 기대하며 웃음꽃을 피워냈다.

✔️“어디가 우승하려나.”

✔️“당연히 오웬이지. 이렇게 급조된 결투는 주최 측이 유리한 법이야.”

✔️“그렇다고 하기에는 쟁쟁한 인물들이 너무 많잖아.”

✔️“일단 익스퍼트 급에선 삼왕자 저하께서 승리하시겠지.”

✔️“그건 모르지. 야수연맹의 말코르는 백혈교의 주교를 맨손으로 찢어버렸다고.”

✔️“발카르의 제이나 왕녀도 있잖아. 그녀의 마법은 앞에서 보고도 못 막아.”

✔️“로베르트 가문의 검사들도 하나같이 뛰어나지.”

✔️구경꾼들은 오늘의 승자가 누구일지를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기사들 몰래 벌써 도박판이 열린 곳도 있었다.

✔️“그럼 메인인 마스터 대결은 어때?”

✔️“그건 대륙십이성 5위 카디스 로베르트 님으로 정해져 있잖아.”

✔️“하긴 1위부터 4위까지는 참여하지 않았으니.”

✔️“아니야. 7위인 보리니 키튼 경의 실력도 많이 올랐다고 들었어.”

✔️“대륙십이성은 아니지만, 마스터 상급에 맞먹는다는 야수연맹의 참룡수 가로나 님도 있다고.”

✔️“아, 심장 떨려. 빨리 좀 시작했음 좋겠다.”

✔️구경꾼들은 익스퍼트 이후에 열린 마스터들의 결투를 상상하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지그하르트는 어때?”

✔️“음, 나쁘지는 않은데, 우승하기엔 좀 그렇지.”

✔️“일단 다른 곳에 비해 경험이랑 나이가 달리잖아.”

✔️“저 또래에서 2년 차이는 커. 아직 잡기는 무리야.”

✔️“솔직히 만만하지.”

✔️“대륙십이성 2위인 그 남자가 왔다면 모르겠지만….”

✔️“글렌 님은 육황 최강이라고 인정하지만, 다른 검사들은 좀 부족하지.”

✔️최근 글렌의 활약이 대단했기에 모든 스포트라이트가 그에게 쏠려 다른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가 있잖아.”

✔️“잘 나가긴 했지만, 적에게 납치당했잖아.”

✔️“그래. 홀로 빠져나가지도 못해서 결국 가문의 도움을 받은 애라고.”

✔️“다 떠나서 아직 어려. 마스터 상급에 다다랐다고 하는 창첨검이나 파랑검을 상대하기는 무리지.”

✔️구경꾼들은 라온이 아직 어리기에 마스터 대전에 나가도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할 거라며 손을 저었다.

✔️쿠웅!

✔️모두가 각자의 생각으로 오늘 이루어질 예선을 기대하고 있을 때 대련장의 정문이 열렸다.

✔️철컥.

✔️철과 철이 맞물리는 각진 쇳소리와 함께 은빛 갑주를 두른 오웬의 기사들이 대련장으로 들어왔다. 기사들은 고고한 눈빛을 발하며 중앙 자리로 향했다.

✔️“우와아아아아!”

✔️“오웬! 오웬! 오웬!”

✔️“청수리 기사단이다!”

✔️“영운 기사단도 왔어!”

✔️“창첨검!”

✔️오웬의 안방이었기에 연무장을 채운 구경꾼들은 목청이 터지도록 오웬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후우욱.

✔️파도가 치는 듯한 시원한 바람이 일었다. 두 번째로 들어오는 건 로베르트 가문. 푸른 제복을 입은 로베르트 검사들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측에 자리를 잡았다.

✔️“우오오오오오!”

✔️“로베르트 가문!”

✔️“기련검대가 왔어!”

✔️“파랑검이다!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

✔️“대륙십이성!”

✔️오웬만큼은 아니지만 로베르트 가문도 그 명성에 못지않은 환호가 터져 나왔다.

✔️콰아앙!

✔️걸음 소리만으로 대지가 울린다. 보호 장비 없이 맨몸을 그대로 드러낸 야수연맹의 무인들이 야성적인 기파를 일으키며 대련장으로 들어왔다.

✔️“야수연맹이다!”

✔️“이야아아아아아!”

✔️“참룡수가 선두에 있어!”

✔️“악안족도 한두 명이 아니야!”

✔️“오늘 장난 아니겠는데!”

✔️맨몸 그리고 맨손. 최강의 육체로 폭력적인 전투를 치르는 야수연맹의 인기는 오웬 왕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였다.

✔️찌이이잉!

✔️정제된 마나의 울림과 함께 발카르 마법사들이 대련장으로 입장했다. 비단결 같은 로브를 두른 마법사들의 주변에는 선명한 마나의 축복이 함께 했다.

✔️“우오오오오!”

✔️“발카아아아아르!”

✔️“역시 살라만도 왔구만!”

✔️“제이나 왕녀님! 나 죽어요!”

✔️“타멸의 마도사다!”

✔️발카르는 오웬과 인접한 왕국이었기에 그들의 인지도도 하늘을 찌를 정도로 높았다.

✔️저벅.

✔️지금까지와는 다른 울림이 대련장을 휩쓴다.

✔️오웬처럼 고고하지도, 로베르트처럼 부드럽지도, 야수연맹처럼 무겁지도, 발카르처럼 신비롭지도 않았다.

✔️저벅.

✔️그저 거칠기만 한 걸음 소리였지만 귀를 곤두세우고,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게 만드는 기이한 울림이었다.

✔️저벅.

✔️신경을 집중시키는 발소리와 함께 라온과 광풍단이 대련장의 문을 넘어섰다. 심해처럼 깊게 가라앉은 그들의 눈동자에서 샛노란 광기가 이글거렸다.

✔️“우오오….”

✔️“이, 이게….”

✔️“지그하르트?”

✔️“뭐, 뭔가 분위기가 달라.”

✔️“…저들이 만만하다고?”

✔️구경꾼들은 지그하르트 검사들이 뿜어내는 사나운 광기에 짓눌려 환호조차 지르지 못했다.

✔️“으음!”

✔️“저것들….”

✔️“저게 무슨….”

✔️다른 육황의 무인과 마법사들도 지그하르트 검사들에게서 피어나는 섬뜩한 기세에 마른침을 삼켰다.

✔️후우우욱!

✔️대련장을 침묵시킨 지그하르트 검사들은 좌측에 자리를 잡고 탁한 숨결을 내뱉었다. 회색 연기가 그들을 둘러싸는 듯한 모습이었다.

✔️고오오오.

✔️라온은 모두가 자리를 잡은 후에 뒤를 돌았다. 뜨거운 살기와 차가운 광기를 두른 검사들의 눈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틀 동안 잘 따라와 주었다.”

✔️눈으로 욕을 하는 광풍단을 보며 보이지 않는 목줄을 부숴주었다.

✔️“이제 물어뜯을 시간이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𝟕
✔️제317화

✔️라온은 사방에서 쏘아지는 사람들의 시선을 느끼며 차게 웃었다.

✔️‘우리를 우습게 보고 있군.’

✔️광풍단이 입장할 때 내뿜었던 광기에 잠시 위축되었지만, 관객들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무시가 담겨 있었다. 나이, 경험, 명성을 따지며 광풍단 검사들을 얕잡아보고 있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해.’

✔️광풍단은 다른 세력의 무인들보다 어리다. 이곳에서만큼은 최연소. 나이의 차이만큼 수련한 시간이 다르기에 저들이 광풍단을 만만하게 보는 것도 이해는 간다.

✔️‘하지만 나이가 다가 아니지.’

✔️경험의 격이 다르니까.

✔️광풍단이 겪은 실전과 훈련은 그 어떤 세력의 경험에도 뒤지지 않는다. 이들은 일이 년 정도의 차이라면 충분히 따라잡을 수 있는 수라장을 헤쳐왔다.

✔️-이제 네놈이 무서워지려고 하느니라.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올라와서 눈매를 찡그렸다.

✔️-본왕도 부하들을 편하게 두지 않는 편이지만, 네놈 정도는 아니니라. 마계에서 부하를 가장 험하게 다룬다는 엔비 놈도 너를 보며 혀를 내두를 것이니라!

✔️이틀 동안 광풍단의 수련을 보았던 라스는 겁에 질린 것처럼 턱을 떨었다.

✔️‘그래?’

✔️라온은 헛바람을 흘리는 라스를 보며 피식 웃었다.

✔️‘라스가 질릴 정도의 훈련을 했는데 져서는 안 되지.’

✔️시간이 별로 없었기에 가문에서 했던 훈련들보다 강도를 높였음에도 광풍단은 한 명도 낙오하지 않고, 몸과 정신 아래에 가라앉은 잠재 능력을 끌어올렸다.

✔️광기를 두르고, 전력을 다 끌어낼 수 있게 된 광풍단을 우습게 보았다간 단숨에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흐음.”

✔️라온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광풍단의 눈을 보았다. 노란 광기가 눈동자의 중심에 아릿하게 박혀 있었다.

✔️‘저 광기가 향하는 게 나라니 이거 웃어야 하는 건지, 울어야 하는 건지.’

✔️광풍단은 곧 싸우게 될 육황의 무인들이 아니라, 이틀 동안 고생시킨 자신을 후려 패고 싶은 것 같았다.

✔️“지금부터 대진표를 공개하겠습니다!”

✔️대련장에 올라간 사회자가 손짓을 하자, 마법사들이 허공에 익스퍼트 급 대진표를 공개했다. 참여자의 숫자가 많았기에 128강이라는 엄청난 숫자가 만들어졌다.

✔️“우와아아아아!”

✔️“삼왕자님은 여섯 번째네! 야수연맹이랑 싸우신다!”

✔️“제이나 공주님! 꼭 이겨주세요!”

✔️“이름값이 장난이 아니네. 재미없어 보이는 게 하나도 없어!”

✔️대부분 명성 있는 무인과 마법사들이었기에 관객들은 환호를 지르며 대회의 시작을 기다렸다.

✔️‘우리 쪽 첫 대결은….’

✔️라온은 환호 속에서 가장 먼저 싸우는 광풍단의 이름을 찾았다.

✔️‘버렌이로군.’

✔️광풍단의 맏형 역할을 하는 버렌이 처음이라니, 만족스러운 대진이었다.

✔️‘그리고 상대는 리켈 로베르트인가.’

✔️로메르트 가문의 직계는 아니지만 화려한 검술로 나름 명성을 알린 20대 초반의 검사다. 본래의 버렌이라면 버거운 상대지만, 이번 훈련을 통해 성장했으니,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어….”

✔️“저, 저 사람은 나보다 훨씬 세 보이는데….”

✔️“으음….”

✔️“마, 망했다.”

✔️대진표를 보고 본인의 상대를 확인한 광풍단 검사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이미 패배라도 한 것처럼 여기는 관객들의 반응에 위축된데다, 명성을 떨치는 선배들에 비해 본인들이 이름값이 초라하다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들 주목.”

✔️라온이 손뼉을 쳐서 광풍단의 시선을 모았다.

✔️“너희도 알고 있겠지? 지금 이 대련장 안에서 지그하르트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은 없다는 걸.”

✔️“으음….”

✔️“젠장….”

✔️광풍단이 이를 갈았다. 반쯤 미쳐있는 상태에서도 자존심이 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화낼 게 아닌데?”

✔️라온이 분노하는 광풍단을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무슨 소리지?”

✔️이틀 만에 볼이 홀쭉해진 버렌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너희를 위한 무대야.”

✔️양팔을 펼쳐서 사위에 가득한 구경꾼들을 가리켰다.

✔️“너희를 만만하게 보고 벌써 패배를 점치는 저 건방진 얼굴들을 경악으로 물들게 만들면 재밌지 않겠어?”

✔️“아!”

✔️“그건….”

✔️그 말을 들은 광풍단 검사들의 눈동자에서 광기를 지우며 열기가 타올랐다. 그들은 관객들을 보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맞아. 재밌겠네.”

✔️눈 밑이 시꺼매진 마르타가 관객들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멍청이들의 입이 떡 벌어지는 꼴을 보면 오늘 저녁 반찬이 필요 없겠어.”

✔️“꼭 보고 싶네.”

✔️“심장 떨리는데?”

✔️광풍단은 광객들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광기보다 흥분이 조금 더 떠오른 듯한 표정이었다.

✔️‘온도가 조금 부족해.’

✔️지금 상태도 나쁘지 않지만, 제대로 된 활약을 보이려면 약간의 광기가 더 필요해 보였다.

✔️“내가 보기에는 너희들 모두 충분히 이길 수 있는 상대를 만났거든.”

✔️라온이 광풍단을 보며 턱을 치켜올렸다.

✔️“광풍단끼리 만나는 게 아닌 이상 혹시라도 졌다가는….”

✔️광풍단 이상의 광기가 타오르는 눈동자로 입매를 말아 올렸다.

✔️“가문으로 돌아가는 대로 지금까지 했던 훈련을 한 달 동안 진행한다.”

✔️“끄윽!”

✔️“꺼억….”

✔️“크흡….”

✔️광풍단이 숨이 멎은 듯한 신음을 흘렸다. 그들의 눈동자에 가라앉았던 광기가 들불처럼 일어났다.

✔️쿠구구구구!

✔️라온은 살기보다도 섬뜩한 광기를 마주하며 미소를 지었다.

✔️“딱 좋은 온도야.”

✔️*     *      *

✔️“오웬 왕국 찰리 위빈의 승리!”

✔️“우와아아아아아!”

✔️발카르의 기사를 상대로 승리한 오웬 왕국의 젊은 기사가 두 손을 올리며 관객들의 환호에 보답했다.

✔️잠시 승리의 순간을 즐긴 그는 미소를 간직한 채 대련장을 내려갔고, 쓰러진 기사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다음 대련을 시작하겠습니다. 버렌 지그하르트 그리고 리켈 로베르트!”

✔️“우오오오! 지그하르트 대 로베르트야!”

✔️“검술 가문의 대결!”

✔️“그래도 승부는 쉽게 나지 않을까?”

✔️“그렇지. 리켈은 한참 전에 익스퍼트 최상급에 오른 검사잖아. 백수검이라는 이명도 있고.”

✔️관객들은 시작도 전에 리켈의 승리를 점쳤다. 지금까지 명성이 높은 사람들이 대부분 승리했기에 그들의 판단에는 거침이 없었다.

✔️“후우.”

✔️리켈 로베르트는 대련장으로 올라와 짧게 숨을 뱉었다.

✔️‘버렌 지그하르트라.’

✔️가볍겠군.

✔️제대로 들어본 적도 없는 19살짜리 꼬마였다. 그래도 직계라고 무력단체의 조장을 꿰찼지만, 자신의 상대는 절대 아니었다.

✔️‘어차피 지그하르트야. 글렌 하나밖에 없는 곳이니까.’

✔️최근 글렌이 백혈교주와 타천을 압도하기 전까지 지그하르트는 육황에서도 말석으로 치던 가문이다. 글렌이 강한 것이지, 다른 이들이 강한 게 아니기에 볼 것도 없었다.

✔️‘빠르게 끝내는 게 좋겠지.’

✔️토너먼트였기에 지그하르트의 애송이 따위에게 시간과 체력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끝낸 뒤 다음 전투에 대비해야 했다.

✔️저벅.

✔️반대편에서 버렌이라 불린 아이가 올라왔다. 이름을 부른 지 한참 지났는데, 지금 올라오는 것을 보니 긴장이라도 한 것 같았다.

✔️‘긴장까지 했다면 더 쉽겠는데.’

✔️옅은 미소를 지으며 올라온 버렌을 살폈다. 가는 푸른 머리카락에 눈빛은…. 저놈 눈빛이 왜 저래?

✔️‘아예 색이 변했는데?’

✔️버렌의 눈동자에서 입장할 때보다 더 지독한 광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대련이 아니라, 실전. 그것도 목숨이 경각에 담긴 실전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었다.

✔️“어, 야, 양쪽 다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마른침을 삼켰다.

✔️“예.”

✔️버렌은 무언가에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음, 준비됐소.”

✔️눈매를 좁힌 리켈 로베르트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여섯 번째 대결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손을 내리자마자 리켈 로베르트가 땅을 박찼다.

✔️‘최대한 빠르게!’

✔️버렌의 눈빛에 등골이 오싹했다. 단번에 끝내기 위해서 좌측으로 짓쳐 들어 검을 내리쳤다. 파도를 본뜬 백파검의 강렬한 검격이 대각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쩌어엉!

✔️기습이 무색하게도 버렌은 가볍게 검을 틀어서 백파검의 초식을 쳐냈다.

✔️“그래봤자다!”

✔️리켈이 손목을 휘돌리며 두 번째 검격을 쏘아냈다. 조금 전보다 더 강한 오러와 흐름이 어린 백파검의 백수호영이라는 초식이었다.

✔️치이이잉!

✔️하지만 이번에도 리켈의 검격은 버렌의 방어를 뚫어내지 못하고 사그라들었다.

✔️‘제법이군. 한 수는 있다는 건가?’

✔️어리다고 해도 지그하르트의 직계. 가볍게 봐서는 안 될 모양이다.

✔️고오오오오!

✔️리켈이 차분히 호흡하며 단전의 오러를 절반 이상 끌어 올렸다.

✔️“이것도 한번 막아 봐라!”

✔️좌측으로 뛰어들어 검을 내리쳤다. 더욱 빠르고, 강맹해진 검격이 버렌의 허리를 노렸다.

✔️“흐읍!”

✔️버렌은 조금 전과 격이 달라진 검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았다. 옆으로 살짝 물러선 뒤 차가운 바람이 이는 검격을 쏘아냈다.

✔️쩌어어엉!

✔️검술의 위력은 호각. 버렌은 조금도 밀려나지 않은 채 리켈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리켈이 턱을 떨었다. 오러를 6할 이상 끌어냈음에도 버렌이라는 놈은 밀려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미안하지만….”

✔️버렌의 입에서 탁한 연기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절대 져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특히 당신들한테는….”

✔️그가 이를 바득 갈고서 뛰어들었다.

✔️“건방진 자식!”

✔️리켈이 오러를 전력으로 끌어내며 검을 내질렀다. 은빛 칼날이 물결치며 강대한 검기의 파도를 일으켰다.

✔️‘이건 못 막을 거다!’

✔️적이 회피하거나 방어할수록 그 힘과 변화가 강해지는 백파검의 절기였다. 다음 상대를 위해 아껴둔 초식이지만, 지금은 가릴 때가 아니었다.

✔️“이제 끝… 어?”

✔️리켈이 눈을 부릅떴다. 버렌은 피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강대한 검기를 뚫고 돌진했다.

✔️“어, 어떻게 검술의 파훼법을!”

✔️“파훼법? 그딴 건 몰라!”

✔️버렌의 입술에서 광기에 찬 기합이 터져 나왔다.

✔️“지면 죽는단 말이다!”

✔️그와 함께 검이 떨어져 내린다.

✔️콰아아아앙!

✔️그의 검에 실린 어마어마한 의지와 기운이 리켈의 절기를 깨부수고 그의 어깨에 박혔다.

✔️“끄헉!”

✔️리켈이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검을 놓친 그는 파도를 맞은 돛단배처럼 흔들리는 눈빛으로 버렌을 올려보았다.

✔️“어. 어어?”

✔️“리켈이 졌어….”

✔️“이, 이게 말이 돼?”

✔️“나이 차이가 한두 살 나는 것도 아니고!”

✔️“뭐, 이런….”

✔️관객들은 상상도 못 한 장면을 목격하고 턱을 파르르 떨었다. 쩍 벌어진 그들의 눈동자는 버렌만을 바라보았다.

✔️“너, 너는 대체….”

✔️리켈이 손을 떨며 버렌을 불렀지만, 그는 본인의 손만을 바라보았다.

✔️‘뭐야. 이게….’

✔️라온의 훈련을 받다가 죽기 싫어서 광기에 휩싸인 채로 검을 휘둘렀을 뿐인데, 어느새 리켈이 쓰러져 있었다.

✔️‘내가 어떻게 이긴 거지?’

✔️리켈은 꽤나 이름을 알린 검사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승 후보는 아니지만 8강까지는 가볍게 갈 사람이라 여겨졌던 사람을 너무 쉽게 꺾어버렸다.

✔️“버, 버렌 지그하르트의 승리!”

✔️사회자의 승리 선언을 들으며 버렌은 뒤를 돌아보았다. 라온이 잘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너 또 우리한테 뭐한 거야!’

✔️이 마왕 자식아!

✔️*     *      *

✔️콰아아앙!

✔️마르타는 버렌과 달리 처음부터 상대에게 달려들어 검격을 내리쳤다. 야수연맹보다도 사나운 공격에 방어로는 제일이라는 발카르의 기사가 갑옷이 찢긴 채 바닥을 굴렀다.

✔️“이걸로 10전 10승인가.”

✔️마르타까지 승리한다면 광풍단은 10번의 대결에서 10번 모두 승리한 격이 되었다. 지금까지 전부 승리한 건 광풍단이 유일했다.

✔️“이거 맞아?”

✔️“과, 광풍단이 이렇게 셌다고?”

✔️“아직 어린 애들인데 어떻게….”

✔️“이, 이런 말이 좀 그렇지만 지그하르트 검사들 미친개 같지 않아?”

✔️“그러니까. 광풍이 아니라, 광견….”

✔️관객들은 이제 헉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입술을 떨고 있었다.

✔️-흐음.

✔️라스가 기사의 흉갑을 갈라버린 마르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본래 수련과 싸움을 통해 성장한 힘은 바로 실력으로 전환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의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다가 천천히 떠오르지.

✔️‘맞아. 무력의 성장 방식은 계단형이니까.’

✔️라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처럼 능력치가 있는 게 아니라면 대부분 무인들의 성장은 계단형이다. 바로바로 오르는 게 아니라, 적응하는 시간이 있어야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네놈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계단에 억지로 석고를 발라서 끌어올렸다. 다른 사람들은 알면서도 하기 힘든 일인데, 이 지독한 놈….

✔️‘내가 지독한 게 아니라, 애들이 잘 따라와 준 덕분이지.’

✔️실력을 끌어내는 건 교관만 독하다고 되는 게 아니다. 광풍단 검사들 모두가 따라와 주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잘 따라와? 다 죽을 뻔했는데?

✔️라스가 턱을 떨며 아직 대련장에 있는 마르타를 보았다.

✔️-소고기 소녀가 원래 사납기는 하지만 저 정도는 아니었다! 저게 광견이지 인간이냐고!

✔️녀석의 말에 대련장을 보았다. 승리했음에도 마르타의 검은 눈동자는 여전히 샛노랗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딱 좋네.’

✔️라온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인간에게는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거든.’

✔️-약간?

✔️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건 약간이 아니라, 그냥 광녀가 아니더냐!

✔️*     *      *

✔️오웬 왕궁 최상층.

✔️본래 왕실에 관련된 중요 안건을 논하는 회의장에 다섯 명의 초월자가 모였다.

✔️“오늘 4강까지 진행된다고 했던가?”

✔️영화의 대마법사 체임버가 본인의 적발을 손가락으로 배배 꼬며 입맛을 다셨다.

✔️“예. 내일 준결승과 결승이 진행될 겁니다. 저희도 그곳에 있겠지요.”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투 따위 해봐야 의미 없는 일이다. 익스퍼트고 마스터고 가릴 것 없이 전부 우리 애들이 전부 올라가 있겠군.”

✔️야왕 오그람이 테이블 위에 있던 술잔을 단숨에 피운 뒤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리 쉽지 않을 거요. 다른 이들이라고 놀고 있던 게 아니니까.”

✔️레크로스 국왕이 가볍게 손을 저었다. 그의 눈빛에서도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너희 옛날부터 우리 밥집이었잖아.”

✔️체임버가 오그람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도 탈탈 털리는 거 아니야?”

✔️“그 주둥아리 닫아라.”

✔️오그람이 손에 쥐고 있던 술잔을 가루로 만들고서 눈을 부라렸다.

✔️“저희 검사들도 쉽게 밀리지는 않을 겁니다.”

✔️데루스가 옅은 미소를 짓고서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렸다.

✔️“최근에 깨달음을 얻은 친구들이 좀 있거든요.”

✔️“깨달음? 어설픈 깨달음으로 찌르는 꼬챙이 따위는 단련된 육체를 뚫어내지 못해.”

✔️오그람이 데루스를 보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 잘난 육체는 매번 우리 마법에 뚫리더만.”

✔️체임버가 오그람을 보며 킥킥 웃었다.

✔️“너는 닥치라고!”

✔️상성 상 밀리는 건 사실인지 오그람은 체임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죠.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마스터 결투에서는 자신 있습니다.”

✔️데루스의 바다처럼 맑은 눈동자에 확연한 신뢰가 비쳤다.

✔️“파랑검을 말하는 것이겠구려. 확실히 그의 성장은 눈이 부셨지. 다만….”

✔️레크로스 국왕이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보리니 키튼 경도 새로운 경지에 올랐소. 그 둘이 붙는다면 재밌는 대결이 되겠소.”

✔️“흥. 그 꼬맹이들은 나름 괜찮더군. 하지만 가로나의 손에 잡힌다면 걸레가 쥐어짜이듯 사지가 분질러질 거다. 놈은 드레이크를 맨손으로 찢어버렸으니까.”

✔️오그람도 자신 있다며 솥뚜껑만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나이를 먹어도 똑같네. 다들 질리지도 않나.”

✔️체임버가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침묵을 유지하는 글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는 어때? 광풍단이라고 하던가? 그 아이들이 어디까지 올라갈 거라 생각해?”

✔️“…….”

✔️글렌은 관심 없다는 듯 대답하지 않고 턱을 괸 채 가만히 있었다.

✔️“하여튼 재미없다니까.”

✔️체임버가 짧게 혀를 차고 고개를 돌렸다.

✔️“당연하겠지. 승산이 없다는 건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테니까.”

✔️오그람이 글렌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흘렸다.

✔️“마스터 결투에 나가는 라온이라는 아이도 납치당했던 녀석이잖아. 무인이 납치라니 나라면 혀 깨물고 죽었다. 4강에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단 꼬마는 하나도 없겠어. 생긴 것들도 어리숙하잖아.”

✔️“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멀린과 10사도라면 누구도 빠져나가기 쉽지 않아요.”

✔️데루스는 글렌의 편을 들어주며 입맛을 다셨다.

✔️“물론 지금의 설화검협이 4강에 오르기는 조금 힘든 것도 사실이지요. 몇 년 뒤라면 모르겠지만….”

✔️“커흠, 제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대결에 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십시다.”

✔️레크로스 국왕이 손을 저으며 뒤쪽을 보았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들이 서류를 가지고 와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4강? 개소리들을 하는군.”

✔️육황의 수장들 앞에 서류들이 놓이고, 시종들이 모두 떠났을 때 글렌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라온과 광풍단은 나이를 초월하는 경험을 쌓았다. 한 번의 패배를 경험한 아이들의 의지는 이전보다 더 두껍게 타오르고 있지.”

✔️살기가 담긴 듯한 그의 서늘한 목소리에 다른 수장들의 입이 꾹 다물렸다.

✔️“무력으로도, 정신으로도 절대 밀리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글렌의 섬뜩한 시선에 수장들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우리 아이들이 가장 귀엽다.”

✔️“…?”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𝟖
✔️제318화

✔️왕실 회의장에 잠시 침묵이 내려앉았다. 육황의 수장들도, 그들의 뒤에 선 보좌진도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글렌만을 바라보았다.

✔️“그….”

✔️10초가량 지났을 때 처음으로 체임버의 입술이 열렸다.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아저씨 입에서 지금 귀엽다는 말이 나온 거 맞냐고.”

✔️그녀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허허, 북멸왕께서 그런 말을 하실 줄은 저도 몰랐군요.”

✔️레카르트 국왕이 헛웃음을 흘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크하하하하! 영감. 그사이에 노망이라도 난 건가? 귀엽다? 무인들의 세계에 귀여운 것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텐데?”

✔️오그람이 이마를 부여잡고 광소를 터트렸다. 그는 글렌의 기파에 잠시라도 눌렸다는 게 자존심 상했던지 회의장이 흔들릴 정도로 웃음소리를 높였다.

✔️“음, 혹시….”

✔️데루스는 바로 반응하지 않고, 조금 더 침묵하다가 입을 열었다.

✔️“야왕께서 광풍단에게 생긴 것들도 어리숙하다고 말해서 귀엽다고 하신 겁니까?”

✔️그는 글렌이 기세를 일으키기 전에 야왕이 뱉었던 말을 떠올리며 눈매를 좁혔다.

✔️“아!”

✔️체임버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네. 저 근육 돼지가 그런 말을 하긴 했지.”

✔️그녀는 피식 웃으며 오그람을 흘겨보았다.

✔️“솔직히 풍선처럼 살집만 키운 그쪽 애들보다는 광풍단 아가들이 귀엽긴 해.”

✔️“그 주둥아리 닫으라고 말했을 텐데?”

✔️오그람이 체임버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내 주둥아리로 떠드는데 왜 네가 지랄이니?”

✔️체임버는 지지 않고 오그람의 시선에 맞섰다.

✔️“허허, 그런 뜻이었군요. 확실히 광풍단 검사들의 외모는 빛이 나더군요. 특히 라온 그 아이는 지금까지 본 사람 중 손에 꼽을만한 미남이었습니다.”

✔️레크로스 국왕이 오그람과 체임버 사이를 막아서며 미소를 지었다.

✔️“연회장에서도 확실하게 눈에 띄었지. 엘프보다 잘생긴 인간은 흔치 않은데, 대단하긴 해.”

✔️체임버가 레크로스 국왕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크흠….”

✔️글렌은 회의장을 뒤덮던 패기를 갈무리하고서 입을 가린 채 헛기침을 했다.

✔️“얼굴? 말했듯이 무인에게 중요한 건 얼굴이 아니라, 무력이다. 그것도 압도적으로 심플한 폭력이 진짜지.”

✔️오그람이 테이블 위에서 주먹을 말아쥐었다. 가볍게 힘을 준 것만으로 왕궁이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렸다.

✔️“아까부터 시끄럽게 주절대는군.”

✔️글렌이 오그람을 굽어보며 차게 웃었다.

✔️“네놈이 부르짖는 힘도 우리 아이들이 패션근육만 키운 네놈의 아이들보다 강하다.”

✔️그는 광풍단이 야수연맹의 무인들을 이길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까하하하하!”

✔️체임버가 테이블 위에서 발장구를 치며 폭소를 터트렸다.

✔️“패션근육이래! 패션근육! 그 말이 맞네. 크기만 할 뿐이잖아! 아저씨 못 본 사이에 왜 이렇게 재밌어진 거야!”

✔️“그게… 크훕!”

✔️체임버를 말리려던 레크로스 국왕도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을 틀어막았다.

✔️“후우.”

✔️글렌의 뒤에 서 있는 셰릴은 테이블 위에서 돌아가는 판을 보고 옅은 숨을 뱉었다.

✔️‘이분들이 육황의 수장이라는 걸 누가 믿을까.’

✔️서로를 놀리고 조롱하는 데 거침이 없다. 모르는 사람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초월자들이 아니라, 평범한 동네의 아저씨, 아줌마들의 수다판을 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역시 가주님은 라온과 닮았군.’

✔️예전에 라온도 힘을 자랑하는 천검대 부대주인 에컨에게 패션근육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조손 사이에는 통하는 게 있는 모양이다.

✔️“영감.”

✔️오그람이 눈을 부라리며 글렌을 노려보았다. 끝을 모를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 이글거리며 타올랐다.

✔️“그렇게 자신 있으면 나와 개인적인 내기 하나 하지.”

✔️“내기?”

✔️“그래. 광풍단인지, 광견단인지를 믿는다고 했으니 결투의 승자를 걸고 내기를 해보자고.”

✔️그는 그리 말하며 품에서 작은 목제 상자 하나를 내려놓았다.

✔️“우리 부족의 비법으로 만든 영약 사운환이다. 오러는 물론이고, 체격마저 키워주는 효과가 있지. 댁들의 수준으로 따지자면 최상급 영약이다.”

✔️“좋다.”

✔️글렌은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허리에 차고 있던 진천검을 풀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거, 검을?”

✔️“그거 진천검이잖아!”

✔️“미친….”

✔️“허!”

✔️레크로스 국왕과 체임버, 데루스 그리고 오그람이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진천검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허억!”

✔️“검이라니….”

✔️목각인형처럼 서 있던 각 세력의 보좌진들도 깜짝 놀라서 눈을 부릅떴다.

✔️“…….”

✔️셰릴과 로엔은 글렌을 완벽하게 신뢰하고 있기에 뒷짐을 진 채로 어떠한 반응도 하지 않았다.

✔️“아, 아저씨. 정말 그걸 걸 거야? 가치가 비교가 안 되잖아.”

✔️체임버가 내리라고 말해도 글렌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있다면 이 정도는 걸어야지. 영약? 본인의 그릇이 작은 것만 자랑하는 꼴이지.”

✔️글렌이 당황한 오그람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는 라온과 광풍단의 승리를 확신하는 눈빛을 빛냈다.

✔️“끄으윽….”

✔️오그람이 입술을 꾹 깨물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좋다!”

✔️그가 우락부락한 상체를 휘감고 있던 코트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 검에 맞추려면 영약으로는 무리겠지. 만약 영감의 손자가 결투에서 우승한다면 이 코트와 함께 아이들의 숫자에 맞춰서 영약을 넘겨주도록 하지.”

✔️“한참 부족하지만, 받아들이지.”

✔️글렌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와아, 나도 참여해도 돼? 나도 할래! 나 이런 거 좋아!”

✔️“넌 좀 빠져!”

✔️체임버가 본인을 끼워달라고 테이블 위에 본인의 지팡이를 던졌지만, 두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자, 이제 회의 좀 하죠. 저희가 모인 이유를 상기해주시길.”

✔️레크로스 국왕이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리며 서류를 넘겼다.

✔️“…….”

✔️데루스는 내기가 성사될 때까지 어떠한 말도 하지 않고, 가라앉은 눈동자로 글렌만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     *      *

✔️캬아아앙!

✔️검과 검이 부딪치는 거친 충격음이 울리고 루난과 오웬의 기사가 대련장의 중심에서 다섯 걸음씩 물러섰다.

✔️“흥!”

✔️제나라는 이름을 밝힌 기사는 질풍처럼 돌진해 루난의 좌측 허리를 향해 검을 내질렀다. 날카로운 검세가 섬전처럼 파고들었다.

✔️‘허리.’

✔️루난은 어깨와 복부를 노리는 검극을 보며 눈을 꿈뻑였다.

✔️‘라온보다 느려.’

✔️수련을 할 때 라온의 검은 섬뜩할 정도의 속도와 위력으로 빈틈을 찔러 들어왔다. 빈틈을 찌르는 게 아니라 깨부수는 느낌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공격에 비하면 제나의 공격은 나뭇가지정도로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쩌어엉!

✔️루난이 자세를 살짝 낮추고 설화를 내리쳤다. 푸른 서리가 스며든 칼날이 제나의 검격을 가볍게 쳐냈다.

✔️“제법이지만! 지금부터가 진짜야!”

✔️제나가 차디찬 미소를 지으며 재차 달려들어 검을 내리쳤다. 도도한 흐름을 담은 검격이 강물처럼 이어졌다.

✔️“나도.”

✔️루난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서리를 일으켰다.

✔️“나도 그래.”

✔️그녀는 가볍게 바닥을 박차며 제나에게 돌진했다. 찔러오는 검보다 더 빠르게 나아가 설화를 내리그었다.

✔️쩌저저저정!

✔️두 여성은 다채로운 검격을 쏟아부으며 살벌할 정도의 기세로 서로의 빈틈을 노렸다. 처음에는 제나가 압도하는 듯했지만, 루난이 달빛을 그린 듯한 검술을 펼치자 점차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아직 멀었…어?”

✔️루난에 검격에 튕겨 나갔던 제나가 다시 황소처럼 달려들려다가 우뚝 멈춰 섰다.

✔️“서리?”

✔️그녀의 갑옷과 부츠는 전부 얼어붙은 채 바닥에 달라붙어 있었다. 갑옷과 부츠만이 아니라, 손과 발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 어느새….”

✔️“처음부터.”

✔️루난은 검에서 피어나는 서리를 지우고서 눈을 깜빡였다.

✔️“이익….”

✔️제나가 억지로라도 움직이려 했지만, 갑옷과 몸만이 아니라, 내부도 냉기가 차올라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져, 졌다.”

✔️그녀는 유일하게 움직이는 왼손을 들어 패배를 선언했다.

✔️“수고했어요.”

✔️루난은 고개를 꾸벅이고서 제나에게 다가가 그녀를 묶고 있는 냉기를 지워주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루난! 루난! 루난!”

✔️“청월검!”

✔️“또 이겼어!”

✔️“지그하르트 진짜 미쳤는데? 자기들끼리 만나는 게 아니면 지질 않아.”

✔️“광풍단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대련 전까지만 해도 지그하르트를 무시하던 관객들은 루난의 승리에 목이 터질 정도의 환호를 보냈다.

✔️“그, 근데 좀 무섭지 않냐?”

✔️“그니까. 다들 싸움꾼이야. 물러서질 않잖아.”

✔️“싸움꾼이라기보다는 개 아니냐? 미친개.”

✔️“광풍이 아니라, 광견이라….”

✔️“난 그게 더 좋은데, 시원시원하잖아.”

✔️리메르가 걱정하던 것 이상으로 광풍단의 광견화는 관객 사이에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다만 모두가 무투를 좋아하기에 싫어하기보다는 더 좋아했다.

✔️“수고했어.”

✔️라온은 승리하고 내려온 루난에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응. 근데 라온….”

✔️루난이 쫄래쫄래 다가와서 눈동자를 내렸다.

✔️“이제 집중력 강화 훈련 안 해도 되지?”

✔️“아니.”

✔️라온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의 상대가 다 너보다 약해서 아직은 잘 모르겠네.”

✔️아직 멀었다고 하자, 루난의 인상이 아주 조금 구겨졌다.

✔️“진짜 못생겼어….”

✔️“응 알아.”

✔️엔시아 때문인지 루난은 외모에 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외모에 큰 관심이 없기에 라온에겐 아무 의미도 없는 공격이었다.

✔️“흥.”

✔️루난은 콧잔등을 찡그리고서 광풍단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라온은 루난의 등을 보다가 관객석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제 8강인데….’

✔️이 인간은 어디서 뭘 하는 거지?

✔️글렌을 보좌하는 셰릴, 로엔과 달리 이곳에 있어야 할 리메르는 나타나지 않았다. 단을 놔두고 어디에서 뭘 하는 건지 참으로 이해가 안 갔다.

✔️“이야! 땄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있을 때 관중석 쪽에서 익숙한 목소리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저기 있구나….

✔️‘저기 있네.’

✔️라스도 관객석에 리메르가 있다는 걸 알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저런 놈은 교육이 필요하느니라. 본왕이…아.

✔️녀석이 주먹을 들어올리다가 멈춰섰다.

✔️-네, 네놈이 더 잘하겠군….

✔️라스는 인간의 탈을 벗은 채 훈련했던 광풍단을 떠올리며 손을 축 내렸다. 녀석은 Demon Lord보다 사악한 인간이라며 턱을 떨었다.

✔️‘걱정하지 마. 내가 저 인간보다 위에 올라가는 순간 죽일… 아니, 교육시킬 테니까.’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관객석에 있는 리메르를 노려보았다.

✔️‘그럼 다음으로….’

✔️라온이 시선을 돌려서 허공에 떠 있는 대진표를 보았다.

✔️‘다들 잘하고 있네.’

✔️광풍단은 동료 검사끼리 만나거나, 확실히 실력 차이가 나는 경우가 아니라면 지지 않았다. 8강에 벌써 버렌, 루난, 크레인 3명이나 올라가 있었고, 곧 마르타도 올라갈 것이다.

✔️‘8강 8명 중 4명이라….’

✔️4강에 올라가는 건 두 명이겠네.

✔️아쉽게도 루난과 버렌이 붙게 되었고, 크레인은 삼왕자와 만나게 되어 떨어질 것이다. 결국 4강에 올라가는 건 루난과 버렌 중 한 명과 마르타 뿐이었다.

✔️‘물러나라고 할까?’

✔️확실한 우승을 위해 둘 중 하나를 뺄까 고민하며 뒤를 돌았다. 버렌과 루난은 상대에게 집중하기 위해 집중력을 갈고 닦고 있었다.

✔️‘그럴 필요 없겠군.

✔️이번 대련 결투는 단순히 이기는 게 전부가 아니다. 검사들의 실력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기에 일부러 힘을 빼라는 명령 따위는 필요 없었다.

✔️‘이제 나도 준비를 좀 해야겠네.’

✔️오늘 진행되는 건 8강까지다. 준결승인 4강부터는 내일 진행되기에 이제 마스터급 대련 준비를 해야 했다.

✔️라온은 대진표 아래에 선 심판복 차림의 남성을 보고 눈매를 좁혔다.

✔️‘마티오.’

✔️데루스는 본격적으로 자신을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는지 마티오를 심판으로 보내놨다. 그는 은밀한 시선으로 대련장이 아니라, 자신을 더 살피고 있었다.

✔️‘위험한 건 저놈만이 아니야.’

✔️타천. 멀린이 말해줬듯이 타천이 자신을 노리고 있다. 내일 진행될 준결승과 결승에는 육황의 수장들이 오기에 놈이 공격할 순간은 오늘뿐이었다.

✔️이곳에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육황의 미래들도 있으니 놈은 분명 오늘을 노릴 것이다.

✔️‘아 잠깐.’

✔️라온이 하늘에서 시선을 내려 심판이 된 마티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내가 타천이 공격할 순간을 결정하면 되잖아.’

✔️타천은 분명 빈틈을 노릴 테니까. 일부러 빈틈을 만들어서 놈의 공격을 유도하는 방법도 있었다.

✔️라온은 제천검의 검병을 말아쥐며 들뜬 미소를 흘렸다.

✔️‘귀찮은 것들을 한 번에 날려버릴 수 있겠군.’

✔️*     *      *

✔️짧은 휴식 시간 뒤에 새로운 사회자가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익스퍼트급 8강을 진행하겠습니다!”

✔️가라앉은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서인지 그는 이전 사회자보다 조금 더 밝은 목소리로 함성을 질렀다.

✔️“아쉽게도 발카르의 리키 라론 경이 기권을 했기에 마르타 지그하르트 검사님은 바로 4강에 진출했습니다.”

✔️마르타의 상대였던 발카르의 기사가 부상으로 물러나면서 그녀는 자동으로 4강에 올라갔다.

✔️“제기랄! 도망치다니!”

✔️마르타는 싸우지도 못하고 4강에 올라간 게 분했는지 바득 이를 갈았다.

✔️“무인이면 여기서 뒤지라고!”

✔️그녀는 의무실에서 기절해 있을 리키 라론을 욕하며 발을 굴렀다.

✔️“그럼 첫 번째 시합을 시작하겠습니다. 어우! 이거 겹쳤네요! 지그하르트의 버렌 검사와 지그하르트의 루난 검사!”

✔️사회자의 외침에 버렌과 루난이 각자 좌측과 우측에서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넌 누가 이길 거 같아?”

✔️마르타가 라온에게 다가가며 눈매를 좁혔다.

✔️“글쎄….”

✔️라온이 강렬한 버렌의 눈빛과 잔잔한 루난의 눈동자를 보며 옅은 숨을 뱉었다.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지.”

✔️리메르와 자신을 제외한다면 광풍단에서 가장 강한 건 누가 뭐라고 해도 마르타다.

✔️하지만 그 아래인 버렌과 루난의 승패는 확실하게 결정되지 않았다. 훈련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쪽이 우위를 점한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재미없겠네. 광견이라고 해도 동료는 알아볼 거 아니야.”

✔️“그러게. 광기 넘치는 지그하르트라고 해도 4강이 눈앞이니까. 한쪽이 양보하겠지.”

✔️“버렌 쪽이 올라가려나? 말도 안 되게 빠르던데?”

✔️“루난도 뒤지지 않아. 서리로 움직임을 막는 건 이미 달인의 경지라고!”

✔️관객들은 지그하르트끼리의 대결이고, 4강이 코앞이기에 두 사람이 전력을 다해 싸우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멍청한 것들.”

✔️마르타가 관객들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눈앞의 싸움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 멍청이는 지그하르트와 광풍단의 이름을 달 자격이 없다고! 안 그래?”

✔️“그럼요!”

✔️“물론이죠!”

✔️광풍단 검사들이 마르타의 말에 동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라온이 뒤를 돌아 광풍단 검사들의 눈을 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당연히 전력을 다해 싸워야 한다는 듯한 확신이 피어나고 있었다.

✔️‘잘들 컸네.’

✔️아직 무학은 미숙하지만, 저들의 정신은 무인으로서 한 단계 발전해 있었다. 만족스러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럼 8강 첫 번째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가 대련장 아래로 내려와서 손을 들어 올렸다.

✔️터엉!

✔️그 손이 하늘을 가리키기 전에 버렌과 루난이 동시에 움직였다.

✔️쩌어어어엉!

✔️대련장 중심에서 강대한 검격이 맞부딪치며 허공으로 차디찬 바람이 치솟았다. 대련장 주변으로 푸른 서리가 쏟아져 내렸다.

✔️쩌저저적!

✔️두 사람은 근거리에서 다시 검격을 내질렀다. 쏟아져 내리는 바람의 칼날과 치솟아 오르는 서리의 칼날이 경합하며 장대한 청광이 펼쳐졌다.

✔️“크으으으!”

✔️“흐읍!”

✔️버렌과 루난은 같은 지그하르트르가 아니라 생사대적을 만난 것처럼 지금까지 쌓아둔 무력을 그대로 펼쳐냈다.

✔️콰아아아아앙!

✔️바람과 서리가 끝없이 맞물리며 대련장 위로 시퍼런 폭풍이 뻗어 나왔다.

✔️“뭐, 뭐야 이게….”

✔️“저 둘 같은 편이잖아!”

✔️“왜 전력을 다하는 건데! 내일 바로 4강이라고!”

✔️“전력을 다하는 정도가 아니라 서로 죽이려고 드, 드는데?”

✔️“상대만 있으면 물어 뜯는 거야?”

✔️“지, 진짜 광견이야….”

✔️관객들은 거리낌없이 서로의 급소를 향해 검을 지르는 버렌과 루난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4강이라는 결전을 앞두고 같은 세력을 향해 저 정도로 진심을 다할 줄은 몰랐기에 모두가 경악하고 있었다.

✔️쩌저저저정!

✔️루난과 버렌은 주변에서 뭐라고 떠들든 검을 휘두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서로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거리에서 그 숨통을 노리는 검격을 쏟아냈다.

✔️후우우웅!

✔️공간을 지배하는 서리의 둔검을 삭풍이 가르고, 대기를 찢어발기는 풍검의 포효를 차디찬 냉기가 짓누른다.

✔️상성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휘두르는 검격에 승리의 의지가 담겨 있었다. 둘은 전력을 다해 싸우며 더 높은 경지로 올라가고 있었다.

✔️캬아아앙!

✔️한참이나 부딪치던 버렌과 루난이 동시에 튕겨 나와 대련장의 끝에 섰다.

✔️“후욱….”

✔️“하아아….”

✔️꽤 지쳤는지 숨이 거칠어져 있었지만, 두 사람의 눈동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훈련생 시절부터 널 꺾고 싶었다.”

✔️버렌이 어금니를 지그시 깨물며 검을 세웠다. 은빛 칼날 위로 북해를 지배하는 날카로운 삭풍이 치솟았다.

✔️“여기서 승부를 내자.”

✔️“내가 이길 거야.”

✔️루난이 고개를 꾸벅이고서 설화를 두 손으로 잡고 활을 쏘듯이 뒤로 젖혔다. 푸른 서리가 달빛처럼 이지러지며 장대한 기파를 일으켰다.

✔️고오오오오오!

✔️두 사람의 기파가 상승할수록 관객석도 고요해졌다. 도서관이라도 된 듯 침묵이 내려 앉았을 때 긴장한 관객이 들고 있던 맥주잔을 떨어뜨렸다.

✔️타아악!

✔️낡은 맥주잔이 산산조각으로 깨진 순간 버렌과 루난이 동시에 땅을 박찼다.

✔️치이이이잉!

✔️버렌의 검에서 북해를 가르는 삭풍이 타올랐고, 루난의 검에서 대륙을 얼릴 듯한 달빛이 명멸했다.

✔️쿠와아아아앙!

✔️두 종류의 강대한 검기가 격돌하며 대련장이 사정없이 갈라지고, 하늘 위로 강대한 기의 파동이 솟구쳤다.

✔️후우우우.

✔️서리와 바람이 뒤섞인 폭풍이 가라앉은 뒤 대련장의 모습이 드러났다. 루난과 버렌은 대련장 중심에서 쓰러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그 거대한 힘의 충격을 견디면서도 끝까지 검을 휘둘렀던 것 같았다.

✔️“후….”

✔️라온은 불의 고리를 운용하여 두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고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부상은 아니로군.’

✔️둘 다 오러를 극한까지 짜내서 탈진한 상태였다. 심각하거나 큰 부상은 없었다.

✔️“버, 버렌. 루난. 시합 불가능! 스, 승자는 없습니다!”

✔️사회자는 믿을 수 없는 상황에게 마른침을 삼키고서 둘을 모두 탈락시켰다.

✔️“드, 들것! 바로 올라와주세요!”

✔️대기하고 있던 치료사들이 두 사람을 데리고 의무대로 향했다.

✔️“오오….”

✔️“우오오오오오오!”

✔️“미쳤다! 진짜!”

✔️“같은 세력 맞냐고! 쟤들 왜 이렇게 싸움에 미쳐 있는 건데!”

✔️“지그하르트! 지그하르트!”

✔️“광풍단! 광풍단!”

✔️처음 지그하르트를 무시하고 업신 여겼던 구경꾼들은 광풍단 검사들의 강대한 무력과 상대를 가리지 않는 투쟁심을 보고 목이 터져라 환호를 질렀다.

✔️16강전부터 관객석에서 가장 큰 함성이 나오는 세력은 당연 지그하르트였다.

✔️“청월검! 청월검!”

✔️“선풍검! 선풍검!”

✔️관객들은 루난과 버렌에게 각자 청월과 선풍이라는 이명을 붙인 채 기절한 그들이 들릴 정도의 환호를 터트렸다.

✔️“허어!”

✔️“미친놈들인가?”

✔️“왜 같은 편끼리 저렇게까지….”

✔️“진짜 광견이야….”

✔️다른 세력의 무인들도 지그하르트 검사들을 보며 질렸다는 듯 눈동자를 떨었다.

✔️‘저놈도 당황한 모양이네.’

✔️어색한 표정이 된 마티오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많이 구경하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심판을 보는 건 오늘이 마지막일 테니까.

✔️-저걸 치우겠다고? 여기에서?

✔️라스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매를 좁혔다.

✔️‘그래. 죽이지는 못하겠지만, 치울 수는 있어.’

✔️-대체 어떻게?

✔️‘이독제독.’

✔️라온은 푸른 하늘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독은 독으로 치워야지.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𝟏𝟗
✔️제319화

✔️쿠우웅!

✔️들소만 한 체구를 자랑하던 야수연맹의 무인이 까맣게 그을린 채 쓰러지고, 맞은 편에 선 제이나 왕녀가 찬웃음을 흘리며 턱을 치켜들었다.

✔️“익스퍼트 급 4강의 마지막 자리는 발카르 왕국의 제이나 왕녀님이 차지합니다!”

✔️사회자가 대련장으로 올라오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우오오오오오!”

✔️“왕녀님!”

✔️“제이나 왕녀님! 나 죽어요!”

✔️“역시 야수연맹의 상성은 발카르네!”

✔️“저 괴물을 저리 쉽게 쓰러뜨리다니, 미모, 실력 뭐 하나 뒤지는 게 없으시다니까!”

✔️관객들은 제이나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대련장이 떠나가라 환호성을 질렀다.

✔️“이걸로 익스퍼트 급 4강의 자리가 모두 채워졌습니다! 한 자리는 아쉽게도 공석이지만, 그 아쉬움 이상으로 박진감 넘치는 대결을 보았으니 만족하셨을 겁니다!”

✔️사회자는 투혼 넘치는 싸움을 보여주었던 버렌과 루난의 결투를 다시 꺼내고서 내일을 기대하라 말했다.

✔️“흠.”

✔️라온은 대진표를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이렇게 되었군.’

✔️4강의 첫 번째 자리는 비었고, 두 번째는 오웬의 삼왕자 그리어, 세 번째는 마르타. 그리고 마지막이 제이나였다.

✔️지그하르트 검사가 4강의 두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지만, 아쉽지는 않았다. 결국 승자는 마르타가 될 테니까.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대련장에서 환호를 즐기는 제이나를 바라보았다.

✔️“윽!”

✔️그녀는 이쪽의 시선을 느끼자마자 어깨를 부르르 떨고서 황급히 대련장을 내려갔다.

✔️-흐음.

✔️라스가 제이나의 등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싸가지. 네놈에게 목줄 잡히지 않았나?

✔️‘맞아. 그래서 저렇게 눈치를 보는 거잖아.’

✔️세 가지 부탁을 들어준다는 특별 계약서에 사인했기에 제이나의 목줄을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거 이용하면 기권도 가능하지 않느냐?

✔️‘가능하지만 그랬다간 마르타가 날 죽일걸?’

✔️마르타는 아집에 가득 차 있을 때도 정정당당한 승부를 벌이고 싶어했다. 제이나 왕녀를 억지로 기권시키면 난리가 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거 안 해도 우승할 수 있어. 너도 알잖아.’

✔️바로 결승에 진출한 삼왕자보다 조금 불리하겠지만, 결국 승자는 마르타가 될 것이다.

✔️-본왕은 그저 소고기 소녀를 조금 더 좋은 상태에서 싸우게 하고 싶었을 뿐이니라.

✔️‘하여튼.’

✔️라온이 피식 웃었다. 부하를 아끼는 마왕이라니, 매번 느끼지만 여러 가지로 신기한 놈이다.

✔️“이걸로 오늘 진행될 익스퍼트급 결투는 모두 끝났습니다. 하지만 아쉬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로 마스터급 결투가 시작되니까요!”

✔️사회자가 하늘로 손을 뻗자, 마법사들이 허공에 마나의 선을 그려 마스터급 대진표를 만들었다.

✔️128강이었던 익스퍼트급 대진표와 달리 마스터급은 16강밖에 되지 않았다.

✔️아니, 16명도 대단한 숫자다.

✔️단순히 마스터가 아니라, 마흔이 넘지 않은 젊은 나이의 마스터들만 16명이 모였다는 뜻이니, 육황이라는 거대 단체가 모이지 않았다면 절대 나오지 않았을 숫자였다.

✔️“우오오오오오!”

✔️“파랑검! 파랑검!”

✔️“창첨검! 창첨검!”

✔️“이대로면 둘이 결승에서 붙겠는데?”

✔️“무슨 헛소리야! 용을 찢어버린 가로나가 있는데!”

✔️“흑현갑 마티스 안 보여? 저 남자에게 어설픈 검술을 펼쳤다간 그대로 부러진다고!”

✔️관객들은 각자 본인들이 생각하는 우승자를 말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온 지그하르트도 괜찮아 보이지 않아?”

✔️“그러게. 익스퍼트 급에서 싸우던 지그하르트 애들을 보니까. 설화검협도 장난 아닐 거 같은데.”

✔️“에이! 그건 아니지! 익스퍼트랑 마스터가 같냐?”

✔️“맞아. 설화검협은 납치당하고, 공주님처럼 구출 받았잖아!”

✔️“납치를 떠나서 실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아래야.”

✔️소수의 관중들이 라온도 우승 후보라고 말했지만, 다른 이들의 이름값에 묻혀서 금세 잠잠해졌다.

✔️라온은 그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고, 대진표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첫 상대는 발카르의 흑현갑 마티스인가.’

✔️마티스는 갑옷이라는 이명답게 방어의 스페셜 리스트로 그가 호위한 마법사들은 지금까지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는 전설을 가진 기사였다.

✔️‘다음은 보리니 키튼이겠군.’

✔️16강에서 흑현갑을 꺾은 뒤 바로 다음에 만나는 상대는 우승 후보라 불리는 오웬 왕국의 보리니 키튼이었다.

✔️보리니 키튼을 꺾은 뒤에 내일 준결승에서는 참룡수 가로나, 결승에서는 파랑검 카디스 로베르트와 싸우게 될 것 같았다.

✔️‘강자들이 앞쪽에 모였어.’

✔️이름난 강자들 대부분이 앞쪽에 몰려 있어서 뒤에 이름이 박힌 카디스 로베르트는 쉬운 상대를 만나게 되었다.

✔️‘이것도 너희들이 만든 건가?’

✔️우연일 가능성도 분명 있지만, 심판 역할을 하는 마티오를 보니 로베르트 놈들이 건드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앙?”

✔️마르타가 대진표를 보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이거 너한테 너무 불리한 거 아니야?”

✔️그녀는 앞쪽에 몰려 있는 강자들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뒤쪽은 짠 것처럼 한산하잖아.”

✔️“난 오히려 고마운데?”

✔️라온이 다시 대진표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뭐?”

✔️“강자와 골라서 싸울 기회를 주다니, 고마워서 돈이라도 주고 싶을 정도야.”

✔️본래 친목회에 참여하려고 한 이유도 다른 세력의 강자와 붙고 싶었기 때문인데 자연스럽게 강자들과 싸우는 구도가 만들어져서 절로 웃음이 나왔다.

✔️‘오늘 마지막 상대도 딱 좋아.’

✔️보리니 키튼은 지금의 자신도 우습게 볼 수 없는 강자. 타천의 공격을 유도하기에 최고의 상대였다.

✔️“진짜 너란 인간은….”

✔️마르타가 질렸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관객석을 지켜보던 그녀가 입매를 비틀며 고개를 돌렸다.

✔️“근데 좀 이상하지 않아?”

✔️“뭐가?”

✔️“네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 우리야 이름값이 바닥이었지만, 넌 왜 무시를 당하는 거야?”

✔️“멀린한테 납치됐었잖아.”

✔️라온이 어깨를 으쓱였다.

✔️“납치? 시발! 무슨 개소리야! 10사도랑 멀린이 납치하는데 버틸 놈이 여기에 어디 있다고! 저기 대진표에 있는 사람 중에 도망칠 수 있는 놈은 아무도 없어!”

✔️그녀는 대진표를 가리키며 대신 화를 내주었다.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저들이 보는 건 납치를 당했고, 구출을 받았다는 결과뿐이니까.”

✔️마르타의 말대로 이곳의 누구라도 똑같이 납치당했겠지만, 결국 당한 건 자신뿐이다. 여기서 그런 말을 해봐야 의미 없었다.

✔️“그래도 너희 덕분에 내 이름값도 같이 올라갔어.”

✔️라온이 가라앉은 눈으로 대련장을 보았다.

✔️“이제 내 차례야.”

✔️“윽….”

✔️제천검의 검병을 쥐며 차디찬 미소를 흘렸다. 마르타는 본인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가장 높은 곳에 두고 올게.”

✔️*     *      *

✔️“지루해! 회의 지루해!”

✔️체임버가 회의장 테이블 위에서 발장구를 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정말이지. 그 주둥아리는 한시를 쉬질 않는군.”

✔️오그람이 체임버를 노려보며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럼 이런 대책 회의가 재밌을 줄 알았나?”

✔️“오랜만이라 잊고 있었어. 이럴 줄 알았으면 국왕이나 보낼걸.”

✔️체임버는 발카르의 국왕을 심부름하는 아이처럼 말하며 헤헤 웃었다.

✔️“심심한데 결과가 어떻게 됐나 볼까?”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고서 허공에 마나의 선을 이었다.

✔️테이블 위로 대련장에 떠 있던 익스퍼트급 4강 대진표와 이제부터 시작할 마스터 급 대진표가 그려졌다.

✔️“오, 아저씨 손녀랑 우리 공주님이 올라갔네. 너희 셋째는 부전승? 바로 결승이잖아! 행운인데?”

✔️관심 없다는 듯 무시하고 있었지만, 정작 대진표가 떠오르자, 다들 선명해진 눈동자로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이런 빌어먹을!”

✔️“음….”

✔️오그람과 데루스는 익스퍼트급 4강 대진에 야수연맹의 이름이 없다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어? 8강전에서 지그하르트끼리 부딪쳐서 둘 다 탈락한 모양인데?”

✔️체임버는 그 아래의 대진표까지 가져온 뒤 깔깔 웃었다.

✔️“얘들 바보네! 왜 지들끼리 싸워서 양패구상을 하지? 양보하면 되잖아!”

✔️“아니.”

✔️글렌이 고개를 저었다. 그는 만족스러움이 깃든 미소를 지으며 버렌과 루난의 이름을 바라보았다.

✔️“이거면 됐다.”

✔️“흥. 머리에 검만 박힌 검사들은 이해를 못 하겠다니까.”

✔️체임버가 눈을 흘기고서 마스터 급 대진표를 위로 올렸다.

✔️“어? 여기서도 아저씨 손자랑 우리 애랑 붙네!”

✔️그녀는 마티스의 이름을 가리키며 씩 웃었다.

✔️“이걸 어째? 우리 마티스는 이명이 흑현갑인데.”

✔️“흑현갑?”

✔️“검이 아니라 갑. 극강의 강도를 지닌 흑철로 만든 갑옷만큼이나 단단하다는 뜻이지.”

✔️체임버가 마티스 옆에 있는 라온의 이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마티스는 마스터 상급의 검도 버텨냈던 아이인데, 라온이 그 방어를 깰 수 있으려나?”

✔️“그 둘의 다음 상대는 저희 보리니 키튼 경이로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보리니 키튼의 이름을 보며 웃었다. 그의 상대는 다른 이들보다 급이 떨어졌기에 벌써 위로 올라갔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가 올라와도 재밌겠군요.”

✔️“다 의미 없는 일이다.”

✔️오그람이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며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셋 중 누가 올라와도 결국에는 내일 가로나에게 뜯겨나갈 테니까!”

✔️그는 확신을 담은 눈으로 진한 미소를 흘렸다.

✔️“흐음, 저희 아이는 운 좋게도 대진이 편하군요.”

✔️데루스는 16강 마지막 자리에 위치한 카디스의 이름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어이 영감. 지금이라면 취소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오그람이 차게 웃으며 턱을 들어 올렸다.

✔️“흑현갑에, 창첨검 그리고 참룡수까지 꺾고 우승을 하겠다? 그 아이가 나름 천재인 건 인정하겠지만 이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는 안 된다는 듯 손을 저었다.

✔️“검을 뺏기고 창피를 당하기 전에 여기서 물러나.”

✔️“오그람. 못 본 사이에 혀가 길어졌구나.”

✔️글렌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진천검을 더 앞으로 밀었다.

✔️“네 아들에 대한 자신이 그리도 없나?”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지그하르트의 아이들을 믿는다.”

✔️글렌의 담백한 음성에 회의장에 패기가 아닌 따스한 기운이 퍼져 나왔다.

✔️“이야. 아저씨! 못 본 사이에 더 멋있어졌는데!”

✔️체임버가 헤헤 웃으며 글렌의 옆으로 다가갔다.

✔️“차가움 속에 부드러움이 녹아 있는 듯 하군요. 저도 지금의 글렌 님이 더 좋아 보이는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보기 좋네요.”

✔️데루스가 밝게 웃으며 진천검을 내려보았다. 다만 입매와 달리 그의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웃음기도 비치지 않았다.

✔️*     *      *

✔️“그럼 16강의 첫 번째 결투를 시작하겠습니다.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대 흑현갑 마티스 키세름!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부름에 라온이 대련장으로 향했다. 반대편에서 키는 평범하지만, 드워프처럼 단단한 체구의 기사가 올라왔다.

✔️‘기세가 굳건해.’

✔️이곳에 있는 대륙십이성보다 나이는 좀 많아 보이지만, 실력만큼은 그에 밀리지 않았다. 마스터 중급. 제대로 단련한 검기가 느껴졌다.

✔️“두 분 다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가 양쪽을 번갈아 보며 눈을 빛냈다.

✔️“예.”

✔️“준비되었소.”

✔️라온과 마티스는 사회자가 아니라, 서로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번째 결투! 시작합니다!”

✔️사회자는 다시 대련장으로 내려가 손을 쳐올렸다.

✔️고오오오!

✔️결투가 시작되었지만 라온도, 마티스도 움직이지 않았다. 서로를 바라보며 고요하게 기세를 드높였다.

✔️‘강하군.’

✔️빈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장인이 두드려 만든 방패나 갑옷을 보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고 못 뚫을 건 아니지만.’

✔️전력을 다해서 만화공의 절기나, 직접 만든 검술을 사용하면 충분히 저 방어를 깰 자신이 있었다.

✔️‘다만….’

✔️그래서는 여기 온 의미가 없지.

✔️이곳에 온 이유는 다른 이들의 검술을 보고 아직 미숙한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발전시키기 위함이다.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뚫는 맛이 있겠어.’

✔️광아검은 적의 빈틈을 만들어내는 감각검이고, 설풍검결은 적의 흐름과 호흡을 끊어버리는 절검이다.

✔️앞에 있는 마티스는 두 검술을 성장시키는데 더할나위 없이 좋은 상대였다.

✔️‘그건 그렇고 참 더럽게 쳐다보네.’

✔️등 뒤에서 마티오의 노골적인 시선이 느껴졌다. 방해하지는 않지만, 저 시선만으로도 짜증이 일었다.

✔️‘역시 저건 치워야겠어.’

✔️다음 상대인 보리니 키튼과의 대결에서는 저 시선을 지워버릴 수 있을 거다.

✔️“준비는 된듯하니….”

✔️라온이 다시 마티스에게 집중하며 땅을 박찼다.

✔️“시작해봅시다!”

✔️마티스의 우측으로 파고들어 광아검 백수탄을 내쳤다. 맹수가 사냥감에 송곳니를 박아넣는 듯한 일격이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흠!”

✔️마티스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검날을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굳건한 오러가 숨결처럼 따라붙었다.

✔️쩌어어엉!

✔️검과 검이 맞부딪치며 튀긴 시뻘건 불똥이 허공을 가득 채웠다.

✔️찌지지직!

✔️라온도, 마티스도 충격파에 밀려나지 않은 채 서로를 향해 검을 밀어냈다.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광아검을 극성으로 끌어냈음에도 마티스의 균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야말로 거대한 바위에 검을 내리친 느낌이었다.

✔️‘보기보다 더 단단해.’

✔️라온이 맞물린 제천검을 비틀어 내린 뒤 광아검 혈아참을 올려쳤다. 본래 내려치는 검격이지만, 숙달된 지금은 어디에서도 혈아참을 펼칠 수 있었다.

✔️화아아아아아!

✔️열화의 기운이 담긴 사나운 칼날이 마티스의 오러를 불태웠다. 하지만 그는 찰나의 순간에 더 짙은 강기를 일으켜 혈아참의 검격을 차단했다.

✔️콰아아앙!

✔️갈라진 강기가 대련장의 구석으로 떨어졌다. 만약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이 아니었다면 바닥에 구멍이 뚫렸을 것이다.

✔️“야수연맹보다 더한 힘으로, 오웬보다 더 날카로운 검격을 내리치는 19살이라니….”

✔️마티스가 살짝 떨리는 입술을 뗐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렇게 대단한 사람은 아닙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납치 따위로 판단할 수 있는 남자가 아니었어.”

✔️마티스가 검을 휘돌린 뒤 자세를 다잡았다.

✔️“허나 아직은 아니야. 오늘 승리는 양보할 수 없다.”

✔️“그거야 해봐야 아는 일이죠.”

✔️라온이 자세를 낮췄다. 만화공을 일으키며 태화보를 밟았다. 불의 악마와도 같은 족적을 남기며 마티스의 정면으로 돌진했다.

✔️콰아아아앙!

✔️연속으로 쏟아지는 광아검의 검세가 화염 폭풍이 되어 마티스를 몰아붙였다.

✔️쩌저저저정!

✔️광아검의 공세가 매서워지고 있음에도 마티스는 물러서지도, 밀려나지도 않았다.

✔️그 자리에 그대로 서서 모든 검격을 막아냈다. 갑옷이라는 이명에 너무도 잘 어울리는 무력이었다.

✔️‘이제 바꿀 때로군.’

✔️라온은 글래시아를 운용하며 설풍검결을 펼쳐냈다. 냉기를 담은 바람이 폭포수처럼 떨어져 내렸다.

✔️쩌어어엉!

✔️검술 흐름이 180도로 달라졌음에도 마티스의 방어는 여전히 흔들리지 않았다.

✔️“열기가 안 되니 냉기인가? 단순하군.”

✔️“단순한지는 끝난 뒤에 말씀하시죠.”

✔️라온이 칼날에 어린 서리만큼이나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땅을 박찼다.

✔️*     *      *

✔️마티스는 끝없이 쏟아지는 라온의 검격을 차단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조잡하군.’

✔️방어를 뚫지 못해서 검술을 바꾼 듯하지만, 처음 보였던 불의 검술보다 훨씬 성취가 떨어졌다.

✔️‘아직은 어린아이라는 건가.’

✔️방어를 깨지 못한다는 다급함에 더 약한 검술을 사용하다니, 실력 자체는 대단하지만, 경험 부족은 어쩔 수 없었다.

✔️‘아니, 당연한 일이지.’

✔️자신이 검을 휘둘러 온 시간은 라온의 나이보다도 많다. 실력만이 아니라, 경험에서 큰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사실 19살인 저 아이가 여기까지 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적당히 끝을 내야겠군.’

✔️미숙한 검술이지만 그 위력만큼은 쉽게 볼 수 없다. 이 이상 충격을 받았다간 다음 전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빠르게 끝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럼… 음?’

✔️완벽한 방어로 라온의 검술을 제압한 뒤 반격을 가하려 했지만, 이상하게 틈이 보이지 않았다.

✔️‘이게 무슨….’

✔️아니, 틈이 보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라온의 검술에 방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쩌어엉!

✔️강대한 충격과 함께 손목이 밀려났다.

✔️‘내가… 밀렸다고?’

✔️하지만 놀랄 시간도 없었다. 라온의 검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까.

✔️쩌저저저정!

✔️검과 검이 연달아 맞부딪치며 팔이 울리고, 다리가 휘청였다.

✔️‘여기서 성장했다는 건가?’

✔️힘이 더 강해진 게 아니다. 검술의 성취가 어처구니가 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었다.

✔️“너, 너 대체….”

✔️“아직입니다. 끌어올리려면 멀었어요.”

✔️라온은 비웃음이나, 가벼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진중한 눈빛. 지금 이 순간 온 정신을 집중하여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쿠우우웅!

✔️마티스가 검면을 비틀어서 중정검의 혈철궁을 만들었지만, 냉기에 휘감긴 라온의 검술은 오러의 흐름을 가르고 내부에 강대한 충격을 일으켰다.

✔️“크읍!”

✔️참으려고 했지만 뼈가 울리고,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에 입술을 뚫고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 자식은 대체 뭐지?’

✔️분명 어설펐다. 자신에게 절대 통하지 않을 검술이었는데, 어느새 초식과 오러가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며 방어하기 버거운 검술이 되었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못 하고 밀릴 거야!’

✔️이렇게 버티기만 하다가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진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아올랐다.

✔️“크아아아!”

✔️마티스가 기합을 내지르며 진각을 밟았다. 땅을 가리킨 검날을 위로 치켜올리며 오러를 모조리 폭발시켰다.

✔️쿠와아아아아!

✔️방어가 곧 공격. 방어 자세를 취한 검에서 극강의 파동을 일으키는 중정검의 절기 중류포가 쏟아졌다. 섬광처럼 나아간 강기의 나선이 라온의 복부를 노렸다.

✔️쿠우웅!

✔️라온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더 빠르게 파고들어 두 손으로 잡은 검을 내리쳤다. 칼날 위에서 피어나는 푸른 벼락이 중류포와 맞부딪친다.

✔️찌지지지직!

✔️그가 쥐고 있던 칼날의 냉기가 빛무리처럼 번지며 중류포가 굴절되며 꺾여나갔다.

✔️‘이 미친!’

✔️흐름을 비틀었어!

✔️이제 알겠다. 왜 이렇게 방어가 힘들었는지, 왜 점점 놈의 검세를 막기 어려웠는지.

✔️라온의 검술은 그저 강력한 게 다가 아니라, 이쪽의 흐름을 어그러뜨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지금 세상에 흔하지 않은 절검의 능력이었다.

✔️“젠장!”

✔️마티스가 뒤로 물러서며 중정검의 방어 초식을 펼쳤지만, 라온이 더 빨랐다.

✔️순식간에 짓쳐들어와 완성되지 않은 방어를 깨부수고 왼 주먹으로 복부를 후려쳤다.

✔️뻐어어억!

✔️흑철로 만든 갑옷이 찌그러지고, 복부에 어마어마한 충격이 일어났다.

✔️“꺼어억….”

✔️숨을 쉬기는커녕 아무런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이 무슨 힘이….’

✔️복부에 오러를 집중해서 방어했음에도 머리가 멍해질 정도의 고통. 주먹으로 제일이라는 야수연맹의 마스터보다 더한 위력이었다.

✔️터어어억!

✔️라온은 틈을 놓치지 않고, 검면으로 마티스의 뒷목을 가격했다. 그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대련장에 쓰러졌다.

✔️“수고하셨습니다.”

✔️라온은 당연하다는 듯한 여유로운 자세로 마티스에게 목례를 취했다. 제복에 묻은 먼지 조금. 그게 흑현갑이라 불리는 발카르의 마스터를 쓰러뜨린 대가였다.

✔️….

✔️관객도, 심판도, 사회자도 아무말도 못한 채 멍하니 대련장의 라온만을 바라보았다.

✔️“내, 내가 지금 뭘 본 거지?”

✔️“흑현갑 마티스가 저렇게 쉽게?”

✔️“아니, 압도하는 건 흑현갑이었잖아. 갑자기 왜 이렇게 된 거야?”

✔️“거, 검술이 조잡해 보였는데….”

✔️“싸우면서 검술이 발전했어. 나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

✔️관객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넋이 나간 표정으로 헛바람을 흘렸다.

✔️“믿을 수가 없군….”

✔️“마티스의 방어를 저런 식으로 깨는 건 처음 봐.”

✔️“실력이 발전한 거 맞나? 숨기고 있던 거 아니야?”

✔️대기자들 역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좁혔다.

✔️“처, 첫 번째 대결의 승자는 라온 지그하르트 검사입니다! 상처 하나 없는데, 이걸 어렵게 이겼다고 해야 할지, 가볍게 꺾었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요!”

✔️사회자가 목소리를 떨면서 라온의 승리를 외쳤다.

✔️라온은 가볍게 인사를 하고서 대련장으로 내려갔다.

✔️“다음 시합은 창첨검 보리니 키튼 경 대 철심창 그라톤 보렌 경입니다!”

✔️두 번째 대결을 치를 무인들이 대련장에 올라왔음에도 관객들은 여전히 라온의 전투만을 떠들어댔다.

✔️라온은 아직도 열기가 가시지 않은 대련장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타천은 다음을 노리겠군.’

✔️8강 전 상대는 지금 대련장에 올라간 보리니 키튼이 될 테고, 첫 번째 결투처럼 쉽게 끝나지 않을 거다.

✔️‘놈에게는 최고의 기회라는 뜻이지.’

✔️강자끼리의 맞대결은 본인들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조차 집중시킨다. 즉, 기습하기에는 최고의 기회. 타천이 이곳에 있는 모두를 날려버릴 순간을 놓칠 리가 없었다.

✔️‘물론 그렇게 되지는 않을 거야.’

✔️라온이 찬 미소를 흘리며 두 번째 결투의 시작을 지켜보았다.

✔️‘네 기습은 내가 잘 이용해주마.’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𝟎
✔️제320화

✔️라온은 16강 결투가 모두 끝난 대진표를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상대로네.’

✔️창첨검 보리니 키튼, 참룡수 가로나, 파랑검 카디스 그리고 대륙십이성 9위에 위치한 타멸의 마도사 론까지. 16강전은 처음 대진표를 봤을 때의 예상과 조금의 오차도 없이 진행되었다.

✔️‘재밌겠어.’

✔️보리니 키튼에 이어 참룡수 가로나, 카디스 로베르트와도 싸울 생각을 하니 자연스럽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그 전에 할 일이 있지 않느냐.

✔️라스가 얼음꽃 팔찌 위로 꾸물거리며 올라왔다.

✔️‘그렇지.’

✔️라온이 대진표 아래에 있는 데루스의 직속 부하 마티오를 보며 입맛을 다셨다.

✔️‘저 녀석이랑 타천의 기습을 동시에 해치워야 하니까.’

✔️-대체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이제 좀 말해보거라.

✔️‘잘.’

✔️-끄으윽….

✔️라스가 눈을 부라리며 빠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비, 비밀이 많은 놈은 오래 못 사는 법이다! 본왕이 친히 들어줄 테니, 네 계획을 말해보아라!

✔️녀석은 정말 궁금한지 분노를 꾹 참으며 재차 물었다.

✔️‘오래 안 살고, 비밀 많을래.’

✔️-이 빌어먹을 자식이 끝까지!

✔️라스가 결국 참지 못하고 냉기를 일으키며 달려들었다.

✔️‘8강전 치러야 하니까. 나중에 놀아줄게.’

✔️라온이 얼굴을 들이밀던 라스를 툭툭 쳐냈다.

✔️‘아! 라스.’

✔️라스를 밀어내다가 다시 그의 뒷목을 잡았다. 예측에 확신을 더하고 싶었다.

✔️-무엇이냐!

✔️녀석은 삐진 것처럼 고개를 홱 돌렸다.

✔️‘전에 타천이 마지막에 쓴 보라색 마법 기억하지?’

✔️-물론이니라. 그 반쪽이는 마법도 지 같은 걸 쓰더구나.

✔️라스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빛과 어둠의 조화. 혼돈이라 불리는 힘이니라.

✔️‘역시.’

✔️라온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막는 방법 알아?’

✔️-크흥! 네놈의 실력으로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무리니라! 결국 본왕의 힘을 빌리려고 했군! 본왕은 건방진 네놈을 도와줄 생각이 전혀 없느니라!

✔️라스는 좋은 기회라는 듯 혀를 깔짝이며 히죽였다.

✔️‘맞아. 네 말대로 그 혼돈이라는 힘을 내가 막는 건 무리지. 다만 두 힘이 섞이기 전 빛과 어둠일 때 처리하면 되잖아?’

✔️혼돈이 막을 수 없이 강력한 힘이라면 빛과 어둠이 만나기 전에 처리하면 그만이었다.

✔️-어….

✔️라스는 혀를 내민 채로 입이 떡 벌렸다.

✔️-그러네?

✔️녀석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이다가 멈춰 섰다.

✔️-아, 아니 그걸로는 부족….

✔️‘네. 끝.’

✔️-이, 이 멍청한 놈! 하나를 빠뜨렸느니라! 그 반쪽이가 처음부터 혼돈으로 공격한다면….

✔️‘그럴 일은 없어.’

✔️혼돈이라는 힘은 강력하다. 그걸 그대로 날렸다간 회의장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이 바로 튀어나올 테니, 타천은 분명 빛과 어둠을 따로 보낸 뒤 이곳에서 섞을 것이다.

✔️‘고맙다. 네 덕분에 확신이 생겼어.’

✔️라온이 솜사탕처럼 가늘게 올라온 라스의 머리를 두드려 주었다.

✔️-네, 네놈은 천벌을 받을 것이니라! 하늘이 내리지 않는다면 본왕이….

✔️‘마왕 주제에 하늘을 참 좋아한다니까.’

✔️-그 발언! 인종차별이니라!

✔️‘넌 인간이 아니잖아.’

✔️-그럼 종족차별!

✔️라스가 빽 소리를 지를 때 사회자가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그럼 지금부터 마스터급 결투 대련 8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

✔️“드디어 8강이다!”

✔️“기다리다가 죽는 줄 알았다고!”

✔️“빨리 좀 시작해! 숨넘어가겠다!”

✔️사회자는 관객들의 환호에 손을 흔들어 답하고서 대진표의 첫 번째 칸을 가리켰다.

✔️“8강 1회전은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대 대륙십이성 7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창첨검 보리니 키튼입니다!”

✔️그의 외침에 대련장이 떠나갈 정도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라온! 라온!”

✔️“설화검협!”

✔️“창첨검! 창첨검! 창첨검!”

✔️“설화검협도 생각보다는 대단했지만 창첨검에게는 무리지.”

✔️“16강 전 못 봤냐? 마티스를 그냥 발라버렸다고!”

✔️“보리니 키튼이랑 마티스가 같냐? 대륙십이성 7위가 좁밥으로 보여?”

✔️아직 보리니 키튼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이 많았지만, 16강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라온의 응원도 늘어났다.

✔️“후.”

✔️라온은 등 뒤를 밀어주는 듯한 관객들의 함성을 들으며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반대편에서 보리니 키튼이 각이 진 듯한 딱딱한 걸음으로 다가왔다.

✔️하늘거리는 청발에 눈빛은 창칼처럼 날카로웠으며, 기세는 고고하다. 오래 산 소나무가 인간처럼 화한 듯한 모습이었다.

✔️‘마티스보다 한 차원 높은 곳에 있군.’

✔️중급이었던 마티스 키세름과 달리 보리니 키튼은 확실하게 마스터 상급에 올라서 있었다. 쉽게 보았다간 순식간에 당할 수도 있었다.

✔️“개인적으로 대화하는 건 처음이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앞으로 다가오며 고개를 꾸벅였다. 낮은 목소리에 의기와 예의가 가득 차 있었다.

✔️“다른 이들은 라온 검사님을 조금 낮게 보는 듯하지만 저는 다릅니다.”

✔️그가 천천히 기세를 일으켰다. 피부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기파가 발끝에서부터 피어올랐다.

✔️“저는 라온 검사님을 지금 이곳에 있는 상대 중 가장 위험한 우승 후보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말이 진심인지, 보리니 키튼의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다는 의미 같았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지만, 참룡수나, 파랑검 정도는 아니잖아요.”

✔️“아뇨. 저는 당신이 그들과 동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좀 부담스러운 기대네요.”

✔️라온이 보리니 키튼이 일으키는 기세에 맞서며 옅게 웃었다.

✔️쿠구구구구!

✔️아직 결투가 시작되지도 않았건만,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기파가 맞물리며 대련장 위로 모래와 돌조각이 떠올랐다.

✔️“버, 벌써부터 뜨겁네요.”

✔️사회자가 두 사람의 기운에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8강전부터는 대련장을 보호하는 마법이 두 장 더해집니다! 마음껏 실력을 발휘해주시길.”

✔️그는 대련장 아래로 내려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 8강 1회전! 시작합니다!”

✔️사회자의 손이 하늘에서 대련장을 가리키는 순간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몸이 사라졌다.

✔️쩌어어엉!

✔️둘은 눈 깜짝할 사이에 검을 뽑은 채 중앙에서 맞부딪쳤다. 발검이 바로 공격으로 이어지는 찰나의 검격이었다.

✔️우우우우웅!

✔️검과 검이 서로 이를 드러내며 사납고 예리한 검명을 터트렸다.

✔️“역시 반응하시는군요.”

✔️보리니 키튼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대해 주시니, 그에 충족해야겠죠.”

✔️라온이 고개를 끄덕이며 광아검을 펼쳤다. 공기조차 갈라버릴 참격이 사선으로 떨어져 내렸다.

✔️“흠!”

✔️보리니 키튼은 당황하지 않고, 검을 들어 올렸다. 칼날을 두른 강기가 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져서 광아검의 초식에 맞섰다.

✔️캬아아앙!

✔️두 번째 격돌 역시 호각. 누구 하나 밀려나지 않는 백중세의 격돌이었다.

✔️쿠구구구구!

✔️라온이 왼발 발목에 힘을 주며 제천검을 밀어붙였다. 오러의 날카로움과 강도는 보리니 키튼이 위였지만, 육체 능력에서 차이가 났기에 충분히 그를 짓누를 자신이 있었다.

✔️치이이잉!

✔️보리니 키튼은 힘에서 밀린다는 걸 알아차리고 검면을 튕겨내며 뒤로 물러섰다.

✔️“그런 체형으로 이런 힘은 반칙 아닌가요?”

✔️그는 손목을 휘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충격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라온이 차게 웃으며 발을 굴렀다. 앞으로 나아가며 재차 광아검을 쳐올렸다.

✔️땅에 달라붙은 뱀이 하강하는 새를 노리고 독니를 드러내는 듯한 검격. 광아검의 독사지련이었다.

✔️쩌어어엉!

✔️보리니 키튼은 왼발을 뒤로 빼서 공간을 만든 뒤에 위로 솟구치는 독사지련의 중심을 후려쳤다.

✔️“음!”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신음을 삼켰다. 강렬한 충격에 팔뼈가 울렸다.

✔️‘제대로 찌르는군.’

✔️광아검은 나름 자신 있는데.

✔️사람의 빈틈만이 아니라, 검격의 아주 작은 빈틈까지 노리다니, 대륙십이성에 오른 창첨검의 이름은 진짜였다.

✔️후우웅!

✔️이번에는 보리니 키튼의 반격이다. 독사지련을 쳐내며 좌상단으로 올라간 검을 그대로 내리긋는다. 빠르면서도 날카로운 검격이 머리를 향해 떨어졌다.

✔️쿠우웅!

✔️라온이 발목을 비틀었다. 비복근에서부터 끌어 올린 육체의 힘과 단전에서 일으킨 만화공의 열기를 동시에 내질렀다.

✔️쿠와아아앙!

✔️화산처럼 폭발하는 열화의 검격과 벼락같이 떨어지는 보리니 키튼의 참격이 격돌했다.

✔️찌지지지직!

✔️강기와 강기가 경합하며 시뻘건 스파크가 대련장 전체로 번져나갔다.

✔️‘그 와중에 빈틈을 노렸다는 건가?’

✔️보리니 키튼은 위로 쳐올리는 검격의 빈틈을 노리고 그 위력을 중화시켰다. 어처구니 없는 눈과 예리함이었다.

✔️“후우.”

✔️라온이 혀로 입술을 축였다.

✔️‘저걸 얻어야겠어.’

✔️보리니 키튼과의 결투에서 배워야 할 부분을 결정했다. 정확한 빈틈을 노리는 찰나의 판단력과 그 빈틈을 찌르는 예검과 정검의 숙달. 그 셋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욕심이 과하지 않느냐.

✔️‘욕심이 없는 것보다는 나아.’

✔️-그리드가 네놈을 보면 친구 하자고 달려들겠군.

✔️‘호구는 언제나 환영이야.’

✔️라온이 제천검을 고쳐 쥐고서 미소를 지었다.

✔️“분위기가 변했군요.”

✔️보리니 키튼이 눈을 가늘게 뜨며 검을 중단에 세웠다.

✔️“그래도 방심 따위는 없습니다.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그가 땅을 밀어내며 다가와 검격을 뿌렸다. 목젖을 향해 다가오는 칼날의 섬뜩함에 등골 사이로 소름이 돋아올랐다. 그가 익힌 최상승의 무학 참혈검결이었다.

✔️고오오오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공명시켰다. 일곱 개의 고리가 연속으로 공명하며 세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

✔️보리키 키튼의 검극이 눈에 들어온다. 자그마한 흔들림도 없이 처음에 정한 빈틈을 향해 곧게 나아가고 있었다.

✔️‘지금 보이는 건….’

✔️불의 고리를 통해서도 보리니 키튼의 빈틈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다.

✔️‘없으면 만들면 되니까.’

✔️중심을 낮추며 손아귀에 힘을 주었다. 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냉기. 글래시아의 기운을 담은 설풍검결이었다.

✔️캬아아아앙!

✔️설풍검결의 청운련이 보리니 키튼이 일으킨 참혈검술과 비틀리며 맞물렸다.

✔️라온과 보리키 키튼을 서로를 스쳐 지나가며 눈을 마주쳤다.

✔️촤아아악!

✔️보리니 키튼은 재빠르게 발목을 돌려 두 번째 검격을 쏟아냈다.

✔️라온은 바로 반격하지 않고, 왼발을 앞으로 뻗었다.

✔️‘빈틈 세 개.’

✔️설풍검결의 비틀림이 만들어낸 보리니 키튼의 빈틈은 세 개다. 하지만 전부 진짜는 아니었다. 가짜를 거르고 진짜를 찾아야 했다.

✔️‘우측 허리.’

✔️목과 심장의 빈틈은 찔러달라는 듯 너무 정직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보리니 키튼이 저런 급소를 놔둘 리가 없으니, 저건 가짜가 분명했다.

✔️빠르게 판단을 끝내고 보리니 키튼의 허리를 향해 제천검을 내질렀다. 빈틈에 제대로 꽂히도록 정검과 예검을 조화시켰다.

✔️“음….”

✔️보리니 키튼이 내치던 공격을 수비로 돌리며 허리로 향한 검을 막아섰다.

✔️치이이이잉!

✔️하지만 그것 역시 설화검격. 흐름을 꺾는 절검의 호흡이 보리니 키튼의 다른 빈틈을 만들어냈다.

✔️‘이번에는….’

✔️라온이 한발 더 나아가며 만화공을 일으키고, 설풍검결을 광아검으로 전환했다. 광아검의 흉폭함에 예리함과 정확함을 담아냈다.

✔️콰아아아앙!

✔️목줄 풀린 맹수처럼 사나우면서도 정제된 검격에 보리니 키튼은 반격을 가하지 못하고, 빈틈만을 막아섰다.

✔️치이이익!

✔️뒤로 밀려 나간 보리니 키튼이 인상을 찌푸리며 허리를 폈다.

✔️“조금 전부터 기질 자체가 달라진 느낌이군요.”

✔️그는 검을 꽉 쥐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꼭 거울을 상대로 싸우는 기분입니다.”

✔️“저도 빈틈 노리는 걸 좋아해서요.”

✔️“그럼 누가 더 위인지 확실하게 겨뤄야겠군요.”

✔️보리니 키튼이 이를 악물고 달려들었다. 보법조차 예리했다. 칼날 같은 움직임으로 후방을 파고들어 왔다.

✔️“얼마든지.”

✔️라온이 차게 웃으며 설풍검결을 찔러넣었다. 보리니 키튼 역시 참혈검을 전력으로 전개하며 맞서 달렸다.

✔️쩌저저적!

✔️붉고, 푸른 검기가 가라앉는 태양을 갈랐다.

✔️*     *      *

✔️부드러운 파도가 출렁이는 백사장.

✔️수평선을 향해 가라앉는 주홍빛 태양 아래 가면과 투구를 쓴 남자 두 명이 목제 테이블 앞에 앉아 있었다.

✔️“정말 하실 겁니까?”

✔️두 개의 뿔이 달린 적색 뱀의 투구를 쓴 남자가 저물어가는 태양을 보며 물었다.

✔️“당연하지요.”

✔️글렌과 싸울 때보다 더 어려진 미청년의 가면을 착용한 타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 위에 올려진 지도를 툭툭 두드렸다.

✔️지도에서 가리키는 곳은 오웬 왕성의 중심. 그것도 대련장이 있는 곳이었다.

✔️“훗날 글렌과도 같은. 아니, 그 이상이 될 수도 있는 싹을 그냥 놔둘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더불어 다른 육황의 미래도 지울 수 있으니 이런 기회는 다시 없지요.”

✔️“라온 지그하르트….”

✔️“아, 그러고 보니 적귀사께서도 그에게 당한 일이 있었죠.”

✔️“제가 아닙니다.”

✔️“아, 실수.”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실수라 말했지만, 그의 표정에는 자그마한 미안함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의미 없는 일입니다.”

✔️적귀사가 느릿하게 손을 저었다.

✔️“그거 다행이군요.”

✔️타천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시선을 돌렸다. 절혼검은 얕은 수면에 발을 담근 채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후.”

✔️그는 잠시 절혼검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짓다가 검지와 중지를 들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오!

✔️두 손가락에서 백광과 흑광이 반짝거리며 솟아올랐다.

✔️“육황이 회의실에 있다고 해도 대련장에 강자들이 있을 겁니다.”

✔️“인간은 말이죠. 하나에 집중하면 둘을 못 보는 법입니다.”

✔️타천이 손가락 위로 떠오른 흑백의 빛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의 싸움이 최고조에 이르면 저 하늘 위에서 내려오는 빛과 어둠 따위는 보이지 않지요. 그게 노을에 섞인다면 더더욱.”

✔️“음….”

✔️“그럼 인사하시죠.”

✔️타천이 손을 내리자, 그의 손가락에 어려있던 두 빛이 반원을 그리며 지도 속으로 스며들었다.

✔️“오늘이 대륙십이성과 라온 지그하르트의 마지막이니까요.”

✔️아이처럼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지도 속에서 장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     *      *

✔️캬갸갸갸걍!

✔️적색 강기의 폭풍 속에서 쇳덩이가 톱날에 긁히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라온과 보리니 키튼이 서로를 향해 검격을 쏟아내는 굉음이었다.

✔️두 사람의 검 위로 송곳처럼 날카롭게 갈린 강기가 타오르고 있었다. 서로의 빈틈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찌르기 위해 갈고 닦은 검강이었다.

✔️쩌저저저저정!

✔️강기와 강기가 맞닿으며 맹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지만, 라온도 보리니 키튼도 물러서지 않았다. 찢겨 나간 상처들이 강기에 지져져 고통이 엄청날 텐데도 상대의 숨통을 끊기 위한 검결만을 몰아쳤다.

✔️라온의 두 눈동자에 시뻘건 이채가 빛났다.

✔️‘우측 어깨, 좌측 무릎.’

✔️진짜는 무릎.

✔️빈틈을 보자마자, 진짜와 가짜가 구분된다. 좌측 무릎을 향해 설풍검결을 내쳤다.

✔️“크으윽….”

✔️차디찬 검격을 제대로 상쇄하지 못한 보리니 키튼이 두 발 밀려났다.

✔️쿠우웅!

✔️라온이 오른발을 앞으로 뻗으며 진각을 밟았다. 대퇴근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힘에 강대한 열기를 담아 회전시켰다.

✔️만화공 회천. 회전하는 화염의 톱날이 무식할 정도의 힘으로 꺾어 내려갔다.

✔️콰아아아앙!

✔️보리니 키튼은 그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며 대련장의 끝으로 밀려났다.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에 족적이 남을 정도로 강대한 위력이었다.

✔️후우우우우욱!

✔️강기의 폭풍이 그치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라온의 제복은 곳곳이 찢어져 붉게 물들었고, 보리니 키튼의 갑옷도 찌그러지거나 깨져 피가 흘러내렸다. 둘 다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지만, 안색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았다.

✔️“어어….”

✔️“누, 누가 일방적이라고 했어! 막상막하잖아!”

✔️“아니, 지금은 라온이 더 유리해 보이는데?”

✔️“저게 설화검협의 진짜 무력….”

✔️“생각해보면 납치당하는 게 당연했지! 10사도랑 멀린이잖아!”

✔️“그래. 납치 따윈 신경 쓸 게 못 됐어.”

✔️“생각해보면 설화검협이 잡은 사도만 둘이잖아!”

✔️관객들은 관객들도 보리니 키튼과 막상막하로 경합하는 라온을 보며 입을 떡 벌렸다. 놀랐는지 침을 흘리는 사람들도 많았다.

✔️“이렇게 재밌는 싸움은 정말 오랜만이로군요.”

✔️보리니 키튼이 살짝 떨리는 손으로 검을 다잡았다. 그는 대련이나, 결투가 아니라 싸움이라고 말했다. 실전처럼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네요.”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교육적인 대련이었어.’

✔️그와 접근전을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진짜 빈틈과 가짜 빈틈의 구분, 빈틈 중에서도 중요한 곳을 노리는 판단력, 예검과 정검의 숙달까지. 바로 앞에서 가르쳐주는 선생과도 다를 바가 없었다.

✔️“싸우면서 성장한다는 괴물이 있다고는 들었지만, 눈앞에 보고 있으니 섬뜩하군요.”

✔️“덕분에 많이 배웠습니다.”

✔️보리니 키튼은 인격적으로도 완성된 기사였다. 조롱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아쉽지만 끝을 낼 때로군요.”

✔️보리니 키튼이 미소를 지었다. 검을 상단으로 올리며 왼발을 뒤로 뺐다. 창수가 중거리에서 적을 노리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고오오오오오!

✔️오러가 강해질수록 그의 주변을 휘감은 강기는 가라앉는다. 말 그대로 강기를 끝없이 다듬은 하나의 창. 그 어떤 방패도 찢어발길 기세에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라온이 입술을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만화공과 글래시아를 동시에 일으켰다. 마나회로에 큰 부담이 가는 운용법이지만, 지금은 그걸 가릴 게 아니었다.

✔️화아아아아!

✔️오른손 제천검으로 만화공의 불꽃을 피워내 보리니 키튼을 겨누고 왼손은 허리 뒤편의 진혼검의 검병을 쥐었다.

✔️쿠구구구구!

✔️전력을 꺼내놓은 서로의 기파가 맞붙으며 대련장이 지진이라도 난 듯 뒤흔들리기 시작했다.

✔️“후우욱.”

✔️라온이 숨을 들이켜며 입맛을 다셨다.

✔️‘뜨겁군.’

✔️보리니 키튼의 강렬한 시선이 느껴진다. 두 눈을 부릅뜬 채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마티오와 마른침을 삼키는 사회자 그리고 모든 관중들의 정신이 고조되는 게 느껴졌다.

✔️‘이제 올 거야.’

✔️이 대련장의 모든 시선과 정신이 집중된 지금이 그놈이 노리고 있던 순간일 테니까.

✔️찌이이이잉!

✔️불의 고리와 설화의 감각을 극성으로 운용했다. 시간이 한층 더 느리게 흐른다. 손끝에 닿는 먼지의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세밀해진 감각으로 천공을 살폈다.

✔️‘왔다….’

✔️극한까지 갈고 닦은 감각이 저 먼 하늘 위에서 떨어져 내리는 은밀한 빛과 어둠의 기운을 잡아냈다. 예상대로 놈은 빛과 어둠을 따로 보낸 뒤 섞으려고 했다.

✔️‘지금 가야 해.’

✔️라온이 이를 악물었다. 보리니 키튼에게 집중하던 힘을 한층 더 압축시켰다.

✔️투우웅!

✔️제천검을 휘감던 열기가 한순간에 응축된 순간 보리니 키튼이 달려들었다.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공격하는 것 같았다.

✔️‘이건 막을 수 없어.’

✔️여기서 방어했다간 위에서 떨어지는 타천의 기운을 막지 못한다. 뒤섞여서 혼돈이 되어버릴 것이다.

✔️‘견딘다.’

✔️태화보를 밟으며 몸을 비틀었다. 보리니 키튼이 눈을 부릅떴다. 그도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고 검을 빼려 했지만 이미 너무 늦었다.

✔️푸카아악!

✔️우측 허리가 길게 뜯기며 시뻘건 피가 터져 나왔다.

✔️“왜….”

✔️보리니 키튼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왜 멈췄냐고 묻는 듯했다.

✔️“방해꾼 좀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라온이 파리하게 웃고서 끌어모은 힘을 터트려 땅을 차올랐다.

✔️후우우우!

✔️점차 서로를 향해 다가가는 빛과 어둠의 기운을 향해 나아갈 때 우측 관중석에서 리메르가 튀어나왔다.

✔️‘단주님도 기다렸던 건가?’

✔️그저 도박만 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는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리메르가 미소를 지으며 눈으로 말한다. 네가 할 수 있겠냐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의 미소가 진해졌다.

✔️“그럼 다녀와라!”

✔️리메르가 검을 뽑아 발밑에 대어준 뒤 그대로 쳐올렸다. 그 덕분에 바닥에서 전력을 다해 올라선 것보다 더한 속도로 천공에 도달할 수 있었다.

✔️파지지지직!

✔️낮과 밤이 교차하는 노을빛 사이에서 빛과 어둠이 자석처럼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두 힘 사이에서 혼돈을 담은 보랏빛 스파크가 튀기기 시작했다.

✔️라온의 붉은 눈동자에 그보다 더한 뇌광이 번졌다. 제천검에 타오른 화염과 진혼검에서 피어나는 서리가 두 빛을 향해 쏘아졌다.

✔️콰아아아아!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𝟏
✔️제321화

✔️“드디어 이야기가 진척되는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두터운 서류 뭉치를 덮으며 미소를 지었다. 지지부진했던 회의가 끝나가기에 그의 안색도 밝아졌다.

✔️“백혈교와 에덴의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마나망은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마탑에서 진행하게 될 겁니다.”

✔️“그 귀찮은 일을 마탑의 게으름뱅이들이 한다고?”

✔️체임버가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탑주께서 이번에 참여하지 못했기에 그 일을 맡아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녀석들은 왜 안 온 거야?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레크로스 국왕을 바라보았다.

✔️“여태 뭐 하다가 지금에서야 그게 궁금한 거냐?”

✔️오그람이 체임버를 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다른 곳에는 별 관심 없었거든. 난 저 아저씨를 보러 온 거라서.”

✔️체임버는 글렌을 가리키며 빙긋 웃었다.

✔️“얼마나 강해졌나 보러 왔는데, 역시 실망을 안 시킨다니까.”

✔️그녀가 혀로 붉은 입술을 축였다.

✔️“그래서 마탑 애들은 왜 안 온 건데?”

✔️“그들은….”

✔️“음?”

✔️레크로스 국왕이 답을 해주려고 할 때 말없이 서류를 살피던 글렌이 눈을 부릅뜬 채 창가 쪽을 돌아보았다.

✔️“가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이런!”

✔️셰릴과 로엔이 글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려는 순간 데루스, 체임버, 오그람, 레크로스 국왕까지 모두가 글렌과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버러지 같은 것이!”

✔️글렌은 회의장 창문을 부수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다른 육황의 수장들도 황급하게 글렌의 뒤를 따라갔다.

✔️화아아아!

✔️그들은 저 멀리 보이는 대련장 위로 추락하는 빛과 어둠을 보고서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빛과 어둠! 타천인가!”

✔️“거리가 멉니다. 이대로라면 늦어요!”

✔️오그람이 이를 바득 갈고, 레크로스 국왕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좌표 방해가 걸려 있어. 이동이 안 돼.”

✔️체임버가 계산을 끝내고서 이마를 찌푸렸다.

✔️“여기서 요격해야겠어.”

✔️그녀가 추락하는 빛과 어둠을 향해 지팡이를 겨눌 때 글렌이 손을 들어 앞을 막아섰다.

✔️“아저씨?”

✔️“기다려라.”

✔️글렌은 차가운 눈으로 떨어지는 빛과 어둠을 지켜보았다. 숨 한 번 들이킬 시간이 지나기도 전에 빛과 어둠 사이로 노을빛을 닮은 금발의 검사가 뛰어올랐다.

✔️“저 녀석 영감 손자잖아!”

✔️오그람이 타천의 마나를 향해 날아가는 라온을 보며 눈매를 좁혔다.

✔️“정말 노망이라도 난 거냐고! 타천의 마법을 저 꼬맹이가 어떻게 지워!”

✔️“이건 나도 반대야. 저 녀석에겐 아직 무리야.”

✔️“제 생각에도 일단은 처리하고 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체임버와 레크로스 국왕도 이건 아니라는 고개를 저었다. 데루스는 어떠한 말도 하지 않은 채 라온을 지켜보았다.

✔️“라온은 내 뒤에서 타천의 힘을 지켜보았다.”

✔️글렌은 그들을 안심시키듯 부드럽게 손을 내렸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비상하는 라온을 두 눈에 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움직이는 아이가 아니야.”

✔️*     *      *

✔️“크윽!”

✔️라온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전력을 다한 제천검과 진혼검으로 빛과 어둠의 기운을 후려쳤지만, 밀려난다.

✔️그리 크지 않은 마나였지만, 주먹으로 거대한 쇳덩이를 친 듯한 충격에 손아귀가 떨렸다. 극강의 반탄력이었다.

✔️‘이대로는 못 지워.’

✔️계획대로 진행하기 위해서는 눈앞에 보이는 빛과 어둠의 기운을 절반 이상 날려야 하지만 생각보다 그 힘이 강대했다.

✔️이대로라면 빛과 어둠이 섞인 혼돈이 터져 대련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죽게 될 것이다.

✔️‘숨겨두고 싶었는데, 어쩔 수 없군.’

✔️라온이 진혼검을 고쳐 쥐고 만화공과 글래시아의 기운을 폭발시켰다.

✔️‘부탁한다.’

✔️우우우우웅!

✔️그 말에 화답하듯 진혼검에서 터져 나온 강대한 검명이 천공을 가득 채웠다.

✔️화아아아아!

✔️라온이 허공에서 몸을 휘둘리며 진혼검으로 열기와 냉기를 동시에 내뿌렸다.

✔️분수처럼 뿜어진 두 기운은 은빛 궤적을 따라 수백 장의 꽃잎이 되어 휘날렸다.

✔️만화공의 열기와 글래시아의 냉기를 동시에 운용하여 펼치는 화령이었다.

✔️‘크윽….’

✔️마나회로에서 돋아나는 극심한 통증을 이 악물고 참으며 끝까지 검을 그어 내렸다. 노을빛을 받아 뻗어나가는 붉고 푸른 강기의 조각들이 천공을 가득 메웠다.

✔️-그 정도로는 무리다.

✔️라스가 빛과 어둠을 향해 쏘아진 화령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그 반쪽이는 본왕이 인정할 정도의 마법사. 아무리 혼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아직은 네가 감당할… 음?

✔️녀석의 장담과 달리 화령의 꽃잎들은 타천이라는 괴물이 만들어낸 빛과 어둠의 기운을 깎아내기 시작했다.

✔️찌지지직!

✔️조각칼로 나뭇조각을 잘라내듯 빛과 어둠의 기운이 뭉텅이로 찢겨나갔다.

✔️-어, 어떻게….

✔️‘그렇게 화내놓고 벌써 잊었어?’

✔️라온이 진혼검의 칼날을 가리켰다. 붉은 칼날 위에서 샛노란 요기로 새겨진 글자가 돋아나 있었다.

✔️-마법 역장!

✔️‘마법 요혈이지.’

✔️마법 요혈은 4사도의 흑도를 깨부수고 얻어낸 진혼검만의 특성. 마법의 흐름 사이에 요기를 밀어넣어 마법 발동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타천의 빛과 어둠의 마법은 이미 발동되었기에 억제할 수 없지만, 마법 역장처럼 방해하는 건 얼마든지 가능했다.

✔️‘그래도 조금 부족하군.’

✔️화령이 상당히 많은 기운을 잘라냈음에도 빛과 어둠은 여전히 서로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결국 직접 부딪쳐야 했다.

✔️뿌드득!

✔️라온이 진혼검의 검병을 으스러져라 쥐고서 이를 악물었다.

✔️‘흐름을 잘라내야 해.’

✔️빛과 어둠의 기운만이 아니라, 두 기운이 서로 합쳐지려는 성질까지 지워야 했다.

✔️‘그걸 위해서는.’

✔️쾌속하게 손목을 돌려 진혼검으로 새로운 경지에 오른 설풍검결을 펼쳤다. 마법 요혈을 담은 설풍검결의 절기 은해섭풍이 빛과 어둠 사이로 쏟아졌다.

✔️쿠구구구구!

✔️빛과 어둠의 기운은 마지막 발악을 하는지 쉽게 꺾이지 않았다. 손목이 부러질 것 같은 통증을 참으며 끝까지 검을 내리쳤다.

✔️촤아아아악!

✔️마티스와 보리니 키튼을 상대하며 급성장한 설풍검결 사이로 마법 요혈의 흐름이 깃들며 끝까지 발악하던 빛과 어둠의 기운을 갈라냈다.

✔️타천이 일으킨 두 종류의 마법은 섞일 일 없이 허공으로 흩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라온은 제천검과 진혼검에 달라붙은 빛과 어둠의 기운을 보며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역시.’

✔️이전에 글렌과 타천의 전투를 볼 때 빛과 어둠이 글렌의 검에 옅게 남아 있는 것을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놈의 기운은 그저 강하기만 한 게 다가 아니라, 상대의 기운에 달라붙어 두 번째 충격을 주는 효과까지 있었다.

✔️타천은 적을 끝까지 공격하기 위해서 이 흡착력을 만들었겠지만, 지금의 자신에게 이건 도움이 될 뿐이었다.

✔️‘데루스가 보고 있겠지.’

✔️글렌이나, 데루스 같은 초월자들은 이미 상황을 파악하고 이쪽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이 상태를 이용해야 했다.

✔️라온이 다급한 표정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기운을 함부로 버릴 곳이 없다는 점을 보여줘야 해.’

✔️이건 연기가 아니다. 대련장만이 아니라, 주변이 사람으로 가득 차서 이 기운을 어디로 보내도 인명 피해가 일어날 상황이었다.

✔️‘즉, 안전한 곳은 한군데밖에 없지.’

✔️차게 웃으며 아래를 보았다. 이곳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여러 겹의 마법으로 보호되는 대련장이었다.

✔️“크윽!”

✔️허리에서 전해지는 고통을 참는 척 입술을 깨물며 몸을 돌렸다. 두 검에 깃든 힘을 감당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마티오의 앞에 있는 대련장 모서리를 향해 두 검을 내리찍었다.

✔️“이익!”

✔️마티오가 다급하게 방비하려고 했지만, 이미 늦었다. 깎아냈다고 해도 타천의 기운은 쉽게 받아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찌지지직!

✔️검과 검 사이에 어린 빛과 어둠이 합쳐지며 터진 아주 작은 혼돈이 마티오를 덮쳤다.

✔️쿠와아아아아앙!

✔️대련장을 두르고 있던 여섯 개의 보호 마법이 통째로 찢어지고, 마티오가 거칠게 튕겨 나가 땅에 처박혔다. 팔과 다리는 뒤로 꺾였고, 그의 눈과 코에서 핏물이 줄줄이 흘러내렸다.

✔️‘저놈이 대자로 자빠져 있는 꼴을 보게 되다니.’

✔️라온이 비틀거리는 척하면서 마티오의 표정을 살폈다. 얼음장을 씌운 듯 무표정한 얼굴이 고통과 당황으로 물들어 있으니, 전신의 통증이 싹 가시는 듯한 기분이었다.

✔️“끄으윽, 왜….”

✔️마티오는 충격이 심했는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가늘게 떴다.

✔️“후욱….”

✔️라온이 입에 차오른 핏물을 뱉으며 마티오에게 고개를 숙였다.

✔️“사람들이 가득 차서 어디로도 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보호막이 쳐진 이곳이 가장 안전한 곳이었고, 당신이라면 받아주실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헛소리가 아니다. 이 주변에서 가장 안전한 건 보호 마법이 있는 대련장이고, 심판들이 가장 강한 무력을 지닌 것도 사실이니까.

✔️“죄송합니다.”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속마음을 꾹 참은 채 다시 고개를 숙였다.

✔️“그, 그런….”

✔️마티오는 말을 다 하지 못한 채 눈을 내리감았다. 아쉽게도 죽은 건 아니고, 심한 충격에 기절한 듯 보였다.

✔️“뭐, 뭐야 이거?”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설화검협이 왜 위로 올라갔다가 심판을 공격한 건데?”

✔️“하늘에서 누가 습격한 거 같아.”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식할 정도의 힘이 격돌했어.”

✔️“그럼 설화검협은 그 습격을 막으려고 올라간 거야? 대단한데?”

✔️관객들은 지금 일어난 상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누가 공격을 했다고? 근데 그걸 직접 막을 필요가 있었나?”

✔️“웬만한 건 다 보호 마법이 다 막아줄 텐데.”

✔️“그러게? 괜히 심판만 충격받고 기절했잖아.”

✔️“질 거 같아서 뛰어오른 거 아닐까? 헛짓….”

✔️“아아, 구해줘도 지랄이 여기에 있네.”

✔️마스터 대련이 시작하기 전부터 라온을 조롱하던 관객들의 주절거림을 일축하는 서늘한 음성이 들려왔다.

✔️“저 꽃미남이 나서지 않았으면 너희들 뼛조각도 하나 남기지 않고 지워졌을걸.”

✔️어느새 나타난 체임버가 관객석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타천의 마법이었으니까.”

✔️“타, 타천?”

✔️“에덴의 타천?”

✔️“타, 타천이라니….”

✔️허공에서 떨어진 마법이 타천의 것이었다는 말에 관객들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체임버의 말에 본인들이 정말 죽을 뻔했다가 살아났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고오오오오오오!

✔️그저 눈빛만으로 사람의 심장을 찢을 듯한 기세가 타오른다. 대련장 앞에 선 글렌이 라온을 조롱했던 관객들에게 일으키는 살기였다.

✔️“크억!”

✔️“아악….”

✔️“꾸아악….”

✔️그들은 글렌이 일으킨 기세에 짓눌려 입에서 거품을 뿜어내며 눈을 까뒤집은 채 기절했다.

✔️“설화검협이라. 이명 한번 잘 지었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은 라온을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흘렸다.

✔️“흥. 미친놈이다. 허나, 제대로 미쳤어.”

✔️라온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던 오그람도 이번만큼은 대견하다고 생각했는지 시원한 웃음을 터트렸다.

✔️“…….”

✔️데루스 로베르트는 쓰러진 마티오에게 자그마한 관심도 주지 않은 채 라온만을 지켜보았다.

✔️“타천이라니….”

✔️“맞아! 노을 사이로 빛과 어둠이 반짝였잖아! 그 마법을 사용하는 건 타천뿐이라고.”

✔️“그럼 설화검협은….”

✔️“그래. 모두를 살리기 위해서 창첨검에게 허리를 찔리면서도 뛰어오른 거야.”

✔️“그가 나서지 않았다면 여기 있던 모두가 죽었겠지.”

✔️“막은 것도 대단하지만, 여기서 그 습격을 알아차린 것도 라온 님뿐이었어.”

✔️“저게 라온 지그하르트의 본 모습인가….”

✔️이제 사정을 파악한 관객들은 라온에게 경외와 고마움을 느끼며 주먹을 꾹 말아쥐었다. 모두 전율을 느꼈는지 입술이 떨리고 있었다.

✔️라온은 탁한 숨을 내쉬며 마티오에게 다가가 고개를 돌렸다.

✔️“치료사!”

✔️그의 외침에 멍하니 서 있던 치료사들이 달려와 마티오의 상태를 살폈다.

✔️“뼈가 부러지고, 내상이 심하지만, 생명에 지장은 없습니다! 치료소로!”

✔️치료사들은 마티오를 조심스럽게 들것에 올린 뒤에 치료소로 향했다.

✔️“라온 님은 괜찮으신 겁니까? 허리의 부상이 심해 보입니다.”

✔️치료사 중 한 명이 함께 가자는 듯 다가왔다.

✔️“전 괜찮습니다.”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뒤를 돌았다. 보리니 키튼이 놀람을 넘어 경악한 눈으로 이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투는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까요.”

✔️허리의 부상과 마나회로의 통증은 심했지만, 이곳에서 결투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오늘 이기고, 내일도 싸워 광아검과 설풍검결의 성취를 높이고 싶었다.

✔️“허어….”

✔️“이 와중에 자신보다 남을 걱정하다니….”

✔️“저 상태로 계속 싸울 생각인가?”

✔️“협…. 협이라는 이명을 가진 무인은 많이 봤지만 저런 녀석은 처음이야….”

✔️“설화검협. 그 이름과 소문이 진짜였다니….”

✔️관객들은 본인보다 어린 라온의 정신력에 감탄하며 헛바람을 흘렸다.

✔️“라온! 라온! 라온!”

✔️“설화검협! 설화검협!”

✔️“우오오오오오오!”

✔️“난 오웬 사람이지만 너만큼은 앞으로 평생 응원한다!”

✔️대련장에 가득 찬 관객들이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오웬 왕국이 아니라, 지그하르트에 온 듯 모두가 오직 라온의 이름만을 부르짖었다.

✔️‘데루스는….’

✔️라온은 관객들을 살피는 척하면서 데루스를 보았다. 그는 백지처럼 어떠한 감정도 드러나지 않았다.

✔️‘표정 좋고.’

✔️다른 사람은 그가 당황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저건 화를 억지로 내리누르고 있는 상태였다. 자신이 저 표정을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미소가 절로 피어났다.

✔️‘이제 가볼까.’

✔️데루스의 분노한 얼굴도 보았으니, 이제 상황을 끝낼 차례다.

✔️라온이 숨을 고르고 대련장으로 올라가려 할 때 글렌이 계단 앞을 막아섰다.

✔️“부상이 심하다.”

✔️글렌은 라온의 찢어진 허리와 아직 떨리는 손아귀를 보며 눈매를 좁혔다. 진천검이 달린 일이었음에도 그는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라온을 잡았다.

✔️“이 이상 싸울 필요는 없다.”

✔️“맞아. 여기까지만 해.”

✔️체임버가 하강하여 글렌의 옆에 섰다.

✔️“여기서 멈춰도 뭐라 할 사람은 없어.”

✔️그녀도 그만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라온이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달고 나왔습니다. 이런 이변 따위에 무릎을 꿇을 수야 없지요.”

✔️타천과 백혈교주를 홀로 압도하는 글렌의 뒷모습을 봐왔다. 힘겨운 몸 상태나, 검술 성취를 떠나 여기서 물러나기에는 아쉬움이 많았다.

✔️“알겠다.”

✔️글렌은 라온의 눈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물러섰다.

✔️“감사합니다.”

✔️라온이 글렌과 체임버에게 고개를 꾸벅이고서 다시 대련장 위로 올라갔다.

✔️“당신은….”

✔️보리니 키튼은 아직 라온의 피가 묻어있는 검을 든 채 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 멍청한 놈!’

✔️자신이 눈앞에 싸움에 집중하는 동안 라온은 더 높은 곳을 보고 있었다.

✔️자신이 검을 찌르는 동안 라온은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해 반격하지 않고 몸으로 버텨냈다.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했다는 생각에 부끄러움을 참을 수가 없었다.

✔️라온의 허리에서는 아직도 핏물이 떨어졌고, 얼굴은 파리했으며, 손아귀에는 힘이 없어 보였다.

✔️그는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태에서도 끝나지 않은 결투를 위해 대련장 위에 올라왔다.

✔️스물도 되지 않은 어린 나이에 협이라는 글자를 단 이유가 있는 남자였다.

✔️라온에게 감탄을 넘어 존경이 피어났다.

✔️“라온 검사.”

✔️보리니 키튼이 깊게 한숨을 내쉬고, 라온을 바라보았다.

✔️“이 대결은 제가 졌습니다. 그대로 싸웠어도 난 당신을 이기지 못했겠죠. 무력으로도, 무인의 정신으로도 모두 패배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느낀 듯 고개를 떨궜다.

✔️“난 여기서 기권….”

✔️“그게 맞는 길입니까?”

✔️라온이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음성을 뱉었다.

✔️“상황이 어떻게 되었든 저는 당신과 싸우기 위해서 다시 이곳에 섰습니다. 당신이 말한 기사의 정신은 상대를 무시하고 기권하기 위해 있는 겁니까?”

✔️“그건….”

✔️“제가 먼저 보고 나섰을 뿐입니다. 창첨검께서 먼저 알았다면 저처럼 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닌가요?”

✔️“으음….”

✔️보리니 키튼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말과 달리 실제로 움직이는 건 다른 일이니까.

✔️“아직 우리의 결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라온은 타천의 마법이 떨어지기 직전으로 돌아간 듯 제천검을 두 손으로 잡고 만화공을 모조리 끌어 올렸다.

✔️“오시지요.”

✔️“하아아….”

✔️보리니 키튼이 허공을 올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한참 동안 어둑해진 하늘을 보던 그가 시선을 내렸다. 흔들리던 눈빛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도 무언가 깨달음을 얻은 것 같았다.

✔️“제가 또 실수할 뻔했군요. 가르침을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는 말은 나중으로 미루겠습니다. 지금은 최선을 다해서 당신을 꺾는 게 맞겠지요.”

✔️그의 주변으로 바다처럼 푸른 강기가 치솟았다. 검을 상단으로 올린 뒤에 뒤로 젖혔다. 타천의 마법이 떨어지기 전보다 더 날카로운 기세를 두른 채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얼마든지요.”

✔️라온은 머리털을 쭈뼛 서게 만드는 보리니 키튼의 기세를 느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흘렸다.

✔️‘이거지.’

✔️타천의 마법을 막고, 마티오에게 복수를 한 것과 더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결투를 계속하는 건 다른 일이다. 무엇 하나 놓칠 생각 없었다.

✔️-정말 그리드보다 더한 욕심이니라….

✔️라스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욕심부려야지. 난 아직 출발선에도 서지 못했으니까.’

✔️라온이 미소를 흘리며 검신 위로 만화공의 열기를 응집시켰다. 강기가 두터워지는 게 아니라, 얇게 예리하게 갈리며 잔불처럼 타올랐다.

✔️“내가 사용할 검술은 참혈검결의 절기 혈성첨관이오.”

✔️그는 초식의 이름을 알려주는 것과 달리 생사대적을 만난 듯 섬뜩한 기세를 쏘아냈다.

✔️“저는 적섬이라는 초식을 사용하겠습니다.”

✔️만화공의 절기 적섬. 숙련된 예검과 정검을 통해 한층 발전한 적섬으로 끝을 낼 생각이었다.

✔️“적섬이라. 멋진 이름이군요.”

✔️보리니 키튼이 고개를 끄덕이고서 눈을 가늘게 떴다. 그에게서 피어나는 기세가 더더욱 예리하게 다듬어진다. 레크로스 국왕을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전신이 검에 뚫리는 기분이었다.

✔️고오오오오!

✔️라온 역시 검을 중단에 둔 채 만화공의 기운을 한계까지 끌어올렸다. 극한에 이른 집중력 덕분에 육체의 고통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파스슥.

✔️서로가 서로의 기세를 이 악물고 견딜 때 타천의 기운이 스쳤던 대련장의 끝부분이 무너졌다.

✔️터어엉!

✔️선공은 보리니 키튼이다. 바닥을 박차고 나아가 검을 내지른다. 검극에서 솟구친 장대한 빛무리가 창칼처럼 쏘아져 라온의 전신을 휘감았다.

✔️쿠웅!

✔️라온은 진각을 밟으며 제천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은백색 검신 위로 짙고도 깊은 홍염이 타오른다.

✔️만화공 백화

✔️적섬.

✔️송곳니를 드러낸 염화의 칼날이 서산 아래로 가라앉는 태양과 푸른 빛무리를 동시에 갈랐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𝟐
✔️제322화

✔️타천은 목제 테이블 위에 펼쳐진 오웬 왕성을 지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실패인가….”

✔️확실하게 제거하기 위해서 공간 좌표까지 뒤틀었는데 혼돈이 이루어지지 못했다. 라온은커녕 단 한 명도 죽은 인간이 없었다. 말할 필요도 없는 완벽한 실패였다.

✔️“실패라고 하셨습니까?”

✔️적귀사가 타천을 돌아보며 눈을 부릅떴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테이블을 꽉 움켜쥐었다.

✔️“설마 글렌 지그하르트가….”

✔️“아뇨. 라온 지그하르트 때문입니다. 혼돈이 이루어지기 전에 음양의 기운을 지워버리더군요.”

✔️타천이 부드럽게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아귀 위로 빛과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났다.

✔️“글렌과 싸울 때 본 게 다일 텐데 혼돈의 흐름을 파악하다니, 역시 보통이 아니에요.”

✔️“그게 놈의 가장 무서운 점입니다.”

✔️적귀사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놈은 제게 덤벼들 때도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달라졌습니다. 아직은 위협적인 무력이 아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더 높은 곳에 오르게 될 겁니다.”

✔️지부가 무너지기 전에 라온은 매일매일 싸우자며 검을 날려왔고, 그때마다 사람이 변한 것처럼 격이 달라진 무력을 선보였다.

✔️많은 무인을 봐왔지만 그런 정신 나간 성장력은 처음이었다.

✔️“성장력이라….”

✔️타천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수평선 아래로 해가 저물어 바다에 어둠이 찾아와 있었다.

✔️절혼검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자세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놈을 제거한다면 최대한 빠른 게 좋을 겁니다.”

✔️적귀사가 가라앉은 눈빛으로 타천을 바라보았다. 라온 지그하르트의 성장은 예측 불허. 죽이려면 단호하게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아쉽게도 그리 여유가 많지는 않아요. 최근에 꽤 많은 소모를 했으니까.”

✔️타천이 느릿하게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올렸다.

✔️“조금만 앞을 보도록 하죠.”

✔️그는 달이 차오른 해변의 하늘을 보며 부드럽게 눈을 내리감았다. 음악을 즐기듯 손가락을 까딱거리다가 다시 떠오른 눈동자에는 각기 다른 색의 이채가 반짝였다.

✔️“라온을 다룰 방법을 바꿔야겠군요.”

✔️“그게 무슨….”

✔️“제거가 아니라 이용으로.”

✔️타천의 입술이 가늘게 말려 올라갔다.

✔️“아무래도 그가 우리의 대의를 도와줄 듯 하네요.”

✔️*     *      *

✔️캬아아아아앙!

✔️적섬의 열선이 보리니 키튼의 장검을 유리장처럼 조각냈다. 그 뒤를 이어 떨어지는 열기가 대련장을 용광로처럼 달궜다.

✔️후우우웅!

✔️검이 깨졌음에도 보리니 키튼의 눈을 죽지 않았다. 반쪽 난 장검을 꼬나쥐고 아지랑이가 피어나는 대련장을 내달렸다.

✔️우우우웅!

✔️부러진 검신에서 지금까지 중 가장 찬란한 빛이 치솟았다. 섬광처럼 뿜어진 강기가 라온의 목을 노리고 나아갔다.

✔️라온 역시 기세를 꺼뜨리지 않았다. 제비가 날듯 무릎과 허리를 낮춘 뒤 아래로 내려간 제천검을 쳐올렸다.

✔️화아아아아!

✔️검날 위에서 꺼지지 않은 불꽃이 반월을 따라 흐르며 보리니 키튼이 마지막 힘을 다해 쏟아낸 강기를 사정없이 찢어발겼다.

✔️파사사삭!

✔️보리니 키튼의 검이 자루조차 남기지 않은 채 가루가 되고, 밝은 은빛을 자랑하던 갑옷이 비틀어져 뜯겨나갔다.

✔️라온은 이 이상 피해가 가지 않도록 제천검을 휘돌려 대련장에 가득 찬 열기를 지웠다.

✔️“후우우.”

✔️보리니 키튼은 뜯겨나간 갑옷을 벗은 뒤 깊은숨을 내쉬었다.

✔️“졌습니다.”

✔️그는 패배를 인정하고서 허리를 숙였다.

✔️“온 힘을 다하고서 진다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군요.”

✔️그 말대로 보리니 키튼의 눈빛은 맑았다. 모든 것을 다 쏟아부어 속 시원한 표정이었다.

✔️“많이 배웠습니다.”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마주 고개를 숙였다.

✔️“아뇨. 제가 더 많이 배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자그마한 사심도 비치지 않았다.

✔️“파, 팔강 1회전! 승자는 설화검협 라온 지그하르트!”

✔️눈치를 보던 사회자가 대련장으로 올라와서 결투의 결과를 외쳤다.

✔️“우와아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설화검협 믿고 있었다!”

✔️“진짜 무인이 뭔지를 보여줬어!”

✔️“평생 응원한다! 라온 지그하르트!”

✔️관객들은 대련장이 흔들릴 정도의 함성을 지르며 라온의 이름을 외쳤다. 모두 한꺼번에 목청을 높여서 귀에서 윙윙거리는 이명이 들릴 정도였다.

✔️라온이 대련장 아래에 있는 육황의 수장들을 보았다.

✔️“음.”

✔️글렌이 자그마하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표현이 옅은 그가 저런 모습을 보였다는 건 나름 만족한다는 뜻이었다.

✔️“멋진 결투였다.”

✔️“너도 제대로 미쳤네. 잘생긴 미친놈이야!”

✔️“둘 다 무인의 자세가 되어 있군.”

✔️레크로스 국왕은 박수를 보냈고, 체임버는 깔깔 웃었으며, 오그람은 마음에 든다는 듯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눈 호강을 한 기분입니다.”

✔️데루스 역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흥겨워 보이는 웃음이겠지만, 실제로는 가식적인 미소일 뿐이다.

✔️지금 놈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느라 바쁜 상태니까.

✔️‘망할 로베르트….’

✔️전생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음지에서 양손에 피와 오물을 묻히는 동안 데루스는 양지에서 사람들의 환호를 즐겼다.

✔️내가 음지에서 로베르트 가문에 반항하는 인간들을 죽이는 동안 데루스는 사람들을 구하고 천검성이라는 이명을 얻었다.

✔️내가 자금을 끌어모으기 위해 거부들을 습격하고 돈과 정보를 훔칠 때 데루스는 식량을 풀어 현군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나와 그림자가 죽을 고생을 하는 동안 데루스는 힘을 키우고, 명성을 쌓은 뒤 그 업적을 이루게 만들어 준 사냥개를 솥에 삶았다.

✔️죽어서도, 다시 살아나서도 용서할 수 없는 쓰레기였다.

✔️내 덕분에 얻은 네놈의 힘과 명성.

✔️‘모조리 빼앗아주마.’

✔️라온이 데루스의 미소를 보며 볼 안쪽을 강하게 씹었다.

✔️‘지금부터 시작이야.’

✔️제대로 된 복수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 내일 놈의 아들인 카디스를 처참하게 깨부수고 나서야 시작 지점에 서는 것이다.

✔️“감사했습니다.”

✔️라온은 속마음을 꼭꼭 싸맨 뒤 데루스를 포함한 육황의 수장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라온 검사님.”

✔️대련장을 내려가려고 할 때 보리니 키튼이 말을 걸어왔다. 그는 검사만이 아니라 뒤에 님이라는 존칭까지 붙였다.

✔️“예?”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는 소속이 있는 몸이라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며 레크로스 국왕에게 다가갔다. 잠시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 다시 대련장으로 올라왔다.

✔️“라온 검사님.”

✔️보리니 키튼이 앞으로 다가온 뒤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저 보리니 키튼은 그 언제, 그 어떤 일이라도 당신의 부탁 세 가지를 수행하겠다고 이 자리에서 맹세합니다.”

✔️“예?”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라온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무슨 말씀을….”

✔️“라온 검사님과 결투를 하며 세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이 못난 인간을 깨우쳐주신 대가로 제 목숨을 걸고 라온 검사님의 부탁을 들어드리겠습니다.”

✔️보리니 키튼이 얼굴을 들어 올렸다. 그의 안색은 다시 태양이 떠오른 듯 밝았다.

✔️“세 가지라면?”

✔️“첫 번째는 사람을 구하는 건 어느 때도 상관없다는 점, 두 번째는 진짜 무인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점,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적을 격려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가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차례로 펼쳤다.

✔️“사실 그 모든 것을 떠나서 라온 검사님이 저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목숨을 구해주신 것만으로도 평생 따라야 하지만, 제겐 이미 목숨을 건 주군이 있으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음….”

✔️라온이 눈을 가늘게 떴다. 보리니 키튼은 지금이 아니라, 미래가 더 기대되는 기사다.

✔️그를 세 번이나 부릴 수 있다는 건 그 어떤 보물과도 바꿀 수 없는 이득이었다.

✔️“이미 전하께서도 허락하셨습니다. 받아주십시오.”

✔️보리니 키튼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조금 전 레크로스 국왕과 했던 이야기가 지금의 맹세였던 모양이다.

✔️‘이걸 허락하다니….’

✔️아무래도 레크로스 국왕은 자신이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무얼 하는 것이냐.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튀어나와 인상을 찌푸렸다.

✔️-공짜 노동력 아니더냐! 당장 받아들여야지!

✔️녀석은 머리가 없는 솜사탕답게 공짜를 좋아했다.

✔️‘기다려봐.’

✔️라온이 고개를 젓고서 한 발 앞으로 다가가 보리니 키튼과 눈을 마주쳤다.

✔️“하나만 여쭈어봐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요.”

✔️“제가 기사의 명예에 어긋나는. 아니, 인간의 거죽을 두른 채로 할 수 없는 부탁을 하면 어쩌려고 그런 맹세를 하시는 겁니까.”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저 데루스를 열받게 할 계획을 짰을 뿐인데, 보리니 키튼의 맹세를 받는다는 게 부담스러웠다.

✔️“지금 그런 말을 하셨으니까요.”

✔️“예?”

✔️“좀 건방져 보일 수 있지만, 제가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맹세를 한다면 대부분은 그 맹세를 받아들이느라 바쁠 겁니다. 시킬 일 따위는 나중에 생각하면 되니까. 일단 받아들이는 데 집중하겠죠.”

✔️보리니 키튼이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당신은 맹세를 받지 않고, 먼저 기사의 명예를 걱정해주었습니다. 바로 그 점이 당신을 믿어도 된다고 생각한 이유입니다.”

✔️그가 오른손으로 본인의 가슴을 쿵 쳤다.

✔️“당신이라면 제가 사람이나, 기사의 길을 버리는 일을 시키지 않을 거라 믿고 있습니다. 제 맹세를 받아주십시오.”

✔️라온이 옅은 숨을 뱉고서 눈을 내리감았다.

✔️-저리 말하는데 빨리 받으란 말이다!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저런 놈들이 수없이 달려들었지만, 네놈은 인망이 거지….

✔️‘좀 가.’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라스를 쭉 밀어냈다.

✔️‘아직은 잘 모르겠어.’

✔️보리니 키튼을 감동시킬 생각 따위는 없었다. 그저 강해지기 위해서 그를 자극했을 뿐인데, 이런 상황이 벌어졌다.

✔️다만 그의 믿는다는 말에 가슴이 뜨거워졌다. 만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상대에게 이런 신뢰를 받는 건 처음이었으니까.

✔️라온이 마음을 정하고서 눈을 떴다.

✔️“받아들이겠습니다.”

✔️보리니 키튼과 눈을 마주쳤다.

✔️“저도 맹세하죠. 당신의 명예에 누가 될 부탁은 절대로 하지 않겠습니다. 보리니 키튼 경.”

✔️“믿겠습니다. 라온 검사님.”

✔️라온이 손을 뻗었다. 보리니 키튼의 손을 잡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우와아아아아아!”

✔️“이게 무인의 싸움이고, 이게 무인의 우정이지!”

✔️“멋지다!”

✔️“창첨검! 창첨검!”

✔️“설화검협!”

✔️관중들은 다시 환호를 터트리며 라온과 보리니 키튼의 이름을 부르짖었다.

✔️라온은 그들의 함성에 손을 들어 화답하고서 대련장을 내려갔다. 억지로 웃는 데루스 그리고 진심으로 웃는 보리니 키튼을 차례로 보고서 입맛을 다셨다.

✔️‘난 아직 사람도, 세상도 모르는 것 같아.’

✔️-맞느니라. 네놈의 조롱은 마왕급이지만, 인간적인 부분은 본왕만도 못한….

✔️‘넌 조용히 하고.’

✔️*     *      *

✔️8강이 모두 진행된 후에도 사람들의 입에서는 라온과 보리니 키튼에 관한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이 마스터 급 결투가 라온과 보리니 키튼만의 무대가 되어버린 듯한 모습이었다.

✔️글렌은 그런 연무장의 난잡함에 미소를 지었다. 모든 곳에서 아끼는 손주의 이야기가. 그것도 좋은 소리만 나오고 있으니 기분이 절로 들떴다.

✔️‘참아야겠군.’

✔️로엔을 시켜서 라온에게 헛소리를 하던 관객들을 암살하려고 했지만 기분이 좋으니 그냥 넘어가 주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돌아가….”

✔️“저도 같이 가요!”

✔️셰릴과 로엔을 데리고 라온이 있을 의무실로 가려 할 때 관객석에서 리메르가 뛰어내렸다.

✔️“너 지금까지 어디서 뭐 하고 있었어.”

✔️셰릴이 리메르를 보며 눈을 흘겼다. 제대로 대답하지 않으면 한 대 칠 기세였다.

✔️“허허, 설마 또 도박을….”

✔️로엔이 부드럽게 웃었지만, 그의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였다.

✔️“에이, 아니지.”

✔️리메르가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다들 잘 모르겠지만, 지금 라온의 이름이 퍼지는 데 일등 공신은 나라고.”

✔️그가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내가 라온을 밀어주지 않았으면 타천이 일으킨 혼돈에 여기 다 날아갔다니까?”

✔️“…….”

✔️글렌은 리메르를 지그시 쳐다보다가 몸을 돌려 의무실이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지랄하네.”

✔️셰릴이 리메르를 보며 혀를 쯧쯧 찼다. 한심하다는 표정 그 자체였다.

✔️“안 되겠다. 너는 지금부터 나한테 처맞고 날아가야겠다.”

✔️“아 진짜라고! 로엔 님! 로엔 님은 저 믿죠!”

✔️“허허, 저는 가주님을 따라가야 해서.”

✔️로엔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고서, 글렌의 뒤를 따라갔다.

✔️“도움은 개뿔! 도박이나 하고 있었을 게 뻔하지! 주머니를 뒤지면 도박권이 수십 장은 나올 걸? 너 오늘은 그냥 안 끝….”

✔️“천검대주.”

✔️셰릴이 리메르를 후려치려고 할 때 글렌이 뒤를 돌았다.

✔️“이만 가도록 하지.”

✔️“예? 예!”

✔️셰릴이 고개를 갸웃거리고서 글렌의 뒤에 붙었다.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매를 좁혔다.

✔️“후우….”

✔️모두가 떠난 뒤에 리메르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야.”

✔️그는 품에 가득한 도박권을 보며 히죽였다.

✔️“다 뜯길 뻔했네.”

✔️*     *      *

✔️라온은 의무실에서 허리를 치료받은 뒤에 연무장으로 향했다. 텅 빈 연무장은 어둠으로 물들었지만, 달빛이 밝아 움직이는 데 큰 지장은 없었다.

✔️스르르릉!

✔️연무장의 중심으로 이동해서 제천검을 뽑았다.

✔️-설마….

✔️라스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들었다.

✔️-또 수련하려고?

✔️‘당연한 걸 왜 물어.’

✔️라온이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학습을 했으면 복습을 해야지.’

✔️오늘 마티스와 보리니 키튼을 상대하며 광아검, 설풍검결만이 아니라, 예검과 정검의 성취마저 상승했다. 잠을 자기 전에 성장을 확인하지 않는다면 기껏 쌓은 실력이 줄어들 것이다.

✔️-지겨운 걸 떠나서 이젠 네놈이 질리느니라….

✔️라스가 고개를 절래절래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겨운 걸 잘해야 뛰어난 무인이 되는 법이지.’

✔️-그게 아니니라! 이 지독한 놈아!

✔️녀석은 빽 소리를 지르다가 인상을 찌푸리고 어깨에 내려섰다. 말하는 것도 지친다는 표정이었다.

✔️‘도리안이 걔를 데리고 올 때까지만 할게.’

✔️-걔?

✔️라온은 대답하지 않고 제천검을 내리쳤다. 사나우면서도, 예리한 광아검의 초식이 밤공기를 갈랐다.

✔️‘좋군.’

✔️예검과 정검의 성취가 오르면서 목줄 풀린 맹수였던 광아검에 날카로움과 정확성이 깃들었다.

✔️검세 하나하나에 섬뜩할 정도의 예기가 치솟았다.

✔️‘더 큰 변화는 설풍검결이지.’

✔️홀로 수련하여 실전이 부족했던 설풍검결에도 섬뜩한 송곳니가 돋아났다. 적의 흐름을 물어뜯어서 끊어버릴 예리한 칼날이 연무장에 깊게 새겨졌다.

✔️‘아직 끝이 아니야.’

✔️앞으로도 더 나아갈 수 있어.

✔️라온은 광아검과 설풍검결을 연달아 펼친 뒤에 검을 내렸다. 만족스러움에 미소를 짓고 있을 때 나무 위에서 작은 뱁새가 날아와 칼등 위에 앉았다.

✔️“이 녀석은….”

✔️높은 경지에 오른 검사의 검에는 자연스러움이 묻어나 야생 동물이 다가온다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다.

✔️‘내가 그 경지라는 건가?’

✔️아직 한참 멀었을 텐데.

✔️자연스러운 검이 무엇인지도 모르기에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조금은 기분이 좋아졌다.

✔️“이 시간에 수련한 보람이….”

✔️“잘했어.”

✔️옅은 미소를 지을 때 뱁새가 고개를 모로 틀면서 입을 열어 사람의 말을 뱉었다.

✔️“아….”

✔️라온의 입이 떡 벌어졌다. 저 말투만으로 누구인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빠르게 기막을 펼쳐서 소리가 새어 나가는 걸 막았다.

✔️“머, 멀린?”

✔️“이제 잘 알아보네.”

✔️멀린이 뱁새의 입으로 조롱조롱하게 웃었다.

✔️“너 간 거 아니었어?”

✔️“네가 위험한데 내가 어딜 가겠니.”

✔️그녀는 왜 당연한 걸 묻냐는 듯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허어억!

✔️라스가 멀린을 보며 움찔 몸을 떨었다.

✔️-과, 광녀! 진짜 광녀이니라! 머리에 집착의 칼이 꽂혔느니라!

✔️녀석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서 얼음꽃 팔찌 속으로 숨었다.

✔️“혼돈이 완성되기 전에 마나를 깎아내다니, 완벽한 대응이었단다. 아름다웠어.”

✔️“하….”

✔️머리가 아파 온다. 그런 식으로 인사를 하고 떠났으면 한동안 못 볼 줄 알았는데, 바로. 그것도 뱁새의 모습으로 나타났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여자였다.

✔️“보리니 키튼과 레크로스 국왕의 신뢰까지 얻었으니, 최고의 결과라 봐도 되겠지.”

✔️멀린은 뱁새의 모습으로 히죽히죽 웃었다. 귀여움과 소름 끼침이 동시에 올라오는 건 참으로 신기한 경험이었다.

✔️“이제 타천도 함부로 못 움직일 거야. 정말 수고 많았어.”

✔️“언제부터 본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난 항상 널 지켜 보고 있단다.”

✔️“으….”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팔뚝에 닭살이 올라왔다.

✔️“이 아이로 네 싸움을 지켜보느라 오래는 못 버티네.”

✔️멀린을 담고 있는 뱁새의 날개가 파르르 떨렸다.

✔️“더 높이 날아오를 네 모습을 기대하고 있을 게.”

✔️그녀가 떨리는 날개를 들어 마지막 인사를 했다. 다만 저래 놓고서도 금세 또 나타날 것만 같아서 불안해졌다.

✔️“아, 이 아이에게는 곡식을 좀 나눠주렴. 그런 약속이었으니까.”

✔️“네 약속을 왜 자꾸 나한테….”

✔️짹.

✔️따지려고 했지만, 이미 혼이 교체된 듯 뱁새는 까뭇한 눈동자로 이쪽을 올려보았다. 통통 튀며 칼등을 밟고 올라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빨리 곡식을 내놓으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떨궜을 때 연무장 문이 열리고 도리안이 들어왔다.

✔️“부단주님. 불렀어요. 곧 올거에요.”

✔️“마침 잘왔다.”

✔️라온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도리안에게 손짓했다.

✔️“혹시 곡식 좀 있어?”

✔️“곡식? 당연히 있죠!”

✔️도리안이 활짝 웃으며 배 주머니에서 열 개의 원통을 꺼냈다.

✔️“뭘 드릴까요? 보리, 쌀, 조, 콩, 수수, 밀, 옥수수? 더 있으니까. 말만 하세요!”

✔️“피곤해….”

✔️라온이 픽 숨을 내쉬었다. 수시로 나타나는 멀린 때문인지, 모든 물건을 다 가지고 다니는 도리안에게도 지치는 느낌이었다.

✔️“이 녀석이 먹어야 하니까 좀 골라 줄래?”

✔️라온이 뱁새를 가리켰다. 전에 새들이 조와 수수로 만든 사료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지만, 뱁새가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다 달라고 했다.

✔️“요 녀석에게 먹이를 주시려는 거군요!”

✔️도리안은 어느새 라온의 손까지 올라간 뱁새를 보며 통을 열어 곡식을 모두 꺼냈다. 테이블 위에 곡식을 줄줄이 펼쳐서 뷔페를 만들어 주었다.

✔️짹!

✔️뱁새는 날개를 퍼덕이면 곡식뷔페에서 본인이 원하는 곡물들을 맛나게 즐겼다.

✔️“으헤헤. 이 녀석 귀여운데요?”

✔️도리안이 배가 포동포동해진 채 드러누운 뱁새를 보며 헤헤 웃고 있을 때 연무장의 문이 조용하게 열렸다.

✔️라온이 뒤를 돌아보고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왔군.”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𝟑
✔️제323화

✔️연무장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발카르의 왕녀 제이나였다. 그녀는 짜증이 가득 차오른 고양이 같은 표정으로 라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불렀지?”

✔️“왜 불렀지? 아직도 교육이 부족하네. 아니, 머리가 나쁜 건가?”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흘리며 도리안에게 손을 뻗었다.

✔️“도리안.”

✔️“옙!”

✔️도리안은 기다렸다는 듯 배 주머니에서 새하얀 종이 한 장을 꺼내주었다. 말할 필요가 없는 녀석이라 참으로 편했다.

✔️“고마워.”

✔️라온은 도리안에게 받아든 종이를 펼쳤다. 특별 계약서. 포르반 시에서 제이나를 구해준 뒤 그녀의 목에 채워두었던 목줄이었다.

✔️“으윽….”

✔️제이나 왕녀는 특별 계약서를 보고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떠올랐다기보다는 분노만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잊어버린 게 아니었군.’

✔️분했던 거야.

✔️제이나가 오자마자 반말을 한 건 특별 계약서를 잊어서가 아니라, 알고 있으면서도 가슴 속 울분을 참지 못한 반항이었던 것 같다.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제멋대로 살았던 발카르의 왕녀이니, 그 감정을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내 앞에서는 아니지.’

✔️다른 이들이라면 제이나의 외모나 배경을 보고 이해해줄 수도 있겠지만, 자신은 아니다.

✔️외모야 인간의 거죽일 뿐이고, 제이나에게 좋은 감정이나 기억 따위는 없으니, 그녀를 좋게 볼 이유가 없었다.

✔️-쯧쯧.

✔️라스가 제이나를 내려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감정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드러내다니, 멍청하기 그지없는 인간이니라.

✔️‘…….’

✔️‘네가 할 말이냐?’라는 말이 나올 뻔했지만 꾹 참았다.

✔️“전에 말했지? 내 앞에서는 꼬박꼬박 존댓말을 하라고.”

✔️라온이 특별 계약서를 가볍게 흔들고서 미소를 지었다. 제이나의 눈동자가 계약서를 따라 또로록 돌아갔다.

✔️“…왜 불렀어요.”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으으, 왜 부, 부르셨어요.”

✔️제이나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주먹을 말아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좋은 정보를 주기 위해서.”

✔️“정보라구요?”

✔️“그래. 네가 내일 싸우게 될 마르타 지그하르트에 관한 정보.”

✔️“그게 무슨….”

✔️제이나의 눈이 튀어나올 정도로 커졌다. 이쪽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그 전에 몇 가지 질문을 하지.”

✔️라온이 턱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제이나가 눈매를 찡그리며 한 발 앞으로 다가왔다.

✔️“최근 로베르트 가문과 발카르 사이에 만남이 잦았다던데, 무슨 말이 오간 거지?”

✔️이 정보는 비연회주와 데닝로즈의 정보에 모두 나와 있던 내용이다. 지그하르트는 두 세력 모두를 견제하고 있기에 그리 이상한 질문은 아니었다.

✔️“그….”

✔️“말해.”

✔️“과, 광산에 관한 일이에요.”

✔️“광산? 로베르트에?”

✔️“로베르트 인근 해안에 있는 해저 광산을 뚫는데, 바다 아래에 있어서 무너지지 않게 땅과 광물을 조심스럽게 팔 수 있는 마법을 개발해달라는 요청이었어요.”

✔️제이나는 특별한 비밀이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바로 광산에 관한 이야기를 말해 주었다.

✔️‘해저 광산이라….’

✔️그런 건 없을 텐데?

✔️암살자 훈련을 받으며 로베르트 인근의 바다는 전부 돌아다녔었다. 수없이 돌았던 그 바다에 광산 따위는 절대 존재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아!’

✔️설마 그 던전이 열린 건가?

✔️로베르트 가문 근처의 바다 아래에 이름 모를 던전이 하나 있었는데, 무슨 수를 써도 문이 열리지 않았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그 던전의 문이 열린 것 같았다.

✔️“혹시 마법사를 파견해달라고는 안 했어?”

✔️“우리도 그게 편할 거라고 했는데, 본인들이 한다고 마법을 개발해달라고 했었어요.”

✔️제이나가 귀찮게 굴었다며 살짝 눈매를 찡그렸다.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겠군.’

✔️로베르트와 발카르는 나름 사이가 좋다. 정말 광산을 파는 일이라면 전문가를 요청했을 것이다.

✔️던전의 비밀을 알리지 않기 위해서 마법사가 아닌, 마법을 요구한 게 분명했다.

✔️“그 마법을 전해준 게 언제지?”

✔️“이번 회의에요.”

✔️제이나는 이번 회의에서 체임버의 조수가 데루스의 보좌관에게 마법서를 건넸다고 말했다.

✔️“그렇군.”

✔️라온이 주먹을 꾹 말아쥐며 미소를 흘렸다.

✔️‘그럼 아직 기회가 있다는 건데….’

✔️아무래도 데루스를 엿 먹일 수 있는 또 하나의 기회가 생겨난 것 같았다.

✔️‘내가 못 먹어도 상관없어. 놈도 못 가지게 하면 되니까.’

✔️던전 내부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상관없다. 가서 던전의 보물을 못 챙길 것 같으면 무너뜨려서 데루스도 아무것도 못 가지게 하면 되니까. 손해 볼 것 하나 없는 기회였다.

✔️“그 외에는?”

✔️“다른 마법을 의뢰한 것도 있고, 동맹을 좀 더 공고하게….”

✔️제이나가 몇 가지 더 말해 주었지만 딱히 영양가 있는 부분은 없었다.

✔️“그럼 이제 내가 알려줄 차례군.”

✔️“어….”

✔️“마르타의 속성은 대지다. 하지만 다른 대지 속성의 검사와는 성향이 달라. 불이나 바람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무직한 공세를 마구잡이로 퍼부으니까. 특히 힘과 속도 위주의 검술인 중쇄검은….”

✔️라온은 제이나에게 현재 마르타의 경지와 검술의 흐름에 대해 알려주었다. 완벽하게는 아니에도 승패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는 충분했다.

✔️“당신….”

✔️제이나는 마르타의 정보를 모두 듣고 나서 입술을 꾹 깨물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죠?”

✔️“뭐가?”

✔️“난 당신이 불렀다고 들었을 때 기권하라는 말을 할 줄 알았어…요. 오히려 마르타의 정보를 주다니 대체 무슨 생각이냐…구요.”

✔️“말꼬리 늘리지 마.”

✔️“윽….”

✔️“대답은?”

✔️“알겠어요.”

✔️그녀는 자존심이 상했는지 시선을 내렸다.

✔️“왜 네게 마르타의 정보를 줬냐면….”

✔️달빛을 받은 라온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빛났다.

✔️“인간은 시련을 겪어야 강해지는 법이니까.”

✔️“그래서 억지로 시련을 만든다고요?”

✔️제이나가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이해를 못 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여섯 세력의 자존심이 걸린 이 대회에서?”

✔️“그래.”

✔️라온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패배한다면….”

✔️“그래도 의미가 있다. 패배를 아는 자와 모르는 자의 차이는 크거든.”

✔️버렌과 루난은 서로가 가진 실력을 모두 끌어내서 싸운 덕분에 한층 더 성장했다. 마르타도 그 둘처럼 이 대회를 통해 성장하기를 바라기에 내려주는 시련이었다.

✔️약점을 아는 제이나를 꺾고, 삼왕자와 싸워 이긴다면 마르타 역시 더 높은 곳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

✔️“네 이해 따위는 바라지도 않아.”

✔️라온이 가볍게 손을 저어서 특별 계약서를 흔들었다.

✔️“정보는 줬으니, 제대로 싸워. 어설프게 싸우다 지면 이 계약서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테니까.”

✔️“끄윽….”

✔️“뭘 시켜볼까. 발카르의 국보라도 가지고 오게 할까?”

✔️“젠장….”

✔️제이나는 입을 꾹 내민 채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게 처음이라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것 같았다. 처음부터 잘난척하는 꼴을 봐서 그런지 속이 시원했다.

✔️“후우….”

✔️그녀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육황의 직계라고 감정의 회복은 빨랐다.

✔️“그럼 이걸로 명령 2개가 지워지는 거죠?”

✔️“명령 2개?”

✔️“로베르트 가문과 발카르의 거래에 대해 말해줬고, 내일 있을 마르타 지그하르트와의 명령까지 하면 부탁 2개잖아요.”

✔️“너 뭘 착각하는 거 아니야?”

✔️“어…?”

✔️“난 한 번도 부탁이나 명령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라온이 피식 웃으며 특별 계약서를 펼쳐주었다. 그 안에는 여전히 3개의 명령이라고 적혀 있었다.

✔️“왜….”

✔️제이나의 눈동자가 손으로 말아쥔 종이처럼 구겨졌다.

✔️“부, 분명 나한테 말하라고….”

✔️“계약서의 내용은 명령. 난 네게 부탁을 했지, 명령 따위는 하지 않았어.”

✔️사실이다. 계약서를 보여주며 하라고만 말했다. 명령한다는 말 따위는 한 번도 꺼내지 않았다.

✔️“이이익!”

✔️그녀가 당장 덤벼들 것처럼 마나를 일으키며 이를 드러냈다.

✔️“이 악마 같은 자식! 네가 협객이라니, 개소리야! 넌 마계에서 올라온 악마라고!

✔️-이런 놈은 마계에도 없느니라….

✔️라스가 제이나의 말을 받아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계의 악마? 그 정도면 칭찬인데?”

✔️라스도, 광풍단도 요즘에는 마왕이라 부르고 있기에 악마나 마귀로는 간에 기별도 안 갔다.

✔️“이야기는 끝.”

✔️라온은 도리안에게 다시 특별 계약서를 넘겨주었다.

✔️“어우….”

✔️도리안은 무섭다는 듯 목을 떨고서 배 주머니에 계약서를 넣었다.

✔️“그럼 내일 잘 부탁할게.”

✔️라온은 바득바득 이를 가는 제이나의 어깨를 두드리고서 연무장을 나갔다.

✔️“시이이이이이발!”

✔️숙소로 돌아가려 할 때 연무장 안에서 제이나의 욕이 폭풍처럼 터져 나왔다.

✔️“저, 저래도 돼요?”

✔️도리안이 아직도 비명이 들려오는 연무장을 돌아보고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죽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리고 저쪽이 먼저 시작했잖아.”

✔️기회를 주었음에도 두 번이나 시비를 걸었던 건 제이나다. 오늘도 반성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니, 좋은 교육이 될 것이다.

✔️“아 그것도 그건데 마르타 님이….”

✔️“괜찮아. 걔는 품은 게 많아서 그 정도는 이겨줘야 해.”

✔️라온이 걸음을 멈춘 뒤에 어두운 하늘을 올려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것도 못 하면 광풍단 조장 때려치워야지.”

✔️*     *      *

✔️데루스 로베르트는 마티오의 침상 앞에 앉은 채 턱을 까딱였다.

✔️“마티오.”

✔️그의 부름에 죽은 듯 누워 있던 마티오의 눈이 뜨였다. 가라앉은 눈동자에 잠시 분노가 비쳤지만 금세 사라졌다.

✔️“…예.”

✔️마티오는 다시 기절할 듯한 고통을 참으며 대답했다. 목소리는 갈라졌지만 정신은 흔들리지 않았다.

✔️“라온을 본 감상은?”

✔️“마, 마지막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그전까지 암살자의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확실한가?”

✔️데루스가 마티오를 내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예. 지, 지그하르트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전형적인 검사의 움직임과 기질이었습니다.”

✔️마티오는 고통스러운지 턱을 떨며 대답했다.

✔️“암살자와 비슷한 자세를 취하기도 했지만, 전부 검사들도 할 법한 행동과 자세였기에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놈에게서 암살자 성향 따윈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널 공격했던 행위는 어떻게 생각하지?”

✔️“후우….”

✔️마티오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암살자로서 감정을 지우고, 객관적인 답을 내리기 위해 마음을 안정시키는 행위였다.

✔️“놈의 말대로 그 장소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대련장이었습니다. 보리니 키튼에게 허리를 크게 베였고, 타천의 마법을 지우느라 여유가 없었기에 가장 가까웠던 제 앞에 검을 내리찍는 건 솔직히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라온에게 분노한 것과 달리 그 행동만큼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굉장히 현명했다고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본 결과 라온 지그하르트와 라온은 관계없다고 보입니다.”

✔️“그게 라온을 키웠던 네 판단인가?”

✔️“예. 감정을 배제한 객관적인 판단입니다.”

✔️마티오는 전신을 찢는듯한 통증을 꾹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쉬어라.”

✔️“아, 아닙….”

✔️데루스가 고개를 끄덕이고서 손을 젓자, 마티오가 눈을 내리감은 채 고개를 돌렸다.

✔️“흐음….”

✔️데루스가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손등의 상처는 말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마티오는 쉬게 하고 이만 돌아가도록 하지.”

✔️“가주님.”

✔️데루스가 일어나려고 할 때 그의 보좌를 맡은 양지의 집사 레젤이 입을 열었다.

✔️“도련님께 내린 지시도 취소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레젤이 송구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며 말을 이었다.

✔️“오늘 본 바로 글렌 지그하르트는 광풍단을 아끼는 게 분명합니다. 카디스 도련님이 라온 지그하르트의 팔을 잘랐다가는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잘 봤군. 광풍단 중에서도 특히 라온을 아끼는 듯 보이더군.”

✔️“그럼….”

✔️“그러니 놔둬야지.”

✔️데루스 로베르트가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글렌 지그하르트의 속을 알 수 있는 몇 없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잖아. 정말 라온을 아끼는지, 팔이 잘리면 어떻게 나올지를 지켜봐야지.”

✔️그는 아들의 목숨이 걸려 있는 일임에도 냉정한 미소를 흘렸다.

✔️데루스와 레젤은 라온의 전투를 보고서도 카디스가 결국 이기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말리기보다 더 자극해주는 게 좋겠지. 안 그래도 화가 많이 났던데.”

✔️데루스가 어둑해진 창밖을 보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관객들이 계속 라온의 이름만을 불렀기에 카디스 로베르트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고도 거의 환호를 받지 못해 짜증이 극에 올라 있는 상태였다.

✔️“네가 카디스를 조금 더 자극해주도록.”

✔️“알겠습니다.”

✔️카디스를 걱정하던 레젤은 주인의 명령에 감정을 지우고 고개를 끄덕였다. 음과 양으로 나뉘지만 마티오와 레젤은 모두 데루스의 말에 무조건 따르는 인형일 뿐이었다.

✔️“발카르에서 내어준 마법은 확인했나?”

✔️“예. 요구한 그대로였습니다.”

✔️레젤이 자세를 바로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몇백이 죽든 상관없어.”

✔️데루스의 눈동자에 핏빛 욕망이 드러났다.

✔️“그 아래에 묻혀있는 고대의 보물만 가져와.”

✔️*     *      *

✔️짹짹.

✔️숙소 바닥에 앉아 있던 라온이 맑은 새소리에 눈을 떴다. 긴장하면서 고개를 들었는데, 아침 햇살과 함께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새의 지저귐이었다.

✔️‘멀린은 아니로군.’

✔️평생 긴장하면서 살아야 하는 건가.

✔️언제 어디서 멀린이 나올지 모르기에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겁쟁이 녀석.

✔️라스가 차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서워서 긴장하다니, 네놈의 간땡이는 콩알만도 못하구나.

✔️‘네가 제일 무서워했잖아.’

✔️집착이 싫다며 숨어놓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지, 집착 트라우마 때문에….

✔️‘트라우마?’

✔️라스에게 트라우마를 심을 정도면 분명 평범한 마족은 아닐 거다.

✔️‘네가 겁을 먹을 정도면 엄청 강하겠네.’

✔️-겁먹은 게 아니라니까! 똥이 무서워서 피하느냐? 더러워서 피하지!

✔️‘그건 맞네.’

✔️라온이 피식 웃었다. 마계에서도 미친놈은 상대하는 게 아니라, 피하는 모양이다.

✔️‘꽤 강한가 보지?’

✔️-귀찮을 뿐이지, 본왕의 상대는 아니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는 최강의 무력을 지닌 마왕으로 따라올 자가 없는 무적의….

✔️라스는 집착에 떨다가 갑자기 본인 자랑을 시작했다. 감정 기복만큼은 정말 마왕급이다.

✔️“에휴.”

✔️라온은 라스의 자랑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몸 상태를 점검했다. 허리의 외상과 부풀어 오른 마나회로가 완벽하게 회복되지는 않았지만 싸우는 데 큰 문제는 없었다. 잠을 자지 않고 불의 고리와 만화공을 운용한 보람이 있었다.

✔️-지금도 본왕을 그리워하는 마족들은 많을 것이다. 왜 그리워한다고 생각하느냐? 그래. 이 강대한 무력! 바다와도 같은 마력에 빠져서….

✔️‘끝나질 않네.’

✔️아직도 이어지는 라스의 자랑을 무시하고, 제복으로 갈아입을 때 눈앞으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영격 마법 <음양>을 베었습니다.]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높은 경지의 강자를 상대로 승리하셨습니다.]

✔️[진혼검의 특성 <마법 요혈>의 등급이 2단계 상승 상승합니다.]

✔️[진혼검의 요기가 상승합니다.]

✔️[특성 <진법 해석>의 등급이 상승합니다.]

✔️[모든 능력치가 8포인트 상승합니다.]

✔️어제 타천의 마법을 베고, 부상 상태에서 보리니 키튼을 꺾은 보상이 지금에서야 나타났다. 육체와 정신이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한 번에 2단계인가?”

✔️타천의 혼돈을 깎아낸 덕분에 <마법 요혈>의 단계가 단번에 3성으로 올라갔다. <진법 해석> 특성도 상승하고, 진혼검의 요기까지 올라간 걸 보면 마법을 벤 대가로는 과할 정도의 보상이었다.

✔️우우우우웅!

✔️진혼검도 마음에 드는지 청명한 검명을 울렸다.

✔️-이, 이게 무엇이냐!

✔️계속 본인의 자랑을 하던 라스가 입을 떡 벌렸다.

✔️-고작 그걸 베었다고 저런 보상을 주면 본왕은 어쩌라는 거냐! 아예 바닥까지 긁어서 퍼주는….

✔️‘너 마계에서도 손꼽을 정도로 강하다며.’

✔️-어….

✔️‘이 정도 보상을 넘겨 줫다고 부담될 정도면 약한 거 아니야?’

✔️-그, 그게 아니라….

✔️“자비로운 분노의 마왕에게 이 정도 보상은 바다에서 바가지 하나 퍼주는 정도잖아. 안 그래?”

✔️-그렇지! 그렇느니라!

✔️라스는 본인이 조금 전까지 떠든 자랑이 있기에 눈물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점까지 아낌없이 주는 나무 그 자체였다.

✔️라온이 어색하게 웃는 라스에게서 고개를 돌려 메시지의 마지막 부분을 보았다.

✔️‘특성의 상승은 환영이지만, 능력치는 좀 애매하군.’

✔️좋지 않다는 게 아니다.

✔️곧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할 전투가 있는데, 완벽에 가깝게 다듬은 육체에 오차가 생긴다는 점이 조금 아쉬웠다.

✔️‘아니지.’

✔️첫 상대가 참룡수잖아.

✔️카디스를 짓밟기 전에 먼저 싸워야 할 참룡수라면 강해진 육체를 적응시키는데 제격의 상대였다.

✔️‘힘 싸움 좋지.’

✔️육황 중 최강의 육체를 지녔다는 야수연맹의 무인과 힘 싸움을 벌이는 것도 나름 재미있을 것 같았다.

✔️라온이 겉옷을 걸치고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보드랍게 이지러지는 햇살을 보며 제천검을 움켜쥐었다.

✔️‘오늘이 지그하르트의 이름이 육황 중 가장 높은 곳에 걸리는 날….

✔️-그 전에 밥부터 먹자꾸나.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네놈에게 능력치를 빼앗겨서 속이 허하느니라.

✔️라스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배를 문질렀다.

✔️‘제발 분위기 파악 좀 하자….’

✔️라온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𝟒
✔️제324화

✔️라온은 어제처럼 광풍단과 함께 대련장으로 들어갔다.

✔️“우와아아아아아!”

✔️“지그하르트다!”

✔️“설화검협이 왔다아아아!”

✔️“선풍검도 옆에 있어!”

✔️“청월검! 제발 좀 웃어줘!”

✔️관객들의 반응은 어제와 180도로 달랐다. 무시하고 조롱하던 사람들이 지그하르트의 이름을 외치며 고막을 터트릴 듯한 환호를 터트렸다.

✔️이 어마어마한 함성은 같은 세력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기절할 정도로 싸웠던 버렌, 루난과 대련장의 모두를 구하고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도 보리니 키튼을 꺾은 라온 덕분이었다.

✔️라온은 광풍단을 데리고 단상 앞으로 향했다. 어제와 달리 단상 위에는 육황의 수장들이 앉아 있었다.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군.’

✔️글렌은 무표정이었고, 레크로스 국왕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체임버는 대답하지 않는 글렌에게 계속 질문을 던졌다.

✔️오그람은 지루한 듯 하품을 했고, 데루스는 어제 보여주었던 가식적인 웃음을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라온과 광풍단은 수장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뒤 대기 좌석으로 향했다.

✔️“선풍검이 누군데 저렇게 부르는 거지?”

✔️버렌이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라온이 피식 웃으며 버렌을 가리켰다.

✔️“나, 나라고?”

✔️버렌은 아직 다 낫지 않아서 반쯤 감겨 있던 눈을 부릅떴다.

✔️“그래. 선풍검은 네 이명이야. 검에서 일어난 바람을 운용하는 것을 보고 선풍검이라고 부르던데.”

✔️“이명. 내 이명….”

✔️그는 주먹을 꾹 말아쥔 채 고개를 떨었다. 계속 이명을 가지고 싶다고 했는데, 사람들이 지어준 멋진 이명에 감격한 것 같았다.

✔️“루난. 넌 청월검이야. 검에서 푸른 서리가 피어나는 게 꼭 겨울의 달빛 같다고 했지.”

✔️“청월검….”

✔️루난은 청월검이라는 말을 몇 번 중얼거리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간다. 감정표현이 옅은 그녀에게도 아름다운 이명은 기쁜 모양이다.

✔️“나는?”

✔️마르타가 다가와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넌 없어.”

✔️“난 왜 없엉!”

✔️오랜만에 마르타의 혀가 꼬였다.

✔️“넌 부전승으로 올라가서 버렌이나, 루난처럼 파격적인 인상은 못 줬잖앙.”

✔️라온이 키득거리며 마르타의 말투를 따라 했다.

✔️“보여준 게 없으니, 이명도 없지.”

✔️비웃듯이 입꼬리를 올렸다. 자극하려고 한 말이지만, 거짓말은 아니다. 마르타는 부전승으로 4강에 올라갔기에 버렌과 루난에 비해 인상이 옅었다.

✔️“빌어먹을. 내가 부전승하고 싶어서 했냐고….”

✔️그녀는 혼자 이명이 없는 게 짜증 났는지 입술을 질겅 씹었다.

✔️“오늘 제이나 왕녀와 그리어 왕자를 꺾는다면 원하지 않아도 생길 거야.”

✔️라온이 마르타를 내려보며 눈빛을 가라앉혔다.

✔️“할 수 있겠지?”

✔️“당연히.”

✔️마르타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 안 해주는 것이냐?

✔️‘뭘?’

✔️-그 싸가지에게 소고기 소녀의 장단점을 다 말해준 것 말이니라.

✔️‘말해줘야지. 지금 말고 이따가.’

✔️-음?

✔️‘한창 싸우면서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 말해주면 더 재밌잖아.’

✔️제이나가 마르타의 약점을 이용하여 대련을 유리하게 끌고 나갈 때쯤 비밀을 밝힌다면 더 큰 자극이 될 것이다.

✔️-허어….

✔️라스는 라온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을 떡 벌렸다.

✔️-네놈 어디 가서 마족이라는 소리 절대로 하지 마라.

✔️‘음? 왜?’

✔️-마계에서도 네놈 같은 미친놈은 없으니까!

✔️*     *      *

✔️사회자가 단상 위로 올라가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오러를 가득 채운 목소리가 대련장 전체를 울렸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금부터 육황 결투 대련 익스퍼트 급 4강을 진행하겠습니다!”

✔️“우와아아아아아!”

✔️“드디어 시작이다!”

✔️“어제 잠도 못 잤다고!”

✔️“삼왕자님 믿습니다!”

✔️“제이나 왕녀님! 발카르에 영광을!”

✔️“마르타! 다른 지그하르트처럼 다 깨부수라고!”

✔️관객들은 함성을 지르며 축제의 열기를 더했다.

✔️“아쉽게도 4강 경기는 하나밖에 없지만 두 경기 이상의 호쾌함을 보여줄 것이라 확신합니다! 첫 번째 경기! 마르타 지그하르트 대 제이나 루인 발카르! 대련장으로 올라와 주십시오!”

✔️사회자의 외침에 마르타가 짧게 숨을 내쉬고 대련장으로 올라갔다. 반대편에 있던 제이나는 어제의 울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라온을 노려보다가 대련장으로 뛰어올랐다.

✔️“두 분 준비되셨습니까?”

✔️“네.”

✔️“됐습니다.”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대련장 아래로 내려갔다.

✔️“그럼 육황 결투 대련 4강 1회전 시작합니다!”

✔️그가 손을 올리자마자 마르타가 땅을 박찼다. 멧돼지라도 된 듯 거칠게 내달려 검을 내리쳤다.

✔️“음….”

✔️제이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공간을 접은 듯이 움직여 마르타의 간격을 빠져나갔다. 공간 마법을 응용한 이동기 접바람이었다.

✔️콰아앙!

✔️마르타는 검으로 대련장 바닥을 내리친 힘을 이용하여 몸을 돌렸다. 다시 제이나를 쫓으며 더 많은 오러를 끌어올려 속도를 높였다.

✔️터어엉!

✔️마르타의 보법은 제이나의 간격에 들어가기 직전 급속하게 빨려지며 순식간에 공간을 파고들었다.

✔️“흥.”

✔️제이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당황하지 않고, 접바람을 이용해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진짜였어….’

✔️라온이 알려주었던 마르타의 움직임과 호흡은 거짓이 아니었다. 미리 듣지 않았다면 방금 보여준 폭발적인 보법에 당했을 수도 있었다.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로 이용해주지.

✔️제이나가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투석기로 날리는 돌처럼 거세게 다가온 마르타의 검격을 피해냈다.

✔️“반거울!”

✔️그녀가 오른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며 좌측으로 밀어내자, 마르타가 쇠망치에 얻어맞은 것처럼 거세게 튕겨 나갔다.

✔️“크윽….”

✔️마르타는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피를 손등으로 훔치고서 재차 달려들었다. 몸이 풀렸는지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였지만, 무학의 흐름은 변하지 않았다.

✔️라온의 조언을 받침대 삼아 접바람을 연속으로 펼쳐서 마르타의 공격을 벗어난 뒤 손가락을 까딱였다.

✔️치이이잉!

✔️공간이 가늘게 접히며 마르타의 어깨와 팔에서 시뻘건 핏물이 치솟았다. 공간 마법을 응용해서 위력을 높인 절삭 마법이었다.

✔️“후후.”

✔️제이나는 인상을 찌푸린 마르타를 굽어보며 차가운 웃음을 흘렸다.

✔️‘네가 지는 이유는 네 부단주가 미쳐 있기 때문이야.’

✔️*     *      *

✔️콰아아앙!

✔️마르타는 제이나가 찢어버린 공간을 벗어나며 입술을 깨물었다.

✔️‘저거 대체 뭐지?’

✔️제이나의 공간 마법이 위험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체술에도 재능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자신의 움직임과 오러의 흐름을 모두 아는 듯이 움직여서 도통 공격을 맞출 수가 없었다.

✔️특히 위험한 순간에 사용하는 이동 마법 때문에 허초로 예측을 벗어난 공격을 할 수도 없었다. 이쪽의 심리를 모두 파악당한 기분이었다.

✔️“쯧.”

✔️마르타가 혀를 짧게 차고서 땅을 박찼다. 제이나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좌측으로 길목을 막으면서 돌진했지만, 그녀는 블링크 같은 마법을 사용해서 바로 우측으로 빠져나갔다.

✔️다시 쫓으려 했지만, 보법을 쓰려는 바닥에 공간 마법을 걸어 또 한 번 제동을 걸어왔다.

✔️치이이잉!

✔️마르타는 인상을 찡그린 채 발목과 머리 위에서 돋아난 공간 마법을 잘라낸 뒤 검기를 연속으로 뿌렸다.

✔️콰아아아아아!

✔️제이나의 시야를 검기로 막은 뒤 좌측으로 짓쳐 들었다. 물러났을 때를 대비해 왼손에도 오러를 끌어모았다. 사위를 막는 방향이었기에 먹힐 거라는 확신을 가지고 검을 내리쳤다.

✔️“느려.”

✔️제이나는 코웃음을 치고서 검기가 없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허공을 잡고 밀어내서 순식간에 반대편 공간으로 이동했다.

✔️‘뒤편에서 공격하려는 것도 알아차린 건가?’

✔️바로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 것을 보면 좌측, 우측만이 아니라, 뒤에서 주먹을 날리려는 것도 파악한 것 같았다.

✔️‘내 공격 흐름을 다 아는 것 같아.’

✔️파악될 정도로 많은 것을 보여주지는 않았는데.

✔️[1번 조장.]

✔️마르타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 때 라온에게서 오러 메시지가 들려왔다.

✔️‘뭐야. 지금 바쁜….’

✔️[저 싸가지 왕녀가 너를 너무 잘 아는 것 같지 않아?]

✔️‘어?’

✔️그 간드러진 목소리에 턱이 떨려왔다.

✔️‘설마 너….’

✔️[그 설마가 맞아. 내가 네 정보를 말해줬거든.]

✔️마르타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돌렸다. 라온이 빙긋 웃으며 윙크를 했다.

✔️‘저 망할 새끼가 진짜….’

✔️[그럼 열심히 해보라고.]

✔️라온은 힘내라는 듯 손을 흔들었다. 그 손을 뽑고 싶을 정도로 분노가 솟구쳤다. 앞에서 까부는 제이나 왕녀보다 저 밑에 있는 라온의 주둥이를 후려치고 싶었다.

✔️“이제 발악도 끝이야?”

✔️제이나가 차게 웃으며 두 손을 사선으로 내렸다. 양쪽 공간이 접히며 어깨를 짓눌러왔다.

✔️“발악? 발아아아아악? 이 더러운 것들이!”

✔️마르타가 분노를 폭발시키며 타이탄의 오러를 모조리 일으켰다. 그녀의 단전에서 치솟은 황색 기운이 제이나의 공간 마법을 밀어내며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다.

✔️“흐으으으!”

✔️마르타의 입에서 허연 김이 뿜어져 나왔다.

✔️“마음대로 해봐. 녹슨 가위만도 못한 마법 따윈 나한테 안 통하니까!”

✔️“감히!”

✔️제이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공간 마법의 강도를 높였다. 공간이 더 크게 길게 접혔지만, 마르타의 오러를 밀어내지는 못했다.

✔️콰아아앙!

✔️마르타는 눈에 불길을 일으키며 진각을 밟았다. 두 장의 보호 마법이 걸려있던 대련장의 중심이 폭삭 무너지고, 사방이 가뭄 난 논처럼 갈라졌다.

✔️“크윽….”

✔️제이나가 균형을 잃은 순간은 찰나였지만, 마르타에게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녀는 단숨에 뛰쳐나가 제이나의 앞에 도달했다.

✔️‘블링크!’

✔️제이나는 접바람을 사용할 시간을 벌지 못하고, 블링크를 사용하여 마르타의 뒤편으로 이동했다.

✔️‘이제 다시 공격을… 어?’

✔️다시 공간 마법으로 마르타의 다리를 공격하려 했는데, 눈앞에 큼지막한 주먹이 다가와 있었다.

✔️“뒈져!”

✔️마르타가 단순한 블링크의 움직음을 파악하고 바로 쫓아온 것이다.

✔️“더 뻗으면 네 팔도 잘려!”

✔️“상관없어!”

✔️제이나는 발카르의 직계답게 그 짧은 시간에 공간 마법을 설치했지만 마르타는 손이 찢어지든 상관없이 주먹을 내질러 제이나의 턱을 후려쳤다.

✔️뻐어어어억!

✔️북이 찢어지는 소리가 대련장을 울렸다. 마르타의 주먹에 얻어맞은 제이나는 눈을 까뒤집은 채로 대련장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끄으….”

✔️“허….”

✔️사회자는 멍하니 서 있다가 제이나의 신음을 듣고서 정신을 차렸다.

✔️“스, 승자는 마르타 지그하르….”

✔️“야이 미친놈아!”

✔️마르타는 사회자의 선언을 듣기도 전에 대련장을 내려가 라온의 멱살을 쥐었다.

✔️“이게 무슨 지랄이야! 대체 뭘 받았길래 내 정보를 판 거냐고!”

✔️“아무것도 안 받았는데?”

✔️“그럼 왜!”

✔️“오러의 경지와 양이 좀 늘었지?”

✔️라온은 멱살이 잡힌 상태에서도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그게 무슨… 음?”

✔️마르타가 라온의 멱살을 놓고 멈춰 섰다.

✔️‘오르긴 했어. 그것도 꽤 많이….’

✔️신뢰하고 있던 라온의 배신에 화가 나서 생각 따위 하지 않고 가진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렸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오러의 양과 경지가 확실하게 상승해 있었다.

✔️“너 광폭화 상태에서 이성을 유지하려고 요즘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혔지?”

✔️“그걸 어떻게….”

✔️“네 힘의 원천 중 하나는 분노인데, 그걸 억지로 누르니까 힘이 나겠어? 이성도 좋지만, 가끔은 풀어줘야 해.”

✔️라온이 피식 웃으며 손을 저었다.

✔️“가주님께서 말씀하셨듯이 넌 너무 하나에 몰입하는 경우가 많아. 광폭화도 좋지만, 아직은 여러 가능성을 볼 수 있는 시기니까. 생각의 범위를 넓혀.”

✔️“그, 그래서 저 싸가지한테 내 정보를 말한 거야?”

✔️“치료나 받고 와.”

✔️라온은 답을 해주지 않은 채 대련장 외곽에 세워진 임시 치료소를 가리켰다.

✔️마르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조장님. 일단 치료부터 받죠.”

✔️1조 부조장인 예디가 마르타를 데리고 치료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하아….”

✔️마르타는 치료사에게 어깨와 손을 치료받으면서 라온을 바라보았다.

✔️‘정말 날 성장시키려고 제이나에게 정보를 넘겼던 건가.’

✔️라온의 담담한 음성 그리고 저 여유로움을 볼 때는 그것밖에 없다.

✔️그는 정말 자신을 더 높은 곳에 오르게 하기 위해서 그런 일을 했던 것 같다.

✔️‘저 녀석 진짜 바보 아니야?’

✔️본인의 싸움, 본인의 일에 집중하기도 바쁠 텐데 이 와중에 자신과 다른 광풍단 검사까지 챙기다니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보? 미련?”

✔️누가 누구한테?

✔️마르타가 땅을 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찢어진 입술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바보 천치는 나지.’

✔️라온에 대한 고마움이 가슴을 뜨겁게 달구며 동시에 심장을 사포로 긁는 듯한 아릿함이 찾아왔다.

✔️‘저 녀석이 나한테 도움을 준 건 오늘만이 아니잖아. 반면에 난….’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무언가를 주기는커녕 오히려 피해만 입혔었지.’

✔️훈련생 시절 라온을 먼저 공격하기도 했고, 조롱했으며, 계속 시비를 걸었었다.

✔️어린 치기와 양녀라는 열등감 그리고 백혈교에 대한 분노가 어우러져 열등감이 폭발했던 일이지만, 라온을 공격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더욱이 사과한 적도 없지.’

✔️라온에게 패한 뒤 두리뭉실하게 넘어갔을 뿐 조롱하고, 비웃었던 것에 대한 제대로 된 사과는 하지 않았다.

✔️라온의 친절에 기대어 패자는 승자의 말을 따른다고 하며 물 흐르듯 넘어간 게 다였다.

✔️“후우….”

✔️마르타가 본인의 뺨을 짝 치고서 라온과 광풍단을 바라보았다.

✔️저들을 보기만 해도 가슴이 따스해진다. 꼴 보기도 싫었던 그들은 어느새 목숨도 걸 수 있는 가족이 되어 있었다.

✔️‘때가 된 건가.’

✔️가주님이 말했던, 마음을 열고 동료에게 사정을 터놓을 때가 찾아온 듯싶었다.

✔️‘오늘 우승한다면….’

✔️결승에서 삼왕자를 꺾은 뒤 기다리고 있던 광풍단의 모두에게 자신의 사정을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마르타가 라온을 보며 주먹을 말아쥐었다.

✔️‘사과까지. 꼭.’

✔️*     *      *

✔️“아하하하!”

✔️체임버가 대련장 아래에 선 라온을 보며 폭소를 터트렸다. 정말 재밌는지 의자 위에서 발장구까지 쳤다.

✔️“아무 대가도 안 받고 동료의 정보를 팔았대!”

✔️그녀는 라온이 마르타에게 보낸 오러 메시지의 내용을 읽었는지 대화 내용을 모두 알고 있었다.

✔️“쟤 진짜 머리가 돌았는데? 너무 재밌잖아!”

✔️체임버가 의자 위에서 발장구까지 치며 히죽였다.

✔️“확실히 특이한 아이로군요.”

✔️레크로스 국왕이 턱수염을 쓸어내리며 허허롭게 웃었다. 그의 얼굴에도 즐거움이 묻어나왔다.

✔️“동료를 아주 잘 보고 있었다는 게 느껴집니다.”

✔️“상남자인 줄 알았는데 그냥 미친놈이었군!”

✔️오그람이 클클 거리며 입술을 비틀었다. 미친놈이라고 말한 것과 달리 오히려 라온에게 더 큰 흥미를 가지게 된 듯 보였다.

✔️“후후.”

✔️데루스는 말없이 라온만을 지그시 내려보았다. 너무 웃음이 짙어 오히려 인형 같은 표정이었다.

✔️“아저씨!”

✔️체임버가 의자 위로 올라가서 반대편에 있는 글렌을 불렀다.

✔️“쟤 대체 어떻게 키운 거야! 저런 물건은 어떻게 만드는 거냐고! 얼굴 잘생긴 것도 포함해서 말해줘!”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다.”

✔️글렌이 파르르 떨리는 입꼬리를 오러까지 사용해서 억지로 내리누른 채 고개를 저었다.

✔️“저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하며 해왔다. 나나, 다른 녀석들이 따로 해준 건 없어.”

✔️그는 본인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며 모든 공을 라온 본인에게 돌렸다.

✔️“스스로 생각하고 움직인다는 점이 저 아이를 저렇게 성장시켰을지도 모르겠군. 일단 무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심계나, 의협심 그리고 얼굴까지….”

✔️덤덤하게 시작했던 글렌의 목소리가 점차 달아오르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저씨?”

✔️“영감?”

✔️체임버와 오그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글렌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는 모습이라 그들 역시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커흠!”

✔️글렌이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멈췄다.

✔️“어, 어찌 됐든 그냥 그렇게 됐다는 거다.”

✔️뭐가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글렌이 말했기에 다들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익스퍼트급 4강 결투가 하나뿐이고, 마르타 지그하르트 검사의 부상이 있기에 익스퍼트급 결승 대신 먼저 마스터급 4강을 시작하겠습니다!”

✔️사회자는 마르타에게 약간이라도 회복 시간을 주기 위해서 마스터 급 4강을 먼저 시작하겠다고 외쳤다.

✔️“오, 그럼 정신도 미치고, 얼굴도 미친 라온을 바로 볼 수 있는 건가?”

✔️체임버가 빙긋 웃으며 몸을 앞으로 기울여 라온을 바라보았다.

✔️“크하하하!”

✔️오그람이 광소를 터트리고서 글렌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걸 어쩌나? 영감이 자랑하는 스스로 하는 꼬마도 여기까지겠군.”

✔️그는 라온의 반대편에 있는 참룡수 가로나를 가리키며 턱을 치켜들었다.

✔️“어설프게 찌르는 검 따위는 저 녀석에게 통하지 않아.”

✔️“그런가?”

✔️글렌이 차게 웃으며 오그람을 돌아보았다.

✔️“그럼 어설프지 않게 부수면 되겠지.”

✔️“뭐?”

✔️“잘 보고 있거라.”

✔️그의 붉은 눈동자가 라온처럼 반짝였다.

✔️“저 아이가 네 아들의 패션 근육을 깨부술 테니까.”

✔️*     *      *

✔️“와아아아아아아!”

✔️“라온! 라온! 라온!”

✔️“가로나! 가로나! 가로나!”

✔️관객들은 대련장에 선 두 사람의 이름을 외치며 손을 흔들었다.

✔️“후우, 긴장돼. 누가 이기려나?”

✔️“이건 창과 바위의 대결이라고 봐도 되겠네.”

✔️“방패가 아니라 바위?”

✔️“가로나는 방어력만 좋은 게 아니니까. 정타 한 번 들어가면 게임 끝이라고.”

✔️“그건 라온도 마찬가지지. 보리니 키튼의 검을 깨부순 강기라면 가로나도 못 버텨!”

✔️“마티스와 보리니 키튼을 무릎 꿇린 라온의 날카로운 검일지, 상대를 모조리 날려버린 가로나의 묵직한 주먹일지.”

✔️“힘과 기술의 대결인가?”

✔️“그렇지. 라온이 가로나의 빈틈을 노릴 테니까.”

✔️관객들은 이번 대결은 힘과 기술의 싸움이라는 기대를 한 채 입맛을 다셨다.

✔️‘힘과 기술이라….’

✔️라온은 관객들의 환호성을 들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쉽게도 그 소원은 못 들어주겠네.’

✔️가로나와의 싸움에서 얻어야 할 부분은 기술의 단련이 아니었다.

✔️“라온 지그하르트.”

✔️가로나가 목검의 손잡이처럼 길고 두꺼운 손가락을 풀며 고개를 들었다.

✔️“경고 하나 해주지.”

✔️그가 짐승처럼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 꼬챙이에 의지했다간 단번에 찢겨나갈 거다.”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듯 가로나의 전신에서 흉폭할 정도의 기파가 치솟았다. 극한의 무력을 응집시킨 무시무시한 기운이었다.

✔️“나도 경고 하나 하지.”

✔️라온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제천검을 뽑았다.

✔️“이 꼬챙이를 우습게 봤다간 그 크기만 한 몸뚱이에 바람구멍이 뚫릴 거야.”

✔️“크하하하하! 좋다! 할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가로나는 얼마든지 해보라는 듯 본인의 가슴을 쿵쿵 두드렸다.

✔️“아, 주, 준비되셨습니까?”

✔️사회자는 무서웠는지 이미 대련장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빨리 시작해!”

✔️“예.”

✔️라온과 가로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회자가 떨리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럼 마스터급 4강 1회전을 시작합니다!”

✔️그의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가로나의 몸이 사라졌다. 아니, 가로나 만이 아니라 라온의 모습도 그 자리에서 지워졌다.

✔️쿠오아아아앙!

✔️대련장 중심에서 강기의 충돌이 일어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이 공간 전체를 휩쓸었다.

✔️“으아아악!”

✔️“뭐, 뭐야!”

✔️“무슨 바람이 이렇게….”

✔️관객들은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채 고개를 숙여서 본인들의 몸을 보호했다.

✔️후우우욱!

✔️대련장에 깔린 회색 연기가 지워지며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난다.

✔️쿠구구구구!

✔️라온과 가로나는 대련장의 중심에서 막대한 강기를 일으킨 채 서로를 밀어내는 힘과 힘의 대결을 벌이고 있었다.

✔️“뭐, 뭐야. 이게….”

✔️“라온이 물러나질 않는데?”

✔️“기, 기술 대 힘이 아니라, 힘 대 힘이라고?”

✔️“그것도 안 밀려. 설화검협이 참룡수에게 안 밀린다고!”

✔️관객들은 가로나의 힘에 한치도 밀려나지 않는 라온을 보며 눈을 부릅떴다.

✔️콰아아앙!

✔️어마어마한 힘과 힘의 격돌에 라온과 가로나 사이에서 샛노란 스파크가 끝없이 튀겨졌다.

✔️“크으으….”

✔️라온은 야수처럼 으르렁거리는 가로나를 보며 입매를 말아 올렸다.

✔️‘야수연맹이 힘을 쓰는 방식. 잘 배우도록 하지.’

𝐂𝐡𝐚𝐩𝐭𝐞𝐫 𝟑𝟐𝟓
✔️제325화

✔️쿠구구구구!

✔️라온과 가로나가 서로를 향해 힘을 가할수록 대련장 전체에 무지막지한 압력이 내리꽂혔다.

✔️대련장을 보호하는 보호 마법 다섯 장이 찢어지고, 두터운 바닥이 뜯겨나가고 있음에도 두 사람은 발을 땅에 박은 듯 한치도 밀려나지 않았다.

✔️“네놈….”

✔️가로나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매를 찡그리며 라온을 노려보았다.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무슨 짓?”

✔️라온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지금 오러가 아니라, 육체의 힘으로 버티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 자그마한 체격으로 내 힘을 버틴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가 고막을 터트릴 듯한 기합을 지르며 진각을 밟았다. 2m가 한참 넘는 신장을 이용하여 라온을 위에서부터 짓눌렀다.

✔️“음….”

✔️라온이 신음을 삼키며 흔들리는 하체에 힘을 주었다.

✔️‘확실히 겪어본 적 없는 힘이야.’

✔️체술을 사용하지 않고, 그저 힘으로 누를 뿐인데 뼈가 으깨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인간이 아니라, 오우거와 힘으로 맞서고 있는 기분이었다.

✔️“적당히 하고 물러나라.”

✔️가로나가 눈동자에서 흉폭함이 치솟으며 내리누르는 힘이 더 강해졌다.

✔️맨손으로 드레이크의 목을 뜯었다는 소문이 진짜인지, 대련장이 뭉개지고 발이 바닥에 박히기 시작했다.

✔️“오기로 버티다간 그 꼬챙이를 휘둘러보기도 전에 네놈부터 찌부러질 테니까.”

✔️“이게 네 전력인가?”

✔️“뭐?”

✔️“이게 끝이라면 실망인데.”

✔️라온은 가로나의 압박에 손을 파르르 떨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았다.

✔️“곧 찌부러질 놈이 허세라니!”

✔️가로나의 눈빛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이 환호성 때문인가?”

✔️그는 라온의 이름을 외치는 관중석을 둘러보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배로서 충고 하나 하지. 명성과 인기는 무인을 죽이는 독이다.”

✔️“독?”

✔️“사람들의 함성과 찬사에 빠지다 보면 스스로의 한계를 깨닫지 못한 채 해야 할 일과 해선 안 되는 일을 구분하지 못하게 된다. 지금의 네놈처럼.”

✔️가로나의 눈동자에 피어난 흉폭함 사이에 이지적인 빛이 피어났다.

✔️“아쉽게도 네놈의 끝은 여기겠구나.”

✔️그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서 뻗어 나오는 힘이 한 번 더 폭발했다. 피부가 뜯겨나가고, 전신의 뼈가 부러질 듯한 충격이 일었다.

✔️쿠구구구구!

✔️누가 보아도 당장 찌부러질 듯 밀리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라온의 붉은색 눈동자는 태양을 비추는 샘물처럼 맑았다.

✔️‘힘 하나는 발군이야.’

✔️가로나의 힘은 심플하게 강했다. 어떠한 기술이나 특성 없이 단순하게 짓누르는 힘에 전신이 터져나갈 것 같았다. 오우거가 아니라, 오우거 로드 급의 힘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다만….’

✔️내가 보고 싶은 건 이게 아니야.

✔️그저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르는 게 아니라, 그 힘을 이용한 움직임을 보고 싶었다.

✔️‘단순한 힘이라면 내가 더 세니까.’

✔️라온이 차게 웃으며 왼발 앞꿈치에 힘을 주었다. 비복근과 대퇴근이 폭발할 듯 부풀며 대련장 바닥이 찌부러지고 다섯 장의 보호 마법이 동시에 터져나갔다.

✔️쿠구구구!

✔️오른 다리를 밀며 허리의 기립근을 세웠다. 하체에서 솟구친 힘이 상체까지 도달하자, 가로나의 거대한 손이 처음으로 밀려났다. 그의 난폭한 눈동자에 당황이 비쳤다.

✔️“무, 무슨….”

✔️“아직 멀었어.”

✔️라온은 봉인하듯 가라앉혀 둔 육체의 근력과 민첩성을 모두 끌어냈다.

✔️쿠구구구구!

✔️태산을 얹은 듯한 제천검의 칼날로 가로나를 정면에서 짓눌렀다.

✔️“크으….”

✔️성인 남성의 2배는 될법한 가로나의 큼지막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무릎이 땅에 닿기 직전까지 내려갔다.

✔️“이, 이건 말이 안 돼!”

✔️가로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부러질 정도로 이를 꽉 깨물었다.

✔️“그 얇은 팔다리에 왜 이런 힘이 있는 거냐! 아무리 오러를 잘 운용한다고 해도 불가능한 일이다!”

✔️“불가능이라….”

✔️불가능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지금 자신의 근력과 민첩성은 300에 근접하여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한 상태. 아무리 최강의 육체를 지닌 야수연맹의 무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없었다.

✔️“예전에도 말한 적 있는데.”

✔️“으윽….”

✔️라온이 차게 웃으며 제천검에서 한 손을 뗐다. 한 손만으로 누르고 있음에도 가로나는 검을 밀어내지 못했다.

✔️“내 근육은 단단하게 압축된 실전 근육이고, 네 근육은 풍선처럼 부풀기만 한 보여주기용 근육이잖아.”

✔️“이놈이….”

✔️손가락으로 각자의 팔근육을 가리키자, 가로나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한 마디로 내 건 실전 압축 근육. 넌 패션 근육이라는 거지.”

✔️“닥쳐라!”

✔️가로나가 참지 못하고 양팔을 들어 올렸다. 지금까지 직선으로만 뻗어오던 그의 힘이 나선으로 비틀어지며 강대한 충격이 일어났다.

✔️쿠와아아아앙!

✔️거대한 폭발과 함께 라온과 가로나가 대련장의 양 끝으로 밀려났다.

✔️“네놈이 무슨 사술을 썼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육체가 나보다 위라는 건 인정한다.”

✔️가로나가 입술을 깨물며 왼팔을 앞에 두고, 오른팔을 뒤에 놓으며 자세를 낮췄다.

✔️“하지만 쓰는 방법이 어설퍼. 힘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마.”

✔️“얼마든지.”

✔️라온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나와야지.’

✔️최강의 육체를 어떻게 운용하는지 보고 싶어서 이 자리에 섰는데, 알아서 보여준다니 기쁠 뿐이었다.

✔️“그 재수 없는 웃음도 여기까지다!”

✔️가로나가 땅을 박찼다. 돌진해오는 그의 거대한 육체가 환상처럼 세 사람으로 번져 보였다.

✔️‘환검의 묘리를 담은 보법인가?’

✔️전부 진짜 같은데?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들기에 생각할 시간은 많지 않았다.

✔️터엉!

✔️태화일보를 밟았다. 공간을 격하여 좌측으로 물러나려 할 때 가로나의 움직임이 급변했다.

✔️세 명으로 번져 보이던 가로나가 좌측에서 합쳐지며 순식간에 따라붙었다.

✔️후우우웅!

✔️어느새 다가온 가로나의 주먹이 시야를 가렸다.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진 본능적인 판단을 쌓아온 무학이 받친다. 빠르면서도 흉악한 권격이었다.

✔️찌지지직!

✔️라온이 급히 허리를 뒤로 젖혔다. 가로나의 주먹이 일으킨 풍압에 얼굴 피부가 찢어지는 것 같았다.

✔️“멍청한 놈!”

✔️가로나는 우위를 잡은 상태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왼쪽 팔꿈치를 그대로 찍어 내렸다.

✔️‘그 정도는 예상했어.’

✔️라온이 왼발을 뒤로 뺐다. 허리를 세우는 동시에 뒤로 젖힌 제천검을 위로 뻗어냈다.

✔️쿠와아아아앙!

✔️강기를 담은 검과 주먹이 맞부딪치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사위를 휩쓸었다.

✔️“으음….”

✔️라온이 뒤로 밀려 나가며 제천검을 쥐고 있는 손을 떨었다. 만화공을 극성으로 끌어 올렸음에도 손만이 아니라, 팔까지 충격이 전해졌다. 조금만 힘을 뺐다면 뼈에 금이 갔을 정도였다.

✔️‘회전인가.’

✔️조금 전 부딪쳤던 가로나의 주먹에는 강렬한 회전이 깃들어 있었다. 다만 평범한 전사경이나, 나선력과는 달랐다.

✔️‘거기다….’

✔️가로나의 권격에서 특이한 점은 회전만이 아니다. 가로나의 주먹의 타격은 두 번이었다.

✔️첫 번째 타격을 견디자마자, 바로 이어지는 두 번째 충격이 뼈를 울렸다.

✔️‘재밌네.’

✔️라온이 불의 고리를 극성으로 일으키며 입맛을 다셨다. 세 명으로 늘어나는 보법과 기이한 회전이 담긴 권격 마지막으로 두 번의 타격까지. 배울 점이 차고도 넘쳤다.

✔️“이제 얼굴에 여유가 사라져… 웃어?”

✔️가로나는 라온의 얼굴에 차오른 미소를 보고 입매를 비틀었다.

✔️“단숨에 끝을 내주마!”

✔️그가 숨을 들이마시며 발을 굴렀다. 지진 난 듯 갈라지는 대련장 사이로 돌진해왔다. 세 명으로 번지는 보법을 밟으며 거대한 주먹을 내질러왔다.

✔️라온이 눈매를 좁히며 태화사보를 밟아 물 흐르듯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세 명의 가로나는 중앙으로 합쳐지며 눈이 따라갈 수 없는 속도로 공간을 파고들어 왔다.

✔️‘세 모습으로 변하는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어.’

✔️적이 어느 쪽으로 움직여도 반응할 수 있도록 고안한 본능과 이성이 합쳐진 보법이었다.

✔️‘그리고 그걸 가능케 하는 건….’

✔️부드러운 발목.

✔️가로나의 발목을 보았다. 두꺼운 발목이 좌우로 번갈아 흔들리며 부드러운 회전을 일으키고 있었다.

✔️가로나는 오러 운용만이 아니라, 발목의 관절과 내부의 근육을 최대한 이용하여 이 미친 속도와 변화의 보법을 사용한 것이다.

✔️후우우우웅!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가로나가 주먹을 뻗어왔다. 빠르면서도 강맹한 압력에 맞지도 않은 손등에서 핏물이 터져 나왔다.

✔️‘지금 최선은….’

✔️라온은 제천검을 내리그어 만화공 백화 염주벽을 일으켰다. 적색 불꽃으로 타오르는 벽이 가로나의 주먹과 맞부딪쳤다.

✔️쿠와아아아아앙!

✔️강대한 회전력이 담긴 권격이 염주벽의 불꽃을 비틀어냈고, 두 번째로 뻗어온 충격이 그 빈틈을 뚫어버렸다.

✔️터어어엉!

✔️라온이 두 번째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뒤로 튕겨 나갔다. 휘청이는 다리에 힘을 주고서 탁한 숨을 내뱉었다.

✔️“하아….”

✔️강대한 충격에 속이 울렁거렸지만, 가로나가 보여준 체술의 비밀을 알았기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것도 회전이었어.’

✔️전사경과 나선력은 마나 회로를 지나는 오러에 회전을 걸어 무학의 위력과 관통력을 높이는 요소다. 어딜 가나 비슷한 묘리로 운용되는 무학이지만, 가로나의 것은 달랐다.

✔️‘근육의 회전.’

✔️가로나의 권격은 그저 오러와 관절만 회전시키는 게 아니라, 허리와 어깨 팔 그리고 손목 내부의 근육까지 회전시켰다. 오러와 관절 그리고 근육의 회전력을 모두 이용한 무학이었다.

✔️‘근육의 회전은 생각도 못 했어.’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근육을 한 번 더 움직이다니, 놀라운 방식이다. 새로운 깨달음에 뇌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다만 모든 비밀이 풀린 건 아니다. 아직 충격을 두 번 일으키는 방법은 파악하지 못했다.

✔️“끈질긴 놈!”

✔️가로나가 섬전처럼 쇄도해 위에서부터 주먹을 내리찍었다. 이 또한 야수연맹의 무학인지, 근육과 손목, 오러가 회전하며 뼛속까지 울리는 충격이 일어났다.

✔️권격은 단순하면서도 사나웠지만, 라온이 보는 건 권격 자체가 아니었다. 그는 첫 충격만이 아니라, 두 번째 충격까지 정면에서 견뎌냈다.

✔️쿠우우우웅!

✔️대련장 끝으로 밀려나간 라온의 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내렸다. 강기조차 뚫어내는 관통력을 지닌 권격을 계속 정면에서 막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랬군.’

✔️두 번의 충격을 일으킨 비밀은 주먹 자체였어.

✔️가로나는 권격을 날릴 때 손에 달걀을 잡고 있는 것처럼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가, 적에게 부딪치는 순간 주먹을 꽉 쥐며 오러를 폭발시켜 두 번째 충격을 만들어낸 게 분명했다.

✔️“후우….”

✔️라온이 입가에서 흘러내린 핏물을 닦으며 허리를 쭉 폈다. 내상은 입었지만, 가로나의 모든 비밀이 풀렸다. 만족스러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네놈. 그 반지는 왜 안 찼느냐?

✔️라스가 얼음꽃 팔찌에서 튀어나와 어깨에 내리 앉았다.

✔️‘청홍환?’

✔️-그렇느니라.

✔️‘내 실력으로 이기고 싶어서 안 꼈어.’

✔️-흥. 평소에는 악마보다 더한 놈이 이상한 곳에서는 정정당당하게 구는구나.

✔️라스는 조롱하는 말과 달리 마음에 드는 듯 콧김을 흥 뿜어냈다.

✔️-본왕도 그런 면이 있느니라. 장비? 아티팩트? 좋다. 좋지. 하지만 진짜 챙겨야 할 것은 스스로의 무력이니라, 본왕이 마계에 있을 때….

✔️‘지금 바쁘니까. 나중에.’

✔️라온은 수다를 시작하는 라스를 손등으로 쳐내고서 가로나에게 집중했다.

✔️‘아직 싸움은 끝나지 않았어.’

✔️회전력의 비밀은 알아차렸지만, 그걸 얻어가는 건 다른 일이다. 계속 부딪치며 그 묘리를 익혀야 했다.

✔️‘따라하기에 딱 맞는 검술이 있지.’

✔️만화공 회천.

✔️회천은 손목과 오러를 모두 회전시켜 톱날처럼 돌아가는 불꽃을 만드는 만화공의 검술. 야수연맹의 체술을 얻어가기엔 제격인 무학이었다.

✔️“나와 정면으로 부딪쳐서 이 정도로 버틴 건 네놈이 처음이다.”

✔️가로나의 표정은 애매했다. 분한 듯 보이면서도 옅은 웃음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힘과 힘으로 부딪치는 게 이리 재밌을 줄은 몰랐다. 네가 언제까지 버텨줄지 기대가 되는군.”

✔️그가 손가락을 풀며 큼지막한 미소를 지었다. 최후의 승자는 본인이라 믿고 있는 표정이었다.

✔️쿠오오오오!

✔️가로나가 두 손을 펼친 채 오러를 모조리 끌어 올렸다. 어깨 위로 붉은 아지랑이가 피어날 정도로 강대한 기운이 끝없이 타올랐다.

✔️“지금부터가 진짜다!”

✔️그가 무시무시한 속도로 달려와 주먹을 내리찍었다.

✔️쿠웅!

✔️라온이 진각을 밟으며 만화공을 극성으로 일으켰다. 불의 고리를 통해 본대로 가로나의 움직임을 따라 육체와 오러 그리고 근육을 동시에 회전시켰다.

✔️쩌어어어엉!

✔️세 걸음을 물러난 가로나와 달리 라온은 일곱 걸음을 밀려나며 손을 떨었다.

✔️‘역시 바로 되지는 않네.’

✔️오러의 움직임이 아니라, 육체. 그것도 근육의 움직임이었기에 쉽사리 따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방법은 알겠어.

✔️첫 시도는 실패했지만, 가로나가 어떻게 근육을 움직이는지 알 것 같았다.

✔️‘오러.’

✔️그는 오러로 근육의 세밀한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아직 멀었다!”

✔️가로나가 재차 달려든다. 뻗어오는 주먹에 담긴 맹렬한 힘이 전신을 짓눌러왔다. 같은 방향으로 회전하는 관절과 근육, 강기가 어우러지며 무시무시한 충격파가 일어났다.

✔️“좋다.”

✔️라온이 입맛을 다시며 제천검의 칼날 위로 시뻘건 불길을 일으켰다.

✔️“끝까지 가보자.”

✔️*     *      *

✔️라온과 가로나의 부딪침에 대련장 바닥이 가뭄 난 논처럼 갈라진다.

✔️마법사들이 계속해서 보호 마법을 펼치고 있음에도 찰나에 순간에 찢어져 의미가 없을 정도였다.

✔️“이, 이게 인간의 싸움인가?”

✔️“뭐, 이런 결투가….”

✔️“설화검협은 대체 왜 맞서서 싸우는 건데! 피한 뒤에 빈틈을 노릴 기술이 있잖아!”

✔️“그러니까. 왜 장점을 버리고, 가로나의 필드에서 싸워주는 거냐고!”

✔️관객들은 가로나와 정면 대결을 벌이는 라온을 보고 당황하며 헛바람을 흘렸다.

✔️“무슨 약점이라도 잡힌 거 아니야?”

✔️“저길 봐라. 웃고 있잖아. 절대 아니지.”

✔️“미쳤어. 이런 정신 나간 결투는 태어나서 처음 봐….”

✔️“가슴이 쫀득쫀득하네. 이게 남자의 대결이지!”

✔️“라온! 끝까지 버텨라!”

✔️“가로나! 절대 지지 마!”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검과 주먹을 뻗어내는 라온과 가로나를 향해 목이 터질 정도의 함성을 질렀다.

✔️“이런 전개는 예상 못 했는데.”

✔️체임버가 고개를 앞으로 쭉 내밀어 대련장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치고받는 싸움이 될 거라고 예상한 사람 있어?”

✔️그녀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지만, 대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걸 누가 예측했겠습니까.”

✔️레크로스 국왕이 가로나의 주먹을 막아내는 라온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보리니 키튼을 꺾은 것처럼 빈틈을 노릴 줄 알았는데, 저 가로나와 정면에서 맞붙을 줄이야….”

✔️그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설화검협의 육체 능력은 제 예상을 한참 뛰어넘고 있군요. 저런 형태와 크기의 근육에서 어떻게 저런 위력이 나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데루스 로베르트도 어처구니가 없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다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육황의 수장들과 달리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크하하하하!”

✔️오그람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광소를 터트렸다.

✔️“저 꼬마. 볼수록 마음에 드는군!”

✔️그는 앞으로 내달려 가로나에게 회천을 날리는 라온을 가리키며 히죽였다.

✔️“가진 힘을 모조리 끌어 올려 정면에서 부딪친다! 간단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저 녀석은 진짜 무인이다!”

✔️오그람이 고개를 돌려 글렌을 바라보았다.

✔️“영감과 달리 야수의 피가 넘치는 아이야. 연맹에 데리고 가고 싶을 정도라고.”

✔️“그리되면 야수연맹은 세상에서 지워지겠지.”

✔️글렌이 차가운 시선으로 오그람을 노려보았다.

✔️“농담도 늘었군!”

✔️오그람은 글렌의 말을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음….”

✔️셰릴은 글렌의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어깨를 떨었다.

✔️‘그거 농담이 아닐 텐데….’

✔️오그람은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지만, 글렌은 진심이었다. 그가 라온을 건드렸다간 정말 야수연맹은 사라질지도 모른다.

✔️“저 작은 육체로 가로나에 맞서고, 물러서지 않는 점은 칭찬해주지. 하지만 거기까지야.

✔️오그람은 언제 웃었냐는 듯 진중한 눈빛으로 라온을 바라보았다.

✔️“가로나의 진짜 장점은 파괴력만이 아니라, 회복력과 내구력. 서로를 내부에서 파괴한다면 결국 쓰러지는 건 저 꼬마가 될 거야.”

✔️오그람이 입맛을 쩝 다시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정면으로 부딪친 순간 승자는 이미 결정됐어. 오기로 견디고 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할 거다.”

✔️“네 눈은 여전히 옹이구멍이로군.”

✔️“무슨….”

✔️“저 아이의 검을 보아라.”

✔️글렌이 긴 손가락을 들어 라온을 가리켰다.

✔️화아아아아!

✔️라온의 허리와 팔, 손목이 기묘한 회전을 일으킨다. 톱날처럼 타오르기만 하던 불꽃이 검극에 응집되며 태양과도 같은 적색 구체를 만들어냈다.

✔️“저, 저건….”

✔️오그람은 라온의 움직임을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턱을 떨었다.

✔️“흑수족의….”

✔️“저 아이의 시작은 느리지만….”

✔️글렌이 만족스러운 듯 입매를 말아 올렸다.

✔️“그 끝은 언제나 승리를 향해 있다.”